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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 이승효가 그려내는 임금 고종의 모습 본문

종영 드라마 리뷰 /무신

'무신' 이승효가 그려내는 임금 고종의 모습

빛무리~ 2012. 3. 18. 06:30




첫 회부터 제 눈을 사로잡은 김윤후(박해수)가 2회부터 거의 나오지도 않는 단역 수준으로 전락하면서 (물론 훗날에는 승려 장군이 되어 큰 활약을 한다지만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님) 저는 조금씩 '무신'에 대한 관심을 잃어갔습니다. 무엇보다 주인공 김준(김주혁)의 캐릭터에 별다른 공감이나 몰입이 되지 않았거든요. 게다가 무슨 격구시합 이야기를 그렇게 오랫동안 질질 끄는지, 이환경 사극 특유의 지루함이 초반부터 느껴지더군요. 결투 장면이 길게 이어지는 것은 전적으로 남성들 취향일 뿐, 그런 걸 좋아하는 여성은 드물거든요. 예를 들어 유난히 전투씬이 많았던 '반지의 제왕2'를 극장에서 볼 때, 저는 그 시끄러운 와중에도 쿨쿨 자고 있었다죠.

하지만 그래도 포기하긴 아쉬워서 띄엄띄엄 보고 있었는데, 드디어 격구시합이 끝나면서 내용이 새로워지기 시작하는군요. 김준은 격구대회의 우승자가 되었고, 그 특전으로 월아(홍아름)를 다시 산 속의 절로 돌려보내 달라는 청원을 합니다. 소원치고는 하찮은 것이라 최우(정보석)는 기꺼이 허락하는데, 김준 곁에 남아있고 싶은 월아는 혼자 가지 않겠다고 단호히 버티는군요. 그녀를 몸종으로 데리고 있던 최우의 아내는 김준과 월아가 서로 연모한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맘좋게도 그들을 결혼시켜서 따로 살도록 내보낼 계획을 세웁니다. 하지만 최우의 망나니 서자가 월아에게 집적대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꿈같은 행복은 목전에서 날아가고 그녀의 앞날에는 비극적 운명만이 남겠네요.

한편 최송이(김규리)의 캐릭터도 생각보다는 꽤 멋있는 여자였습니다. 대귀족의 딸로서 노예 사내에게 한눈에 반해 노골적으로 들이대는 모습이 별로 기품있어 보이지는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짝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숨김없이 자기 속마음을 모두 털어놓는 모습을 보니 그런 거침없는 성격도 오히려 매력있음을 느끼게 되더군요. "나는 너에게 마음을 주었는데, 너는 월아를 구하기 위해 나를 이용했다"면서 송이는 김준에게 분노를 드러냅니다. 조선시대 여인 같았으면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일까요? 그녀의 서슬퍼런 분노 앞에 김준은 머리 숙여 사죄하며, 아씨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여동생처럼 여기는 월아를 위하는 마음과 반반씩이었다고 대답합니다. 조금이나마 자기를 생각했다는 것에 마음이 풀린 송이는 흐뭇해하며 돌아오는데, 자기 어머니가 김준과 월아의 결혼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충격을 받겠군요.

중견배우들의 연기는 모두 명품이지만, 저는 그 중에서도 최충헌 역의 주현을 제일로 꼽고 싶습니다. 그 역할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연기자는 다른 사람을 도저히 생각도 할 수 없을 듯 싶네요. 죽음이 닥쳐오고 있음을 느끼고 후계자를 고민하던 최충헌은, 더 큰 세력을 지녔으나 성품이 야비한 둘째아들 최향(정성모)를 제치고, 올곧은 성품의 맏아들 최우에게 자리를 물려주기로 결심하는데, 최향 측에서 눈치채지 못하게 하느라 갖가지 용의주도한 술책을 쓰는군요. 평생토록 산전수전 다 겪고, 집권 중에 4번이나 왕을 갈아치웠으며, 자기 친동생과 조카마저 권력을 위해 척살했던 이 늙은 뱀의 눈빛은 지금도 섬뜩하게 번쩍입니다. 그의 경륜과 지혜와 처세술을 따라가려면 아직 최우는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데 8회부터는 주목할만한 또 다른 인물이 나타났습니다. 고려의 23대 임금 고종 역할에 이승효가 캐스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궁금하던 터인데, 예상보다 좀 늦게 등장했네요. 요즘은 가히 '젊은 꽃미남 왕'이 대세죠. 신선한 이슈를 불러일으켰던 '뿌리깊은 나무'의 송중기에 이어 '해를 품은 달'의 김수현은 그야말로 초대박을 쳤습니다. 이제 다음 주면 이승기 주연의 '더킹투허츠'도 방송되기 시작하겠군요. 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약한 느낌은 있지만 '선덕여왕' 알천랑의 매력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저는 이승효의 고종 역할에 적잖은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픽션 사극이 대세인 요즘 보기드문 정통 사극인지라, 고려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저는 이승효에 의해 과연 어떠한 임금의 모습이 그려질까 자못 궁금했습니다.

처음 등장한 고종은 퍽이나 기운차고 활발해 보였습니다. 높은 용상에 앉아 호기로운 자태와 목소리로 신하들을 향해 손짓을 하며 "어서들 오시오, 어서들 오시오~" 하고 반갑게 외치더군요. 최씨 집안에 권력을 빼앗긴 채 허수아비 임금 노릇을 하는 상황이니, 고종은 훨씬 더 어둡고 진지하고 슬픈 분위기를 자아내는 임금일 거라 예상했던 저로서는 무척 뜻밖이었습니다. 최충헌을 한껏 높이고 자신을 형편없는 사람으로 낮추며 언중유골의 풍자하는 말들을 내뱉기는 했지만, 그 어조는 냉소적이기보다 오히려 밝고 호탕했습니다. 아무리 봐도 좀 이상하다 싶었어요. 고종은 46년의 재위 기간 동안 내부적으로는 무신 집권자들의 등쌀에 시달렸고, 외부적으로는 몽고의 침략에 시달려야만 했던 비운의 임금인데 말입니다. 이승효가 캐릭터 해석을 잘못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더군요. (물론 멋있기는 했지만...)

그런데 팔만대장경이라는 소재를 떠올리니, 이승효가 의도적으로 고종의 캐릭터를 그렇게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원나라의 침략을 부처의 힘으로 격퇴하기 위하여 간행되었다는 팔만대장경은 이 드라마 '무신'의 매우 중요한 소재이기도 하지요. 김준을 어려서부터 길러준 수법대사의 사형이신 수기대사가 앞으로 대장경 편찬의 책임을 맡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고종 치세 시절에 이루어진 일이니, 임금 고종의 큰 업적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겠지요. 고종은 정치 군사적으로는 무력한 왕이었으나, 문화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시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했던 몽고의 침략을 받은 고려는 속절없이 패배하여 왕자를 볼모로 보내는 등 굴욕적인 강화를 체결함으로써 사실상 원나라의 속국으로 떨어졌습니다. 이 굴욕은 훗날 공민왕 대에까지 이어졌지요. 전쟁통에 귀중한 문화재도 많이 잃었고, 수십만 명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 몽고인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일마저도 임금 탓을 하던 시절이니, 치욕적 역사의 한 획을 그을 때 하필 임금의 자리에 앉아있었던 고종은 지독한 고뇌와 자책감에 빠졌을 것입니다. 망국의 군주... 역사 속에서 그 이름은 만고의 죄인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저는 팔만대장경을 비롯한 문화적 업적을 그의 처절한 몸부림의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술가들도 그렇듯이, 훌륭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고통이 수반되어야 하니까요. 어쩌면 자기 힘으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암담한 현실에 절망한 나머지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려 회피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승효는 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한 모양이더군요. 그가 그려내는 고종은 어두운 상황에서도 언제나 긍정적 사고방식과 희망을 잃지 않는, 매우 기운차고 밝은 성격의 임금이었습니다. 그의 치세에 이룩한 팔만대장경을 비롯한 문화적 유산들은, 현실도피라든가 처절한 몸부림의 결과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도전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이는 또 다른 방식의 극복이라 할 수 있겠군요. 약소국의 비극을 막을 능력은 없었지만, 고종은 자신에게 남은 모든 힘을 쏟아 값진 문화적 유산을 마련함으로써 이 땅의 후손들에게 속죄하려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저의 해석보다는 이승효의 해석이 훨씬 멋지네요. 앞으로 그의 연기를 통해 그려져갈 비운의 임금 고종의 모습을 기대해 보겠습니다.



3 Comments
  • 서정호 2012.03.18 17:39 전 고종의 모습이 활달하게는 느껴지지 않았었습니다.

    오히려, 무신 정권 앞에서는
    감히 얼굴 한번 찡그리지 못할 정도로
    극도로 위축된 걸로 느껴졌었는데요.

    항상 '난 당신들에게 요만큼의 불만도 없답니다' 하는 모습이어야
    황제의 지위 내지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상태인 것으로요.


    이 사극을 어쩌다 보게 되면
    제일 먼저 궁금해지는 게, 당시의 불교가 과연 지금과 비슷했을까..하는 점입니다.

    왕족, 귀족 자제의 출가도 빈번했고
    출가했다가 돌아와 왕이 되기도 하는 걸 보면,
    승려라는 신분이 상당히 높았고
    지금의 티벳에서와 같이 지도층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고요.

    연등회, 팔관회와 같은 왕실 주최 행사를 해마다 하고 있는데,
    산 속에 파묻혀 염불이나 외고 있는 오늘날과 비슷한 모양새일 리 없다는 생각입니다.


    노예에 관한 구성도 그렇고.. 투구나 마구도 그렇고..
    우리나라 보다는 로마 이미지에 걸맞는 듯 합니다.

    그러고 보니, 구성의 극적 요소를
    벤허, 스파르타쿠스, 글래디에이터 등 기존 영화/드라마에서
    베끼기로 작정하였는지도 모르겠군요.

    다른 드라마들도 그런 느낌이지만
    사극은 정말 예전보다도 훨씬 더 고증에 정성을 들이지 않나 봅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 국민을 특정 방향으로 호도하기 위해 노력하는 건가..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말입니다..~
  • Favicon of https://qlcanfl.tistory.com BlogIcon 빛무리~ 2012.03.18 21:20 신고 무신정권 앞에서 고종이 하는 말의 내용이야 물론 쩔쩔 매면서 비위를 맞추는 말들이었지요. '난 당신들에게 요만큼의 불만도 없답니다' 하는 식의 내용이긴 했는데, 그 말을 하는 어조와 표정은 너무 강인하고 당당하고 활발하더란 말입니다. 제가 보기엔 위축되었다기보다 오히려 상대를 깔보고 비웃는다는 느낌마저 들더군요. 현실적 굴레는 어쩔 수 없지만, 다른 차원에서는 내가 너희보다 우위에 있다는 식의 자신감이랄까, 그런 것도 좀 느껴졌고요.
    저도 이승효의 연기를 보기 전에는 서정호님의 말씀처럼 그런 위축된 이미지의 유약한 왕을 상상했었는데, 막상 보니까 그의 연기는 아주 다른 느낌을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좀 이상했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그래서 좋았어요^^
  • 서정호 2012.03.26 09:49 아, 그 안에서 나름대로의 강단이 있어 보인다는 말씀이셨군요.
    저도 그렇게 느꼈었는데,
    제가 빛무리님 글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었나 보네요.

    더구나, 고려말의 역사가 이성계에 의해 많이 재단되었을 것을 감안하면
    우리가 배웠던 것보다는 상당히 자주적이었을 가능성이 높죠.

    칭기스칸에게 당한 것도
    중동, 유럽 지역이 순식간에 몰살/항복하는 데에 비하면
    비교적 잘 버티고, 패전 후 대우도 나름 각별했다는
    자그마한 위안거리가 있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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