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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범의 '얼굴', 그 핏빛 동그라미의 가공할 위력 본문

예능과 다큐멘터리

임재범의 '얼굴', 그 핏빛 동그라미의 가공할 위력

빛무리~ 2011. 10. 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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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음악 여행 '바람에 실려'가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가수다'에서 하차한 후 꼬박 4개월의 공백을 거쳐, 임재범이 브라운관으로 돌아왔습니다. 삭발했던 머리는 그새 많이 길어졌고 얼굴은 좀 더 야윈 듯 싶더군요. 하지만 전체적으로 풍기는 분위기는 예전보다 훨씬 더 힘있고 활기차게 변해 있었습니다. '나가수' 출연 당시에는 너무 오랜만에 세상에 나와서인지 무척 조심스러워 보이기도 했고, 아내의 병세 때문인지 매우 슬프고 침체된 분위기가 있었거든요. 하지만 이제는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는 데다가, 아내의 병세도 많이 호전되어서인지 그 어두운 느낌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임재범의 이름을 걸고 '바람에 실려'라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 그를 다시 보게 된 것은 기뻤지만 과연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지 염려가 앞섰던 것도 사실입니다. '일밤'의 형제 프로그램인 '나가수'도 음악 예능인데, 무려 3시간 동안이나 연달아서 음악 예능이 방송되면 사람들이 질려서라도 안 보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리고 '나가수'에서 그토록 석연찮게 임재범을 하차시켰던 '일밤' 제작진이 불과 몇 개월만에 그를 다시 불러들인 것도 너무 속이 보이는 듯해서 못마땅했습니다. 임재범이 그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 조금은 신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와 같은 컨셉의 음악 여행은 임재범 자신이 오랫동안 염원해 온 꿈이었더군요. 1998년에 작곡가 하광훈과 더불어 버스를 타고 미국 전역을 달리는 음악 여행을 계획했었는데 비자 문제로 좌절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그가 선뜻 이 프로그램을 수락한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음악인으로서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인데, 방송국으로부터 막강한 지원까지 받으며 실행할 수 있는 기회가 왔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겠지요. 게다가 절친한 작곡가 하광훈과, 평소 깊이 존경해 왔다는 건반연주자 이호준처럼 든든한 동료들도 함께 하니까 더없이 좋을 것입니다. 썰렁한 4차원 유머를 남발해가며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어대는 호랑이의 모습은, 마치 소풍을 앞두고 들떠 있는 어린아이 같기도 하더군요..ㅎㅎ

첫 방송부터 임재범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어떤 여행인지를 분명히 보여 주었습니다. 미국 땅에 도착하자마자 그가 한 일은 생뚱맞게도 바다사자의 울음소리를 흉내내며 동물과 교감을 시도하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 바다사자들은 임재범의 메시지를 알아들은 것처럼 저마다 그를 돌아보며 지극한 관심을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이한 외침소리를 무슨 뜻으로 인식했는지는 모를 일이나, 어쨌든 나름대로 음악(?)을 통한 교감은 사람만이 아니라 동물에게도 적용된다는 사실이 그로써 증명된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임재범이 선택한 다음 순서는 길거리 공연을 하고 있는 미국인 뮤지션과 다짜고짜 인사를 나누고 덥석 악수를 하더니 즉흥적으로 합동 공연을 벌인 것이었습니다. 여행하는 동안 반주를 맡아 주기 위해 동행한 B.O.B (밴드 오브 브라더스) 또한 두말없이 그 자리에서 주섬주섬 악기를 꺼내 판을 벌리고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동행한 지상렬은 갑작스런 상황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이 뮤지션들은 모두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는 듯 태연하기 이를 데 없더군요.

지구의 반대편에서 각각 태어나고 살아온 이 사람들은 불과 5분 전에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눴고, 아무 연습이나 준비도 없이 막무가내로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음색이 자연스레 어우러지며 만들어 내는 하모니는 놀랍도록 절묘했습니다. 길거리를 지나치던 많은 사람들도 신비로울 만큼 환상적인 그 소리에 매료되어, 하나 둘씩 눈을 반짝거리며 이들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임재범의 거친 보이스가 미국 땅의 낯선 거리에 거침없이 울려퍼졌습니다.

푸른 눈의 아이를 목마 태운 아버지도, 블론드빛 머리칼이 썩 잘 어울리는 연인들도, 저마다 흐뭇한 미소를 띤 채 이들의 공연을 감상하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필요치 않았습니다. 낯선 이들과 마음을 나누는 데는 그저 음악이면 충분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환히 웃으며 노래하는 임재범의 모습은, 제가 이제껏 보아 왔던 그의 모든 표정 중에 가장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었습니다. 그가 원한 것이 바로 이거였군요!  

그러나 '바람에 실려' 1회에서 제 마음을 결정적으로 뒤흔들어 놓은 부분은 따로 있었습니다. 멤버가 확정되고 나서 미국으로 출발하기 전에 그들은 스튜디오에서 준비 모임을 가졌던 모양입니다. 배우 김영호와 이준혁 등 평소 친분관계가 없었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를 소개하고 인사할 자리가 필요했겠지요. 멤버들의 소개가 끝나자 MC는 임재범에게 노래 한 곡을 청했고, 임재범은 "제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선배님이 부르셨던 노래인데, 이 노래를 들으면 제 어릴 적 생각이 납니다..." 이렇게 말하며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뜻밖에도 그것은 1974년에 발표된 윤연선의 노래 '얼굴'이었습니다. 호랑이같은 임재범이 "제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선배님"이라고 칭한 사람이, 그토록 가냘픈 외모와 가녀린 목소리를 지녔던 여자 가수라는 사실은 정말 쇼킹했습니다. 윤복희처럼 강한 이미지의 여자 가수라면 모를까, 윤연선은 왠지 임재범과는 영 어울리지 않을 듯한 느낌이었거든요. 1972년에 데뷔했던 윤연선은 그 성품 또한 목소리 만큼이나 수줍고 여린 편이었다고 합니다.

'얼굴'은 원래 전래가요로 떠돌던 노래인데, 그 곡을 부르고 싶었던 윤연선은 일부러 작곡자를 수소문해서 동도 중학교의 음악교사였던 신규복을 찾아가 요청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신규복과 윤연선에 의해 다듬어져 발표된 '얼굴'은 가요라기보다 오히려 동요에 가까울 만큼 순수하고 맑은 느낌의 노래로 재탄생했지요.

이 노래가 인기를 얻으면서 윤연선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고 방송 출연 및 음반사의 러브콜이 쇄도했지만, 상업적 이해타산이 강조되는 연예계의 생리는 그녀의 기질에 맞지 않았고, 결국 윤연선은 짧은 가수 활동을 미련없이 접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지난 2001년에 윤연선은 포크 30주년 기념공연 '행복의 나라로'를 통해 복귀했는데, 그 무대를 지켜 본 한 남자가 연락을 해 왔습니다. 바로 30년 전에 헤어졌던 그녀의 첫사랑이었습니다. 평생 그를 잊지 못하고 독신으로 지내던 윤연선은 재회한 첫사랑과 바로 다음 해에 결혼을 하였습니다. 이토록 순수하기 이를 데 없는 윤연선의 마음가짐이, 임재범으로 하여금 그녀를 '너무너무 좋아하는 선배님'이라고 부르게 했던 걸까요?

원래 윤연선의 목소리로 그려진 노래 '얼굴'은 그녀의 맑고 가녀린 이미지와 꼭 닮았었지요. 연한 푸른빛으로 그려지는 곱고 예쁘장한 동그라미였습니다. 그런데 임재범의 목소리로 새롭게 그려진 '얼굴'은 완전히 다른 노래로 탈바꿈했더군요. 그리움에 절규하는 야수의 처절한 감성으로 허공에 그려지는 동그라미는, 금방이라도 선혈이 뚝뚝 떨어질 듯한 핏빛이었습니다.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임재범의 '얼굴'을 들으면서 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못하면 노래를 듣다가 기절할 수도 있겠구나. 정신... 정신 차리자!" 하지만 노래는 계속되었고, 갈수록 아찔해지는 정신을 가누기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그가 떠나 있는 동안에도 수많은 노래를 들어 왔지만, 이토록 걷잡을 수 없이 솟구치는 감동으로 온 몸을 전율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참... 오랜만이군요. 그 순간 저는 복잡했던 감정들을 모두 털어 버렸습니다. 지난 시간의 분노와 슬픔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브라운관에서 그의 모습을 보고,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니까요! 임재범, 그가 다시 돌아와 주어서 저는 무척이나 기쁘고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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