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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향기' 채은석, 고통뿐인 외사랑을 시작하다 본문

드라마를 보다

'여인의 향기' 채은석, 고통뿐인 외사랑을 시작하다

빛무리~ 2011. 8. 14.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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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병원이 주무대로 등장하는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는 편입니다. 좀 더 간단하고 솔직히 말한다면 병원 자체를 매우 싫어한다고 하겠습니다. 이러면 안되는데, 병원에 대한 거부감이나 공포증을 갖지 말아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그런 것이 좀 있습니다. 하여튼 그래서 주인공이 시한부 환자로 등장하는 '여인의 향기'를 처음엔 안 봤습니다. 1회에 잠깐 틀어보긴 했지만 병원 장면들이 너무나 생생한 데다가, 결과는 어차피 불치병에 시한부로 나올 것을 알고 있는데, 젊은 여주인공이 병원의 차가운 기계 속에 몸을 눕히고 검사받는 장면은 더욱 끔찍하기만 해서 진저리를 치며 채널을 돌려버렸습니다.

1~2회 방송 후 쏟아져 나오는 리뷰들을 읽으니, 일본 관광 상품을 홍보하는 느낌이 든다고들 하기에 역시 안 보길 잘했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여전히 보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으로 저 자신을 위로하려 했던 것도 같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3회 중간쯤부터 재방송을 보았는데 생각보다는 그리 불편하지 않더군요. 제가 안 보고 싶었던 병원 위주의 장면들이나, 일본 여행 장면들이나, 가뜩 시한부 선고로 충격받은 여주인공이 반지 도둑 누명을 쓰고 따귀까지 맞는 억울한 장면들은 1~2회에서 다 지나간 상태였습니다.

각종 스포일러로 대략의 내용을 알고 있던 터라 앞부분을 건너 뛰어도 전혀 문제가 없었고, 무심히 힐끗거리던 저는 어느 새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매우 심각한 상황인데도 코믹한 분위기를 잃지 않고 가볍게 풀어나가는 이 드라마는 묘한 매력이 있더군요. 특히 제 눈을 사로잡은 캐릭터는 의사 채은석(엄기준)이었습니다. 강지욱(이동욱)도 멋있긴 하지만, 가난한 여주인공을 사랑하게 되어버린 시크한 까도남 재벌2세, 이거야 너무 흔해빠진 남주인공 아니겠습니까? 캐릭터가 너무 평범해선지, 아직까지는 별다른 임팩트를 발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여주인공 이연재(김선아)와의 투샷이 더 자연스러운 쪽도 강지욱보다는 채은석입니다. 김선아와 엄기준은 연기력 뿐만 아니라 외모적인 면에서도 엇비슷하니 참 잘 어울리더군요. 그에 비해 이동욱은 김선아의 막내동생쯤으로 보이는 외모에다가, 연기도 엄기준의 능란함에 비하면 어딘가 뻣뻣한 느낌이 있습니다. 하긴 제대 후 바로 찍은 작품이니까 어느 정도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요.

어쨌든 죽기 전에 미친듯 연애 한 번 해보고 싶었던 노처녀 이연재는, 젊고 잘 생긴 재벌2세 강지욱을 진짜로 사랑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처럼 달콤한 연애가 아니라 더없이 뼈아픈 사랑입니다. 강지욱의 마음을 아직 모르는 연재는 그 잘난 남자를 혼자 짝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불치병까지 걸린 자기의 현실이 더욱 더 비참하기만 할 뿐이죠. 그런데 이중삼중의 고통을 짊어지고 힘들어하는 연재 곁에서 은근한 위로와 힘을 주는 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초등학교 동창인 의사 채은석입니다.

"이 병원에서 나보다 더 불친절한 의사는 없을 거야" 라고 스스로 인정할 만큼, 채은석은 원래 따뜻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25년만에 환자와 의사의 관계로 재회한 연재에게 곧바로 6개월의 시한부 선고를 내리면서도 한치의 망설임 없이 건조한 태도였을 것 같더군요. (사실 그 부분은 제가 안 봐서 잘 모르겠습니다..;;) 어린 시절처럼 자기를 친구로 대하며 격의 없이 반말하는 연재에게, 환자를 대하는 의사로서 깍듯이 말을 높이는 은석의 모습은 지나치게 사무적이어서 비정하게까지 보였습니다. 그러나 밑바닥까지 추락한 힘든 상황에서도 씩씩함을 잃지 않는 연재의 따스하고 인간적인 매력은, 차갑게 닫혀 있던 은석의 마음을 조금씩 열어 젖힙니다.

진짜로 빵 터졌던 장면은 본의 아니게 연재와 더불어 시아준수의 콘서트를 구경가게 된 채은석이 사연의 주인공으로 선정되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장면이었습니다. 평소 시아준수의 팬이었던 연재는 그의 콘서트를 구경하는 것이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 중 하나였기 때문에, 되도록 많은 지인들의 이름으로 사연을 보내어 당첨 확률을 높이려 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은석의 이름으로 보낸 사연이 당첨되었고, 본인과 함께가 아니면 입장이 불가하다는 원칙 때문에 싫다는 은석을 강제로 설득했습니다. 이 때만 해도 마음이 열리지 않았던 은석은 진심으로 짜증스러워했지만, 불친절한 자기에게 앙심을 먹은 환자 보호자가 끼얹은 물벼락을 함께 뒤집어쓴 연재에 대한 미안함으로 마지못해 함께 갔던 것입니다.

콘서트에서 최종적으로 사연이 채택된 한 명의 팬은 시아준수와 단둘이 식사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는데, 채택된 것은 바로 연재가 은석의 이름으로 꾸며서 보낸 사연이었습니다. 시아준수가 직접 "채은석씨, 어디 계신가요?" 하고 외쳐 묻는데, 그 순간 은석의 당황한 표정은 정말 압권이었습니다. 10대 청소년들로 가득찬 관객석에서 30대 중반의 어른이, 그것도 평소 아이돌에겐 관심도 없던 냉정한 의사 채은석이, 환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쭈뼛쭈뼛 일어섰습니다. 설상가상 시아준수는 사연의 내용을 마이크에 대고 읽기 시작합니다.

"제 여자친구는 시아준수씨의 열렬한 팬입니다. 우리는 초등학교 동창이고, 저는 어려서부터 그녀를 짝사랑했는데 차마 말하지 못한 채 헤어졌었죠. 그리고 25년만에 병원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그녀는 지금 아픕니다. 아픈 제 여자친구에게 준수씨와 식사할 수 있는 기회를 꼭 선물해 주고 싶습니다." 채은석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거짓말이었겠죠. 그런데 은석의 표정이 뭔가 기묘합니다. "너 혹시... 뭐 알고...그런..." 머뭇거리며 연재에게 묻는데, 놀랍게도 이 냉혈인간이 어렸을 때 연재를 짝사랑했던 것이 사실이었나 봅니다.

단순히 사연 채택을 위해서 꾸며낸 말이었다고 대답하는 연재는 그의 복잡한 심경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데, 그 날 이후부터 채은석은 오래된 추억과 그녀에 대한 연민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함께 저녁이나 먹자는 연재를 굳이 집으로 초대하여 직접 요리를 만들어 대접하고, 그녀와 함께 탱고까지 배우러 다니고, 심지어 개털 알레르기까지 있으면서 연재가 보살펴 달라며 데려온 커다란 개를 집안에 받아주기까지 합니다. 이 차가운 남자가 언젠가부터 "왜 나한테?" 라는 질문조차 하지 않고 그녀의 부탁들을 선선히 들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연재는 은석의 집에서 어릴 때 자기가 빌려주었던 동화책이며 함께 찍은 사진들을 발견하고는, 아직까지 이런 것들을 간직하고 있었느냐며 놀라기도 합니다. 짐작컨대 똥석이라는 별명으로 놀림받던 소심한 소년 채은석은, 언제나 당당하고 씩씩하던 소녀 이연재를 참 많이 동경하고 좋아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던 연재가 생활고에 짓눌리고 병마에 시달리며 기운을 잃어가는 모습이, 은석의 가슴에도 점차로 아프게 박혀들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남의 속도 모르는 이연재는 엉뚱하게도 강지욱에 대한 사랑 고백을 채은석에게 하고 맙니다. "한 번이라도 그 사람 얼굴을 더 보고 싶었어. 이러면 안되는 줄 알지만 그 사람이 너무 좋아!" 멀찌감치서 강지욱이 그 고백을 엿들었기 때문에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된 남녀 주인공의 관계가 급진전할 계기는 되겠지만, 느닷없이 채은석에게 그런 말을 하는 연재의 태도는 생뚱맞기 이를 데 없더군요. 자기의 도둑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직접 시드니까지 날아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강지욱에게 고맙다는 인사라도 전하고 싶었지만, 임세경(서효림)의 방해로 다가설 수조차 없었던 그 답답함을, 편안한 은석이한테 풀어낸 거였을까요?

지금 이연재에게 가장 편안한 사람은 바로 채은석입니다. 왜냐하면 지인들 중 그 혼자만이 연재의 비밀을 알고 있으니까요. 배려심 깊은 연재는 주변 사람들이 걱정할까봐, 자기가 많이 아프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단짝 친구도, 심지어 유일한 가족인 엄마(김혜옥)도, 연재가 앞으로 살아있을 날이 채 6개월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은 짐작조차 못하고 있어요. 연재는 이렇게 고통스런 현실을 외롭게 홀로 감당하는 중인데, 유일하게 진실을 아는 친구 은석이가 있어 조금은 숨통이 트입니다. 까칠한 척하면서도 은근히 모든 부탁을 다 들어주는 은석의 존재가 얼마나 힘이 되는지를, 연재는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렇게 은석은 연재에게 위로이지만...

반대로 연재는 은석에게 고통입니다. 자기 안에서 싹트는 사랑의 감정을 깨닫는 순간이라면, 상대방의 응답이 없다 해도 일단은 감미롭고 행복해야 마땅하건만, 은석에게는 그런 행복마저 허락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얼마 살지 못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강지욱은 비록 신분과 조건의 차이 때문에 고민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잠시나마 그녀와의 행복한 미래를 꿈꿀 수 있을텐데, 채은석에게는 희망의 가능성이 애초부터 차단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사랑해봐야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그녀의 걸음을 멈추게 할 방법도 없고, 이제 남은 것은 그녀의 고통을 지켜보며 함께 아파해야 할 시간들뿐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린 시절의 인연이 없었다면, 이기적인 채은석은 이처럼 아픈 사랑에 빠져들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추억과 연민에서 시작된 감정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사랑으로 깊어져 버렸습니다. 연재 앞에 남은 것은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그 속에는 진실한 사랑과 우정이 깃들어 있습니다. 아마도 그녀의 버킷 리스트는 죽기 전에 모두 이루어지게 될 겁니다. 그리고 메마른 삶을 살아오던 강지욱도 잠시나마 연재와의 사랑을 통해 진짜 기쁨을 맛볼 수 있겠죠. 그런 의미에서 이 두 사람의 앞날은, 비록 큰 아픔이 예정되어 있지만 꼭 불행하다고만은 볼 수 없습니다.

반면 채은석의 사랑에는 그 어떤 기쁨도 응답도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짧은 행복조차 누리지 못하고 그저 고통뿐인 채은석의 외사랑이 저는 제일 가엾게 느껴지는군요. 아마도 이 슬픈 사랑은 그를 따뜻한 사람으로 만들고, 훨씬 더 좋은 의사가 되게 하겠죠. 그런 채은석을 통해 또 많은 환자들이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겠지요. 이렇게 생각한다면 은석도 행복한 사람일까요? 하지만 사랑하는 연재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면서, 그녀가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는 고백을 들어야만 했던 채은석의 참담한 표정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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