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STORY 2014 우수블로그
TISTORY 2012 우수블로그
TISTORY 2011 우수블로그
TISTORY 2010 우수블로그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관리 메뉴

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계백' 무진을 향한 사택비의 마음, 그 처절한 절규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계백

'계백' 무진을 향한 사택비의 마음, 그 처절한 절규

빛무리~ 2011. 8. 10. 06:20
반응형


사택가문의 사람들이 백제의 권력을 움켜쥐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명석한 두뇌를 지녔고, 권력의 속성에 밝으며, 사람을 보는 눈이 뛰어나고, 무엇보다 더없이 비정한 성품을 지녔습니다. 무왕(최종환) 역시 뛰어난 지략으로 신라와의 수차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영웅이었지만, 손에 넣은 살생부를 어떻게 이용할지 고민하는 무왕의 머릿속은 사택비(오연수)에게 훤히 읽히고 있었습니다. 무왕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미리 예측하여 모든 대비를 해 놓는 상황이니 이래서는 속수무책, 이길 방도가 없습니다.

심지어 사택비는 자부심과 기개 면에서도 무왕을 압도하고 있었습니다. 사택가문의 사람답게 비정하기 짝이 없는 대좌평 사택적덕(김병기)은 살생부를 무왕에게 넘기지 않기 위해 자기 딸 사택비를 희생시키려 했었지요. 사택비는 그런 아비에게 나지막히 경고합니다. "대좌평, 내가 아직도 대좌평의 자식으로만 보입니까? 사사로이는 대좌평의 딸이지만, 나는 이 나라의 황후입니다. 내가 바로 사택가문이고, 내가 바로 백제입니다. 대좌평이 아니라 내가 사택가문의 생사를 쥐고 있고, 폐하가 아니라 내가 백제의 존망을 쥐고 있습니다!" 딸의 서슬 퍼런 기개에 눌린 아비는 꼼짝없이 그 앞에서 무례를 사죄하니, 사택비는 과연 경이로운 여장부입니다.

그런 사택비가 평생토록 짝사랑하는 한 사내가 있습니다. 바로 무왕의 사제이자 호위관이었던 무진(차인표)입니다. 사택비의 차가운 눈빛에 온기가 맴돌고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 흔들리는 순간은, 오직 무진을 대할 때 뿐입니다. 사택비는 인질로 잡힌 상황에서도 꾸준히 무진을 설득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는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으니, 이쯤에서 멈춘다면 내가 당신을 살려 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보상해 주겠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무진이 그녀에게 꼭 하나만 묻겠다면서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그대를 죽이려 하는데, 그대는 왜 그리 나에게 집착하는 겁니까?" 그러자 사택비가 대답했습니다.

"바보 같아서... 바보 같아서 좋습니다. 내 주변의 모두가 나 같은 사람 뿐이니까... 내 아버지도, 내 자식도, 그리고 당신이 그리 믿고 있는 폐하도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세상에 없는 당신 같은 바보가 내 곁에 있어 주길 바라는 것입니다."

이제야 비로소 그 지독한 짝사랑의 이유가 밝혀졌군요. 사택비에게 있어 무진의 존재는, 자기 자신이 그래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해 주는 유일한 숨통 같은 것이었습니다. 왕실이고 사택가문이고, 그 안에는 온통 계산적이고 비정한 사람들만 가득차 있습니다. 권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면 아비가 자식을 죽이라는 명을 내리면서도 눈 한 번 깜박이지 않는 자들입니다. 평생 마음을 나눌 친구라고는 없으며, 가족간에도 배신은 당연한 일이기에 신뢰 따위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겐 욕망이 있을 뿐 즐거움은 없으며, 분노는 있지만 슬픔은 없습니다. 사택금영은 그런 사람들 틈에서 태어났고, 평생을 당연한 듯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런 금영 앞에 처음으로 무진이라는 이상한 사내가 나타났습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정말 이상한 남자였습니다. 쓸데없는 온정이며 의리 따위에 제 목숨을 걸다니, 그래봐야 아무런 보상도 받을 수 없을 것이 뻔한데 뭐 이런 바보가 있나 싶어, 처음에는 그저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차츰 그를 보고 있노라면, 사택금영의 마음속에도 낯선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습니다. 어렴풋하지만 "아, 이런 것이 기쁨이구나! 이런 것이 슬픔이구나!" 하고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뜨거운 차를 단숨에 들이키고도 뜨겁지 않은 척하느라 눈을 부릅뜨는 그 바보 같은 얼굴을 보면 한없이 즐거워 웃음이 터져나왔고, 그가 사납게 날뛰는 말 등에서 떨어져 다쳤을 때는 제 몸이 다친 것보다 더 많이 아팠습니다. 사택금영은 무진이라는 사내로 인해 처음으로 진짜 웃음과 진짜 눈물을 알게 된 것입니다. 사택비는 무진 없이도 황후이며 백제이며 사택가문 그 자체일 수 있지만, 무진 없이는 결코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팔다리를 잘라서라도 무진을 자기 곁에 두겠다는 사택비의 무서운 집착은, 알고 보니 스스로 사람이고자 하는 마지막 절규였습니다.

"당신이 바보였다면, 나도 당신을 좋아했을지 모릅니다." 무진의 대답은 명료했습니다. 사택비는 결코 무진 같은 바보가 될 수 없는 사람이지요. 이 목석같은 사내는 예나 지금이나 술수라고는 조금도 쓸 줄 모르며, 희망고문 따위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곧이곧대로 자기의 속마음을 명확히 드러내 보일 뿐입니다. 변함없는 이 바보의 모습에 사택비는 오늘도 그를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한편 무진과 계백(이현우) 부자가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던 저의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가족을 인질로 잡고 무진을 협박하던 위제단의 칼날에 애꿎은 을녀(김혜선)가 살해당하고 그녀의 아들 문근(이민호)은 원한을 품은 채 멀리 달아나고 말았으나, 무진은 구사일생 목숨을 건져서 계백과 다시 만났습니다. 그래봐야 헤어짐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모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부자의 모습은 애틋하기만 했습니다. 아버지에게서 처음으로 무예를 배우는 계백의 표정이 어쩌면 저리도 티없이 밝을까요?

무왕과 의자(노영학)는 속세를 떠나 자신의 죄를 참회하며 살겠다는 무진을 차마 붙잡지 못합니다. 안타까운 작별의 순간, 의자는 무진을 안으며 꼭 한 번은 다시 찾아와 달라 청하는데, 무진은 서글픈 미소로 말합니다. "왕자님, 저 같은 자가 필요없는 시절이 태평성대인 것입니다. 부디 무고하게 피 흘리는 백성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 주십시오." 난세에 태어나 스스로 원치 않는 살수의 삶을 살아야 했던 무진의 뼈아픈 당부였습니다. 아들 계백만은 자기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음 세대의 주군께 드리는 간절한 청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자는 충신의 마지막 당부를 들어주지 못할 것이고, 계백은 제 아비와 비슷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애초 저의 예상과 달리 사택비의 캐릭터는 나름대로 꽤나 매력적인 악역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너무 강맹일변도여서 사랑스런 면은 찾아볼 수 없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상당히 멋있습니다. '선덕여왕'의 미실(고현정)은 젊은 날 모든 것을 다 바치려 했던 화랑 사다함과의 사랑이 깨어진 뒤 섬뜩한 악녀로 돌변했는데, 사택비 역시 꼭 하나 진심으로 갖고 싶었던 무진을 가질 수 없었기에 냉혹한 심성이 더욱 두드러지며 싸이코패스가 되어 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엄청난 기세와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점에서도 그렇고, 첫사랑을 잃었다는 점에서도 두 여인은 비슷하군요.

하지만 미실은 사다함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으되 사택비는 무진의 사랑을 받지 못했으니, 생각하면 사택비는 미실보다 훨씬 더 불행한 여인입니다. 저는 원래 짝사랑을 막무가내로 상대에게 강요하는 스타일을 매우 싫어하지만..;; 그래도 사람이고 싶어하는 사택금영의 절규가 오늘만은 무척 안스럽게 느껴집니다.

반응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