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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일단 한 드라마를 보기 시작하면, 나중에 실망스런 스토리 전개를 보이거나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어 가더라도 상관없이, 초심을 잃지 않고 꿋꿋한 충성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꽤나 많더군요. 그런데 저는 그게 좀처럼 안 됩니다. 초반에 홀딱 반해서 끝까지 사랑하리라 마음먹었던 드라마도 점점 변질되어가는 것을 보면 쉽게 마음이 식어버리더군요. '드라마 = 인간' 이라고 생각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실망스런 모습을 발견했다 하여 곧바로 차갑게 돌아서는 셈이니 정말 못됐다고 할만 하겠죠. 하지만 드라마는 사람이 아니니까, 좀 그래도 되지 않을까요? 드라마에 대해서도 변함없이 꿋꿋한 사랑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보면, 빛무리가 이제껏 팬의 탈을 쓰고 행세해 왔을 뿐 사실은 '적도의 남자' 안티였다고..
나도 이런 사랑을 원했던 건 아니야. 어려서부터 나는 참 외로웠지. 아무도 엉터리 박수무당의 딸을 사랑해 주지 않았어. 사람들은 아빠와 나를 인간 이하의 존재처럼 취급하며 무시했고, 동네 아이들은 내가 다가가면 귀신이라도 옮겨 붙는 줄 알고 기겁을 하며 도망다녔지. 하지만 꼭 한 명, 김선우만은 나를 피하지 않았어. 항상 남자아이들끼리 어울려 뛰어 노느라고 바빴지만, 그래도 가끔씩은 혼자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그림을 그리는 내 곁에 다가와서 한참이나 그림을 들여다보며 나에게 말을 걸었어. 일부러 선심쓰듯 말을 걸어주는 게 아니라, 내 그림을 정말 관심있게 바라보며 궁금한 것들을 묻곤 했었지. 선우는 한 번도 얼굴에 가면을 쓰지 않는, 진짜 친구였어. 그런데 이장일, 너 때문에 나는 그런 친구를 외면하고..
이장일이 김선우의 뒤통수를 내리치고 벼랑에서 밀어 바다로 떨어뜨리던 그 충격적인 명장면은, 두 명품 아역들이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선물이었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며 정말 소스라치게 놀랐었지요. 임시완의 눈빛이 갑자기 정신나간 것처럼 변해서 몽둥이를 들고 이현우의 뒤를 바짝 쫓아갈 때만 해도 "설마... 설마..." 했는데, 한 번도 모자라 두 번씩이나 선우의 머리를 몽둥이로 있는 힘껏 내리치는 장일의 모습이 너무도 뜻밖이었던 이유는, 첫 회의 프롤로그에 등장했던 선우와 장일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롤로그에서 이장일(이준혁)은 마치 절대악을 응징하려는 정의로운 검사처럼 진노식(김영철) 회장을 찾아가 총구를 겨누었습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면 진노식은 이미 김선우(엄태웅)..
김선우(엄태웅)가 시력을 회복한 후의 모습으로 이장일(이준혁) 앞에 나타나 본격적인 복수의 서막을 알렸으니, 앞으로는 엄태웅의 동공 연기를 더 이상 볼 수 없을 듯합니다. 이장일과 이용배를 불러내서 마치 "내가 돌아왔다!"고 선포라도 하듯이 보여주었던 섬뜩한 그 연기가 마지막이었나봐요. 스토리의 흐름이나 설정으로 봤을 때는 어째서 그와 같은 만남이 필요했는지 썩 납득이 안 가는데, 아마도 시청자들로 하여금 다시 한 번 그 소름돋는 연기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주려 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엄태웅의 맹인 연기는 단지 동공뿐만 아니라 온 몸과 표정에서부터 생생히 전해져 오는, 명품 중의 명품이었습니다. 오래 전, 안재욱의 데뷔작이었던 '눈 먼 새의 노래' 이후 더 이상의 맹인 연기를 볼 수는 없을 ..
좀 더 푹 빠져들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습니다. 워낙 좋아하는 드라마라서 그저 좋은 이야기만 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습니다. 김선우(엄태웅)가 어둠 속을 헤매고 있을 때는 그가 언제쯤에나 시력을 회복해서 속시원한 복수를 시작해 줄까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건만, 정작 그 때가 되었는데도 통쾌함의 카타르시스를 기다리며 설레기보다는 온통 마음속 한가득 물음표 투성이입니다. 세간의 칭찬이 자자했던 9회의 마지막 부분도 제가 보기에는 참 의문스럽고 이상했는데, 10회를 보고 나니 더욱 황당하다는 생각뿐입니다. 13년이라는 기나긴 준비 기간을 거쳐 드디어 돌아왔으니, 이제부터 김선우의 모든 언행은 엄청난 무게를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말 한 마디부터 행동 하나까지 모두 치밀한 계산하에, 아주 의미심장하게 진행되어야..
김봉구(존 메이어, 윤제문)의 검은 손에 의해 국왕 이재강 내외(이성민, 이연경)가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보며, 따라서 급작스레 왕위를 계승하게 된 이재하(이승기)가 물러나겠다는 비서실장 은규태(이순재)를 만류해서 자기 곁에 두는 모습을 보며, 그런 은규태의 약점을 잡은 김봉구가 본격적으로 그를 협박해서 이용하기 시작하는 사태를 지켜보며, 저는 줄곧 한 가지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은규태의 그 어이없는 실수는... 과연 실수였을까? 노련한 은규태가 순간적으로 무엇을 착각하거나 실수할만한 상황이 있었던가를 아무리 되짚어 보아도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이 제 마음을 어둡게 했습니다. 은규태는 대한민국 왕실에 매년 큰 액수의 기부를 하고 있는 영국인 부호 다니엘 크레이그를 접견하여..
어느 덧 7회까지 이르른 현재, 김선우(엄태웅)와 한지원(이보영) 사이에 흐르는 달콤하면서도 치명적인 멜로는 자칫 이 드라마가 복수극이라는 사실까지도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그 어떤 멜로드라마에서도 이보다 더 설레고 짜릿하고 감동적인 사랑은 본 적이 없는 듯하군요. 언제나 저는 감성 위주의 리뷰를 쓴다고 공공연히 말하지만, 솔직히 털어놓는다면 드라마나 영화 속의 사랑에 진짜로 푹 빠져들어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몇 걸음 떨어진 채 관조하듯 보고 나서, 글을 쓸 때는 의도적으로 몰입한다고나 할까요? 극도의 감정 몰입을 요구하는 편지 형식의 리뷰를 쓸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부러 한 캐릭터에 초점을 맞추고 그 감정을 느끼려고 집중하다 보면, 실제로 드라마를 시청할 때보다 훨씬 더 깊게 느껴지곤 했거든요. ..
비장한 복수극에도 사랑은 필요하지요. 무려 6회만에 남녀 주인공인 김선우(엄태웅)과 한지원(이보영)의 사랑이 본격화되었습니다. 오래 전, 진노식(김영철)의 차창을 깨부수는 과정에서 잠깐 마주쳤던 한 번의 인연을 제외하면 이 두 사람은 좀처럼 엮일 기회조차 없었죠. 물론 그 한 번의 마주침이 한지원에게는 매우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지만, 김선우는 그녀의 존재를 기억이나 하고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에 비해 이장일(이준혁)은 지난 몇 년 동안 한지원을 지켜보며 사랑을 키워 왔습니다. 그녀의 미지근한 반응에도 굴하지 않고 꾸준히 관심을 표현하며, 어떻게든 다가서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공을 들였는데 이제껏 침대에 누워만 있다가 갑자기 깨어난 눈 먼 녀석이 그녀의 사랑을 가로채 버렸으니, 이장일의..
복수극의 지존이라는 엄태웅의 칭호는 지극히 당연한 것임이 입증되었습니다. 차가운 복수심에 불타는 남자의 내면을 이보다 더 리얼하게 연기하는 배우가 있을까요? 특히 이번에는 처음으로 맹인 연기에 도전함에 있어 많은 연구와 노력을 했음이 엿보입니다. 눈을 뜨고 있되 앞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의 공허한 눈동자를 얼마나 실감나게 표현했는지, 각종 포털의 인기 검색어에는 '엄태웅 동공연기'라는 단어가 떠올랐군요. 엄태웅은 눈동자뿐만 아니라 표정과 몸짓과 언어 등,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이용하여 갑작스레 눈이 멀어버린 사람의 절망과 공포를 나타냈고, 차츰 기억이 떠오르면서 가슴 속 깊은 곳에 싹트기 시작하는 통렬한 분노와 복수심을 형상화시켰습니다. 엄태웅의 명품 연기와 더불어 '적도의 남자' 5회는 방송 시간..
주인공 김선우와 라이벌 구도를 이루는 역할이니, 이장일이라는 캐릭터가 근본적으로 아주 선한 인물일 수는 없었습니다. 김선우의 선량함이 부각되면 될수록, 상대적으로 이장일은 악역일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요즘의 악역은 예전과 달리 무척이나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나쁜 짓을 하더라도 충분히 납득할만한 이유가 있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려 고뇌하는 모습은 연민을 불러 일으킵니다. 언제나 흔들림 없이 선량한 주인공보다, 오히려 야누스적인 내면과 역동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악역 캐릭터에 많은 시청자는 열광하곤 하지요. 이장일은 분명 그런 캐릭터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드라마 '적도의 남자'에서 동정의 여지가 없는 '악의 축'은 따로 있었습니다. 중견탤런트 김영철이 연기하고 있는 진노식 회장이 그 인물이죠. 그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