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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의 남자' 김선우, 어둠 속에서 그녀에게 편지를 쓰다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적도의 남자

'적도의 남자' 김선우, 어둠 속에서 그녀에게 편지를 쓰다

빛무리~ 2012. 4. 12.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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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덧 7회까지 이르른 현재, 김선우(엄태웅)와 한지원(이보영) 사이에 흐르는 달콤하면서도 치명적인 멜로는 자칫 이 드라마가 복수극이라는 사실까지도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그 어떤 멜로드라마에서도 이보다 더 설레고 짜릿하고 감동적인 사랑은 본 적이 없는 듯하군요. 언제나 저는 감성 위주의 리뷰를 쓴다고 공공연히 말하지만, 솔직히 털어놓는다면 드라마나 영화 속의 사랑에 진짜로 푹 빠져들어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몇 걸음 떨어진 채 관조하듯 보고 나서, 글을 쓸 때는 의도적으로 몰입한다고나 할까요? 극도의 감정 몰입을 요구하는 편지 형식의 리뷰를 쓸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부러 한 캐릭터에 초점을 맞추고 그 감정을 느끼려고 집중하다 보면, 실제로 드라마를 시청할 때보다 훨씬 더 깊게 느껴지곤 했거든요.

 

그런데 '적도남'을 관통하는 김선우와 한지원의 사랑에는 의도적으로 몰입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저 넋놓고 바라보면서 대책없이 빠져들고 있는 중입니다. 그들의 사랑이 드라마를 관통하고 있다고 표현한 이유는, 명목상으로 복수극을 표방한 작품이지만 사실상 주인공 김선우가 최종적으로 지향할 것은 복수가 아니라 사랑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벌써부터 그의 복수에는 비극적 요소만이 가득할 뿐이지요. 진노식(김영철)은 그의 친아버지일 가능성이 높고, 이장일(이준혁)은 비록 용서할 수 없는 배신자이지만 한 때나마 가장 친했던 친구입니다. 그들을 죽이거나 파멸시킨다고 해서, 날아갈 듯 속이 시원하고 행복해질까요? 과연 그게 김선우 인생에 최고이자 최후의 목표가 될만큼 가치있는 일일까요?

또 한 명의 친아버지 후보이며 앞으로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줄 문태주(정호빈) 역시, 김선우에게서 진심어린 사랑과 존경을 받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인물입니다. 말로는 잃어버린 아들을 찾겠다고 하지만, 그 차가운 눈빛과 표정에서는 아버지로서의 애틋한 감정을 전혀 찾아볼 수 없군요. 아마 이 사람도 진노식과 마찬가지도 김선우를 자기 핏줄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이 분명합니다. 어쨌든 둘 중 한 명이 친아버지인 것은 확실하건만, 진노식은 김경필 살해사건의 후폭풍을 막기 위해 김선우를 죽이려 하고 있으며, 문태주는 김선우의 존재를 이용해 진노식에게 복수를 하려는 생각뿐입니다. 이보다 더 비극적인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 있을까 싶을 만큼, 김선우는 너무나 불쌍한 캐릭터예요.

 

유일하게 그를 사랑해 주던 양아버지 김경필은 무참히 살해당해 죽었고, 진심으로 사귀었던 친구 이장일은 그를 죽이려고 뒤통수를 후려쳐 눈이 멀게 만들었습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친아버지는 그를 죽이거나 이용할 생각에 혈안이 되어있을 뿐입니다. 만약 김선우가 처한 현실이 오직 이런 것들뿐이라면, 원수들과 함께 파멸해도 지금보다 더 불행해지지는 않을테니, 남은 인생을 복수에 올인한다 해도 별로 안타깝지 않을 듯하네요. 하지만 이제 선우의 곁에는 그녀가 있습니다. 사랑과 희망과 행복, 이 모든 좋은 것들을 의미하는 여자 한지원이 곁에 있는 한, 김선우의 삶에는 복수보다 훨씬 중요한 우선순위의 무언가가 존재하는 거예요.

하지만 그렇게 진행되지는 않겠지요. 진노식은 최광춘이 이용배에게 보낸 협박 편지의 범인을 김선우라 생각하고 있으니, 다시 어떤 잔혹한 수단으로 선우에게 위해를 가할지 모를 일입니다. 선우 또한 굉장히 집요한 성격을 갖고 있어서 양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밝히려는 예전의 목표를 지금도 잊지 않고 추진중이니, 사건의 모든 전말을 알게 되면 결코 쉽게 용서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제 마음 같아서는 김선우가 문태주를 만나더라도 그에게 너무 휘둘리지 말고, 단지 개안수술을 받아 시력이나 회복한 후, 복수 따위는 모두 잊고 지원이와 둘이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되면 드라마가 너무 싱겁겠죠?;; 하지만... 나중에 다시 만날 것을 알면서도 차마 헤어지는 모습을 볼 수 없을 만큼, 선우와 지원의 사랑은 너무도 아름답고 애틋합니다.

 

그토록 원했지만 자기는 열지 못했던 지원의 마음을 너무 쉽게 열어버린 선우를 바라보는 장일의 시선은 나날이 더욱 차가워집니다. 어쩌면 선우에게는 진회장보다도 이 녀석이 훨씬 더 위험한 인물일지 모르겠네요. 사실상 그의 뒤통수를 때려서 이 지경으로 만든 것도 진노식이 아니라 이장일이니까요. 선우가 지원과의 다정한 통화를 마쳤을 때, 장일은 섬뜩한 어조로 말을 건넵니다. "연애하네, 김선우? ... 그런데 난 솔직히 네가 걱정돼... 그 사람, 순간적인 감정으로 너한테 이러는 거 아닌지..." 그러자 미리 준비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선우가 대답합니다. "상처받겠지. 이미 좋아하고 있으니까... 어차피 상처받을 거라면, 미리 당겨서 받을 필요는 없잖아. 어차피 나중에 아플 건데, 지금은 이대로 있고 싶어."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좋은 사람인데, 맹인 남자친구를 갖게 할 수는 없잖아" 라고 말하던 선우입니다. 하지만 불가항력적인 사랑에 푹 빠져들더니 말이 달라졌군요. 나중엔 어차피 상처받겠지만 지금은 이 행복에 젖어 있고 싶다는 겁니다. 자신의 존재가 그녀에게 불행이 될까 두려워, 조금씩 밀어내려고도 하지만 어림도 없습니다. 사랑은 거대한 파도처럼 그를 덮쳐와, 이제껏 알지 못했던 신비의 깊은 바다로 인도합니다.

 

한지원이 맹인복지관에서 녹음 봉사를 하고 있는 관계로, 우리는 이 드라마를 시청하면서 틈틈이 명작소설이나 시, 노래 등을 덩달아 감상하게 됩니다. 책을 낭독할 때 이보영의 발성과 발음이 너무 좋아서 날마다 감탄하고 있었는데, 7회에서는 두 사람의 생생한 목소리로 노래를 들을 수 있는 보너스까지 주어졌군요. 이보영의 노래 솜씨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평소 굵고 남성적인 엄태웅의 목소리가 노래할 때면 변성기를 지나지 않은 소년처럼 미성으로 바뀐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가창력이 썩 훌륭한 것은 아니지만, 그 나이의 남자가 노래하는데 어쩌면 이렇게도 순수하고 풋풋한 느낌이 들까요? 이 또한 연기의 일환이라고 본다면, 엄태웅의 연기력은 정말 소름끼치는 수준입니다.

엄태웅의 선창으로 이보영의 목소리가 합쳐지며 부른 노래는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라는 가곡입니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가장 애틋한 마음을 담고 있는 2절을 노래했군요. 아래의 접힌 글을 클릭하시면, 이 노래의 아름다운 가사 전문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드디어 복지관 근처에 방을 구한 김선우는 이장일의 집에서 나오게 됩니다. 친구 금줄이의 도움으로 단촐한 이사를 마치고, 선우는 온갖 상념이 교차하는지 바닥에 홀로 주저앉은 채 뜬 눈으로 밤을 새는군요. 마치 정지화면처럼 미동도 없는 엄태웅의 모습에서, 날이 어둑해지고 캄캄해지고 다시 불빛이 밝아올 때까지 시시각각으로 조명이 바뀌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김선우의 마음이 현재 얼마나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상태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었지요. 그런데 갑자기 상큼 발랄한 한지원이 가루비누와 휴지를 잔뜩 사들고 종달새처럼 지저귀며 쳐들어오는 바람에, 김선우의 우울한 상념은 거기서 끝나고 말았습니다.

"여긴 왜 왔어요?" 김선우의 멋대가리 없는 질문에 한지원은 곱게 눈을 흘기며 되묻습니다. "왜 왔겠어요?" 남자는 그녀의 방문이 더없이 반가우면서도 "왜 왔느냐" 묻고, 그런 남자를 충분히 이해하는 여자는 굳이 대답할 필요도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사랑하니까... 그게 아니라면 왜 왔겠어요?" 지원은 여느 때처럼 선우에게 책을 읽어주려 하는데, 갑자기 정전이 되고 마는군요. 그러자 이번에는 '어둠 속에서 책 읽는 남자' 김선우가 대신 그녀에게 책을 읽어주겠다고 나섭니다.

 

선우의 나직한 목소리로 낭독되는 시는 한용운의 '해당화' 입니다. "당신은 해당화 피기 전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봄은 벌써 늦었습니다. 봄이 오기 전에는 어서오기를 바랬더니 봄이 오고 보니 너무 일찍 왔나 두려워 합니다..." 그런데 고작 3행을 읽고 나더니, 느닷없이 전혀 다른 시로 넘어가는군요. 이것은 검색으로도 찾을 수 없는, 아주 특별하고 생소한 시입니다.

"너에게 이 시를 보낸다... 네 옆에 있는 게 행복하고 네 옆에 있는 게 두려운 나는 너를 만나기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깊은 터널에 갇혀 앞이 보이지 않는 시간, 너와 함께 이 터널의 끝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둘만 아는 길, 우리 둘만 아는 시간,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면 말해 줘. 나는 길을 떠날거야. 너는 여기 남아도, 나는 너를 새겨서 가는 길이 외롭지 않을 거야... 그는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듣고 나서 지원이 묻습니다. "찡한데요... 이 책 제목이 뭐예요?" 그러자 선우는 살짝 머뭇거리며 대답합니다. "오래된 책인데... 제목은 점자가 눌려서 짚어지질 않네요.." 이쯤 되면 그녀도 짐작했겠지요. "깊은 터널에 갇혀 앞이 보이지 않는 시간, 너와 함께 이 터널의 끝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은 책에 적힌 내용이 아니라 선우의 말이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김선우가 한지원에게 보내는 편지였습니다. 

제발 선우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처음부터 온갖 비극으로 점철된 인생이지만, 아무쪼록 그 마지막은 비극이 아니기를... 부디 그녀와 함께 이 어두운 터널의 끝을 볼 수 있기를 저도 간절히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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