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육룡이 나르샤 (4)
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어쩌면 태종 이방원(유아인)을 주인공으로 한 '육룡이 나르샤'는 처음부터 내가 몰입하기 힘든 작품이었던 것 같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김영현 작가의 사극이기 때문에 방영 전부터 큰 기대를 걸었지만, 높은 시청률과 대중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나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였다. 작품 전체에 담긴 근본적 메시지는 훌륭했지만, 주인공 이방원의 캐릭터는 지독히 잔인하고 냉정하며 자기중심적인 욕망으로 가득찬 인물이었다. 그러니 심약한 나로서는 이방원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스토리에 호흡을 맞추며 몰입하기가 버거웠다. 드라마에 푹 빠져있던 혹자들은 이방원의 캐릭터를 두고 '겉으로만 잔인할 뿐 속마음은 여리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내가 보기에 이방원이 흘린 모든 눈물은 악어의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 '대장금'의 장금(..
‘육룡이 나르샤’ 36회에서 드디어 선죽교가 정몽주(김의성)의 피로 물들었다. 어떻게 될 줄을 모두가 알면서도 손꼽아 기다려 온 ‘피의 선죽교’ 그 명장면이 드디어 방송된 것이다. 이방원(유아인)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를 구태의연한 시조 형식이 아닌, 새로운 해석을 곁들여 대사 형식으로 표현한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김의성과 유아인의 명연기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하지만 그 명장면을 감상하면서도 나의 가슴이 울리지는 않았다. 등장인물들의 감정에 몰입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로 표현되는 ‘하여가’에 김영현 작가는 ‘백성’의 존재를 대입시켰다. 이방원의 원래 시조가 “우리끼리만 부귀영화를 누리며 잘 살면 되지, 나라가 바뀌든 말든 무슨 상관이오? 우리 ..
땅새야... 이제 너는 삼한제일검이 되었고 이성계 장군으로부터 이방지라는 새 이름까지 받았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언제나 이웃집 땅새였어. 한 번도 너에게 말한 적은 없었지만, 벌써 오래 전에 괴물이 되어버린 내가 한 줄기 사람의 체온이나마 간직할 수 있도록 긴 세월 동안 붙잡아 준 것은 너를 생각하는 마음뿐이었지. 화사단에 들어가 흑첩이 되고 자일색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내가 어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들만 하며 살았겠니? 더 이상 추악해질 몸도 마음도 남아있지 않은 나는 오갈 데 없는 괴물이지만, 그래도 너를 생각할 때만은 다시 뜨거운 눈물이 흐르며 사람다운 마음을 느낄 수 있었어. 나는 수천 수만 번을 생각했었지. 헤어지던 날... "꼴도 보기 싫다"며 발악하듯 외치는 내 앞에서 고개를 들지..
'대장금'과 '서동요' 이후 김영현 작가의 사극에 매료된 나는 '선덕여왕'과 '뿌리깊은 나무'를 시청하며 그녀의 필력을 극도로 존경하기에 이르렀다.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부분이 적지 않았으나,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엄연한 창작물이기에 그 정도는 충분히 용인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겠지만 요즘 시대에 영화나 드라마의 내용을 철석같이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고, 작품을 감상하다가 실제 역사에 대한 궁금증이 생긴다면 다른 경로를 통해서 공부하면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외국에 수출될 경우는 좀 더 오해의 소지가 많겠으나, 방영 전에 자막으로 '이 작품은 허구와 상상력이 가미된 창작물로서 역사적 사실과는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면 큰 문제는 되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