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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요즈음 나는 공포스럽도록 지독한 '드한기'에 허덕이고 있는 중이다. '드한기'가 무엇의 줄임말인지는 모르겠는데, 그 뜻은 '도통 볼만한 드라마가 없어서 지루한 시기' 정도로 해석하면 될 듯하다. 평소 드라마 시청을 즐길 뿐 아니라 리뷰를 쓰는 활동을 통해서도 일상의 활력을 충전하는 나로서는 상당히 힘든 시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여전히 각종 드라마는 여러 방송국에서 차고 넘치게 방송되고 있으며 새로운 작품들도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어째서 당최 볼만한 것이 이토록 없는 것일까? '너의 목소리가 들려'와 '황금의 제국'이 방송되던 6월부터 9월까지는 정말 행복했었다. 그 두 작품 외에도 썩 괜찮다 싶은 드라마가 초가을 까지는 제법 있었는데, 본격적으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후부터는 거의 전멸 수준이..
'계백'을 2회까지 시청한 후 깨닫게 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철저히 주인공 '계백'을 살리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악역 '미실'이 주인공을 제치고 드라마의 상징이 되어 버렸던 '선덕여왕'과 결정적으로 차별화되는 부분입니다. 사실 김근홍 PD는 전작 '선덕여왕'에서 한국 드라마 사상 가장 매력적인 여성 악역을 탄생시키는 영광을 맛보았지만, 한편으로는 주인공의 존재감이 악역에게 밀리는 바람에 적잖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을 것입니다. 드라마의 기본 원칙은 주인공을 중심으로 해서 모든 상황이 돌아가야 하는 것인데, 주인공보다 악역이 부각되면 스토리를 끌고 나가기도 힘들어질 뿐 아니라 작품의 완성도에도 좋은 영향을 끼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김근홍 PD는 이번 작품에서 전작의 실..
최근 인기를 끄는 드라마에서는 몇 가지의 공통점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지난번의 포스팅에서 언급했듯이, 밝고 유쾌한 터치의 드라마보다는 인간의 근본적 슬픔을 다룬 드라마가 많은 공감을 얻고 있지요. (슬픈 드라마가 연이어 대박을 치는 이유) 그리고 저는 '신데렐라 언니' 7회에서 또 한 명의 성자를 발견했습니다. 물론 이전부터 성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었거든요. '신언니'의 성자는 마지막에 이야기하도록 하고, 그 이전에 많은 사랑을 받은 성자들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1. '선덕여왕'의 덕만 (이요원) 역사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임금이지만, 드라마에서 그려진 모습은 더욱 그러했습니다. 이름 그대로, 타인들을 위해 선덕(善德)을 베풀다가 자기의 삶은 모두 ..
요즘 드라마에서 악역의 위치는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원래 악역이란 시청자들에게 미움받는 존재였으나 이제는 별로 그렇지도 않지요. 오히려 강렬한 매력과 포스를 물씬 풍기며 주인공을 능가하는 인기를 얻는 악역이 많습니다. '선덕여왕'의 미실(고현정)도 원래는 주인공 덕만(이요원)과 대칭점에 놓이는 명백한 악역이었으나 그 엄청난 존재감은 주연을 뛰어넘어 사실상 '선덕여왕'을 미실의 드라마로 만들어 버렸었지요. 저의 개인적 견해로 '추노'는 명품 사극이긴 하지만 '선덕여왕'에 비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역동적인 화면 구성이나 액션 등을 생각해 본다면 물론 '추노' 쪽이 앞선 부분도 존재하지만, 제가 가장 중점을 두고 시청하는 인물 심리면에서는 뚜렷하게 어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큰 주모(조미..
저는 원래 '특집을 가장한 하이라이트 방송'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관계로 그냥 틀어만 놓고 다른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방송을 꾸준히 못 보고 띄엄띄엄 보신 분들로서는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는 하이라이트 방송도 환영하실 법 하지만, 저는 일단 정해놓고 보는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충성을 하는 편이므로, 하이라이트는 거의 보나마나거든요. 역시 예상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중간중간에 제작진의 인터뷰가 생각보다 좀 길게 들어갔고, 그들이 원래 만들려고 했던 드라마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참고삼아 알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일종의 수확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크게 구애받지 않았습니다. 원래 모든 예술이란, 예술가의 손을 떠나게 되는 순간 이미 그들의 것이 아니거든요. 드라마 '선덕여왕' 역시, 원..
나... 그대에게 전하지 못한 말이 있었기에, 꼭 전하려 하였습니다. 이미 살고 죽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산들 어떻고, 죽은들 어떻겠습니까? 다만 삶과 죽음의 강이 그대와 내 사이에 가로놓여, 차마 나의 말을 전하지 못하게 할까봐 그것이 두려울 뿐이었습니다. 덕만(德曼), 그대가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그대는 알아 주셨는데 오히려 내가 몰랐습니다. 내가 그대에게서 등을 돌리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그대는 믿어 주셨는데, 오히려 내가 그대를 믿지 못하였습니다. 미안하다는 한 마디 말로야 어찌 이 아픔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누구보다도, 나 자신보다도 나를 알아주셨던 그대이기에, 이 못난 사내의 어리석음조차 이해해 주시리라 믿으며 이렇게 달려갈 뿐입니다. 그대는 아무것도 모르던 나의 손을..
드라마 '선덕여왕'이 드디어 62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예상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은 허전함이 밀려드네요. 지난 7월, 처음 블로그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 '선덕여왕'은 항상 단짝 친구처럼 제 곁에 있었습니다. 이제껏 다른 드라마를 시청할 때에는 이토록 깊이, 적극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마다에게 몰입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 '선덕여왕'은 그토록 특별한 드라마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점점 더 애정이 쌓여 갔고, 주인공만이 아니라 다른 인물들조차도 모두 친밀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중 한 캐릭터는 이제껏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던 인물이었는데, 최종회에서야 비로소 제 눈에 들어오더군요. 언제나 소중함은 떠난 이후에야 깨닫게 되는 걸까요? 이렇게 말해놓고 나니 왠지 또 슬퍼지려고 합니다..
어머니, 제 기억 속에 남아있는 모습처럼 지금도 고우시겠지요? 세월의 강을 건너 이제는 장성하였건만, 아직도 저는 어머니의 꿈을 꿉니다. 어리석은 제 마음을 아신다면 어머니, 무어라 탓하실지 모르겠군요. 어머니가 안 계신 이 땅에 허위허위 돌아와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한시라도 마음을 놓는다면 어머니의 죽음을 헛되게 할 것을 알았기에, 저는 잠자리에 들면서도 칼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미실은 소름끼치게 강했습니다. 그녀가 제 귀에 속삭일 때, 저는 죽음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네 부모를 내가 죽였노라고, 웃으며 말하는 그녀 앞에, 저는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그녀 앞에서 저는 무력한 어린아이였을 뿐입니다. 어머니의 아들은 원수 앞에서 그렇게 초라했습니다. 미실은 이미 오래 ..
월요일 방송된 '선덕여왕' 57회에서 비담과 선덕여왕의 멜로가 예상치 못한 급진전을 보이면서 수많은 시청자들을 당혹스럽게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다지 당혹스럽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제가 어제 올렸던 '비담에게 보내는 선덕여왕의 편지' 에서 이미 저의 견해를 간접적으로 언급했듯이, 비담을 향한 여왕의 마음은 결코 진실한 사랑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제껏 덕만은 한 번도 비담에게 이성적으로 끌리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습니다. 노오란 들꽃을 건네며 수줍게 웃는 비담에게 화답하듯 미소를 보이며 "너는 나를 여자로 대해 주는구나" 하고 기뻐하기도 했고, 미실의 죽음 후 방황하는 비담의 뒤를 쫓아가 어미 잃은 새를 감싸듯이 그를 포근히 안아주기도 했지만,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자연스러운 감..
'선덕여왕' 55회에서도 김유신은 변함없이 우직한 충성심을 보여주었습니다. 자기 일신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이 오직 신국의 안위만을 염려하는 김유신의 모습은 그야말로 애국선열의 풍모를 보여주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그 충성심에 공감하거나 몰입할 수 없더군요. 엄태웅은 나무랄 데 없이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건만, 예쁜 유모차 안에 귀여운 아기 대신 통조림 깡통이 잔뜩 들어차 있는 것처럼 그 충성심이 생뚱맞아 보이니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무릇 애국심이라 함은 철저한 체험과 교육에 의하여 고취되는 것입니다. 한 번이라도 나라를 잃어 보았던 백성들은, 나라 잃은 핍박과 설움이 어떤 것인지를 알기에 그 설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애국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 체험이 없는 어린아이들에게는 꾸준한 교육을 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