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낭도 (4)
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유신랑(庾信郞), 당신은 내 어릴 적 꿈을 알고 있나요? 나는 카탄 아저씨를 따라서 로마에 가고 싶었습니다. 자유롭게 넓은 세상을 떠돌며 많은 것을 보고 싶었지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배우면서 여러가지 일들을 해보고 싶었어요. 물론 나를 구하려고 연기를 들이마셔서 얻게 된 우리 엄마 기침병도 고쳐주고 말이예요. 나는 그렇게 자유로운 삶을 꿈꾸었습니다. 그렇게 떠돌다가 저 멀리 서역 어디에선가 당신을 만났다면, 우리는 아무 거리낌없이 사랑할 수 있었겠지요? 어린 시절의 나는 두려움도 눈물도 모르던 아이였습니다.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그 모두가 내게는 즐거운 호기심의 대상이었을 뿐이예요. 나의 앞날은 희망과 행복으로 가득차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지요. 나는 그렇게 철모르고 용감한..
운상인(雲上人), 구름 위의 사람이라고 남들은 당신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젊은 시절, 낭도들과 더불어 향가를 짓고 옥피리를 불며 청유를 즐기던 당신의 모습과 참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지요. 당신의 타고난 성정에는 평생 그런 삶이 어울렸을텐데, 이렇게 나를 만나서 다른 길을 걷게 되었군요. 사다함을 잃은 후, 나에게 남자란 모두 그렇고 그런 존재였습니다. 허전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나는 끝없는 욕망을 불태웠고, 나의 미모와 색공에 반해 기꺼이 내 앞에 무릎을 꿇는 남자들이란 나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도구들이었을 뿐입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고,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설원랑, 당신만은 예외였지요. 갈수록 차갑게 황폐해져가는 내 마음을 보면서도, 당신은 나를 믿어 주었습니다. 내가 지금..
어이 친구, 지금 나를 보고 있나? 내 이름은 비담이라고 해. 마냥 자유로운 영혼이지. 이제껏 살아오면서 크게 바라는 것도 없었어. 그저 산으로 들로 마음껏 노닐면서 한 세상 즐기고 싶었을 뿐이야. 어머니도 나를 버렸고 세상도 나를 버렸지만 그래도 내 눈에는 이 세상이 꽤나 예쁘게 보였거든. 나는 원래 가진 것이 없었어. 허름한 누더기를 걸치고 스승님을 따라다니며 언제나 하루의 먹을 것과 하루의 잠자리만 있으면 그뿐이었어. 나는 그런 삶이 당연한 것인 줄만 알았고, 남들도 모두 그렇게 사는 줄만 알았지. 이미 양 손 가득히 뭔가를 잔뜩 움켜쥐고서도 부족하여 더 가지려고 헉헉대는 인간이 세상에 이렇게 많은 줄을 내 어찌 알았겠어? 부모가 갓난아이인 나를 버렸다는 거야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뭐 괜찮아. 그럴..
더 늦기 전에 이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나 설원(薛原)이 그대 미실(美室)에게 편지를 씁니다. 물론 그대는 알고 계시겠지요. 하지만 이제 점점 약해져가는 그대를 보니 내 마음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내로 태어나 그대와 같은 여인을 만날 수 있었으니 나는 이 생에 아무런 여한이 없습니다. 예전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입니다. 그대의 곁에서라면 나는 한 번도 죽음을 두려워한 적이 없습니다. 처음 만나던 순간부터 그대는 나의 삶이었고, 꿈이었고, 모든 것이었습니다. 내가 좀 더 잘난 사내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내가 그 허울좋은 성골로 태어났거나, 보다 출중한 능력을 타고났더라면, 그래서 당신의 첫번째 꿈을 이루어 줄 수만 있었더라면... 당신은 그 황후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