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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리는 외박중' 정인의 독백 - 그녀가 문을 두드린다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매리는 외박중

'매리는 외박중' 정인의 독백 - 그녀가 문을 두드린다

빛무리~ 2010. 11. 3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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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나에게 신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자애롭고도 가혹한 그 신에게 철저히 길들여졌다. 세상 어느 곳으로 달려가도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보다 키가 커진 지금도 나는 여전히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나의 뜻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이, 거대한 신의 손에 조종당할 뿐이다. 끝없이 지속될 것 같던 반항을 포기하는 순간부터 내 삶은 평온해졌다. 기쁨도 슬픔도 없었지만 그런대로 괜찮았다.


내가 결혼을 누구와 하든, 나의 아내라기보다는 아버지의 며느리일테니 그것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버지의 선택이 좀 뜻밖이긴 했지만, 유리집에 갇혀 인형처럼 살아 온 나 같은 여자보다는 나아 보였다. 주변에서 그렇게 꼭 닮은 커플들을 적잖이 보는데, 인형 두 개가 나란히 부부랍시고 걸어다니는 모습은 꽤나 우스웠다. 그런데 위매리는 살아있는 사람 같아서, 그녀를 보면 마치 숲 속에 들어온 것처럼 약간은 숨통이 트이곤 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그녀는 이미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식까지 올렸다 하니, 아무리 아버지라도 그녀를 고집하지는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버지의 집착은 상상을 초월했다. 며느릿감이 나와 다른 남자의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100일간을 지내보고 결정하게 하다니, 아버지의 강한 자존심으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는데 그 치욕을 감당하면서까지 아버지는 그녀를 데려오려고 한 것이다. 대체 무엇 때문일까? 의문이 잠시 머리를 스쳤으나 곧 사라졌다. 나는 아버지의 선택에 언제나 복종만 했을 뿐 그 이유를 알려고 한 적은 별로 없었으니까. 그런데 어린 시절, 소년이었던 내가 소녀였던 매리를 업고 있는 그 사진을 보는 순간, 다시 조금은 궁금해졌다. 그녀는 나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누군가는 어리석다고 하겠지만, 나는 운명을 믿는다. 내가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난 것 자체가 절대적인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의 삶이 운명에 좌우된다는 증거로 이보다 더 확실한 것이 있을까? 아버지가 나의 짝으로 선택한 매리도 나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인지 모른다. 100일 계약이 끝나는 날, 그녀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아버지의 모든 재산이 내 손에 쥐어지지 않고 허공 중에 분해될 거라는 사실은 그녀가 나의 운명임을 확신하게 한다. 그러니까 20년 전의 사진 속에도 그녀와 내가 함께 있었던 거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녀가 강무결의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을 봐도 그 남자에 대한 승부욕만 타오를 뿐 아픔이나 분노는 느껴지지 않았는데, 눈앞에서 두 사람이 키스를 하는 순간 내 가슴이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반항을 멈추고 아버지라는 거대한 신에게 항복한 날 이후로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표정 없는 얼굴로 지내 온지가 너무 오래 되어서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내심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런 것을 질투라고 부르는가? 남들이 느끼면서 산다는 '감정'의 일종을 나도 다시 경험하게 될 줄은 몰랐었다.


무결과의 사이를 의심하지 말고 자기를 포기하라는 매리에게 나는 그럴 수 없다고, 오히려 자극받았노라고 말했다. 놀랍게도 그것은 진심이었다. 아버지 때문에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녀를 놓기 싫어진 것이다. 그녀 때문에 되찾은 '감정'의 물결은 무척이나 신선했다. 십여년 동안 인형처럼 죽은 삶을 살아 온 내가 이제야 살아있는 사람임을 깨닫기 시작했는데, 그녀가 떠나면 이 느낌도 떠날까봐 두려웠다. 편성이 확정되지 않았는데 드라마를 사전제작한다는 것은 적잖은 부담으로 다가왔지만, 그녀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그녀가 서슴없이 다가와 나의 풀어진 넥타이를 바로잡아 주는 순간, 내 가슴의 울림은 다시 시작되었다. 이전보다 더 강하게 쿵쾅거리는 울림은 나를 주체할 수 없게 했다. 미칠 것 같은 그 감정의 정체는 기쁨이었다. 내 삶에서 기쁨이 사라진 것은 아픔이나 분노나 질투보다 훨씬 더 오래 전이었는데,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더 이상 엄마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그 때부터였던 듯 싶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가 다시 기쁨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녀의 따뜻한 손길은 마치 엄마 같았다. 이제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내 엄마가, 매리 안에 숨어서 다가온 것 같았다. 잃어버린 기쁨을 나에게 돌려주려고.


아직도 나는 인형처럼 굳은 얼굴로 살아간다. 기뻐도 웃지 않고 분노가 일어도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다시 뛰기 시작한 가슴은 조금씩 내 얼굴에 표정을 돌려줄 것이다. 요즈음 나는 아침이면 숨을 깊게 들이쉬며 살아있음을 느낀다. 정말 묘한 기분이다. 위매리, 그녀가 내 가슴의 문을 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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