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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킥'에 숨겨진 또 하나의 어둠, 선민의식(選民意識)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지붕뚫고 하이킥

'하이킥'에 숨겨진 또 하나의 어둠, 선민의식(選民意識)

빛무리~ 2010. 3. 19.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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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뚫고 하이킥'이 마지막회 방송만을 남겨두고 있는 시점에서, 주요 등장인물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각자 어느 정도씩 성장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특히 세경과 신애 자매의 영향으로 이순재옹을 비롯한 그 가족들의 변화가 두드려졌지요.  


그러나 '지붕킥'이라는 시트콤의 가공할 위력에도 불구하고, 스쳐지나가는 단역들까지 성장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듯 합니다. 아주 잠깐씩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역겨움을 참기 힘들었던, 지훈(최다니엘)의 후배 의사인 바로 저 인물입니다. 저 사람 외에 또 한 명의 동료 의사가 있었는데, 워낙 단역이다 보니 그들의 이름이나 행동을 구분할 수는 없지만, 하는 행동의 수준은 거의 비슷했습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 한 명은 민선생, 한 명은 안선생이라고 불렀던 것 같으니 대충 그렇게 지칭하겠습니다.

사골 배달이나 속옷 배달을 위해 자주 지훈을 찾아오던 세경을 보고, 그 미모에 반하여 '청순글래머'라는 별명을 붙인 것도 그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녀가 지훈의 여자친구인 줄 알았으나, 곧 지훈이 정음과 사귄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세경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하며 적극적으로 다가서기 시작했지요.

세경의 불우한 환경을 알고 있는 지훈은 어차피 그들의 얄팍한 집적거림이 세경에게 상처만 될 것을 알기에 계속 만류했지만, 소개해주지 않으면 직접 대쉬하겠다며 집요하게 구는 민선생(저 사진의 인물을 일단 민선생으로 칭하도록 하지요)의 태도를 보다 못해 세경이 자기 집의 가정부라는 사실을 말해 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그 사건이 있은 후에 민선생과 안선생(지훈의 동기로 보이는, 민선생보다 약간 더 나이든 의사)의 태도는 전혀 제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더 이상 세경에게 대쉬하지는 않겠지만, 그 외에는 지금까지와 다름 없는 태도로 세경을 대할 거라고 저는 생각했었는데, 그들은 가정부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세경을 완전히 다른 태도로 대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지훈이 자리에 없을 때에 세경이 찾아와 사골국물과 메모를 남겨두고 나가려 할 때면, 안선생은 매우 여러 번 이렇게 묻곤 했습니다. "지훈이 속옷 책상 밑에 놔두었던데, 꺼내 줄까요?" ... 처음 저 대사를 들었을 때 저는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소름이 끼쳤습니다. 지훈이 그들에게 세경의 정체를 밝힌 것은, 그렇게 그녀 앞에서 대놓고 아는체하라는 뜻이 아니었음을 정말 몰랐을까요? 그냥 예전처럼 모른 척하고 지나가면 될 것을, 대체 왜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일까요?

그녀의 상황을 감당하지 못할 작은 그릇들임을 알기에, 미리 말해줌으로써 무모한 관심을 차단시키려고 했던 것뿐이지, 그런 쓸데없는 오지랖을 발휘하라고 한 것은 절대 지훈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상대방의 자존심은 아랑곳도 없이 "우리는 네가 가정부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고 말하는 것처럼, 하지 않아도 될 그런 말을 건넨 걸까요? 설마하니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녀의 할 일을 놓치지 않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정말 그런 걸까요?


한창 나이의 아가씨가, 남들은 대학에 다니면서 명품 휘두르고 고급 커피숍에서 데이트하며 사는데, 남의 집에서 가정부로 생활하고 있는 처지가 얼마나 아픈 것일지, 조금만 생각해 보면 모른다는 말입니까? 그토록 아픈 현실을 적나라하게 꼬집어내는 것은, 차라리 누명을 씌우는 것보다 더하면 더한 잔인함입니다.

게다가 며칠 전에는 결정적 사건이 터졌죠. 민선생이 세경을 향해 "도우미 아가씨라면서요? 그럼 제 방 청소 좀 부탁해도 될까요?" 라고 말을 건넸던 것입니다.

가정부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안선생과 민선생은 세경을 동등한 인격체로 생각하기보다는 몇 계급 아래에 존재하는 어떠한 생명체로 취급하기 시작한 것 같았습니다. 타인의 마음이나 입장에 대해서는 조그만 배려심도 없이, 때로는 입에서 나오는대로 말하고, 때로는 아닌 척 조롱하면서 그녀보다 몇 계단 위에 서 있는 자들의 우월감을 느낀 것이겠지요. 설마 의도적으로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 깊게 뿌리박힌 선민의식(選民意識)을 저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제가 어릴 적에 방송되던 일요 아침드라마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농촌을 배경으로 한 푸근한 드라마였고, 등장인물들도 모두 착하고 정상적인 인물로 표현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에피소드에서, 한 도시 아가씨가 친척을 방문하기 위해 그 동네에 들어서면서 웃지 못할 에피소드들이 발생합니다.

마침 동네 다방에서 근무하던 아가씨 한 명이 그만두고 새로운 아가씨가 온다는 소문이 막 동네 전체로 퍼진 상황이었습니다. 특별히 옷을 야하게 입은 것도 아닌데, 농촌에서 밭일하기 좋은 펑퍼짐한 옷만 입고 다니는 동네 아주머니들에 비하면 확실히 좀 눈에 띄는 차림새를 하고, 문제의 도시 아가씨가 동네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거리에서 그녀와 마주치는 남자들마다 실실 눈웃음과 코웃음을 치며 경박한 농담을 건네고, 심지어는 손을 뻗어 몸을 건드리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너무 놀란 것은 그 남자들의 캐릭터가 원래 굉장히 착하고 평범한 아저씨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아침드라마는 이미 몇년간이나 방송되었던 장수 드라마였기에, 어린 저는 그 캐릭터들을 마치 이웃집 아저씨들처럼 느끼고 있었는데, 그런 모습을 보니 굉장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옆에 계시던 어머니께 물어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다방 아가씨인 줄 알고 저러나 본데... 다방 아가씨한테는 평범한 남자들도 원래 저렇게 대하는 거예요?" 그러자 어머니는 한숨을 쉬면서 "좀 그런 경우들이 있지" 하고 대답하셨던 것 같습니다.


세경은 병원 청소부가 아니라 지훈의 집안 가정부였을 뿐입니다. 지훈의 동료 의사들이 그녀의 할 일에 대해 참견할 이유는 없는 거였지요. 그리고 다방 아가씨도 엄연히 근무 중일 때에나 자기 일에 충실하면 되는 것일 뿐, 거리를 걸어다닐 때 동네 남자들에게 희롱을 당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선민의식을 갖고 보면 그들의 직업이 워낙 하찮아 보여서, 함부로 대해도 될 것 같은지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선민의식을 가진 자들의 문제는, 자기가 정말로 뭘 잘못했는지를 진심으로 느끼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 아침드라마의 남자들은 정작 그 아가씨가 동네 주민의 친척이었을 뿐 새로 온 다방 아가씨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모두 쩔쩔 매며 사과했지만, 아마 진짜 다방 아가씨가 도착하면 그녀에게 했던 행동을 똑같이 하겠지요. 그들이 생각하는 잘못이란 다방 아가씨가 아닌 사람을 그렇게 취급했기 때문일 뿐이니까요.


그리고 민선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훈이 먼저 "그때 너한테 화내서 미안하다" 고 말하자 입으로는 "제가 잘못한 건데요 뭐" 라고 대답하지만 전혀, 진심으로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가정부도 자기와 동등한 인격체이기 때문에, 그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면 안된다는 것을, 물론 머리로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한 말이 충분히 그녀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몰랐다면 지훈에게 저런 말조차 하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민선생에게 있어 그 사실은 그냥 이론일 뿐입니다. 여전히 그가 진심으로 느끼는 것은, 가정부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살아가는 자기의 자랑스런 현실이지요.

의외로 참 많이,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우리는 저러한 선민의식과 마주칩니다. 그리고 어쩌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우리 모두가 조금씩은 갖고 있을지 모릅니다. 자기가 처한 상황이 안좋으면 안좋은 대로, 자기보다 더욱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생각하며 "나야 그보다는 낫지" 하고 자기를 위로할 테니까요. 그런 경향을 약간만 가지고 있다면 정상이라 하겠으나, 조금 지나치게 되면 자칫 남을 무시하는 선민의식으로 발전할 우려가 있습니다.


뉘우치는 기색 없이 지훈의 뒤에서 몰래 주먹질을 하는 저 후배 의사 민선생의 모습은 '지붕뚫고 하이킥'이 우리에게 보여준 어두운 사회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했으나, 간과하기 쉬운 선민의식의 함정을 우리가 깨닫고 경계할 수만 있다면 어느 정도의 긍정적 효과는 거둘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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