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내 뒤에 테리우스' 소지섭 정인선의 연기가 아까운 대본의 한계 본문
최근 나영석 PD의 예능 '숲 속의 작은 집'에서 색다른 매력을 보여주었던 소지섭과 '으라차차 와이키키'에서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었던 여배우 정인선이 출연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던 드라마 '내 뒤에 테리우스'가 9월 27일 첫방송 되었다. 원래 수목드라마로 편성되었지만 추석 연휴 기간이라 수요일에는 특집 방송이 전파를 탔던 관계로, 목요일에 잇달아 4회를 방송하며 야심찬 출발을 알렸던 것이다.
과연 소지섭과 정인선은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연륜이 채워질수록 그 깊이를 더해가는 소지섭의 눈빛과, 아역 출신으로 만만찮은 경력을 지닌 정인선의 풍부한 표정 연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긴장과 슬픔과 웃음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첫방송에서부터 너무 뚜렷하게 드러난 대본의 한계는 앞으로 이 드라마를 계속 시청해야 할지 고민하게 만들었다. 첩보물이라는 특성상 이 드라마의 대본은 무엇보다 개연성 있고 촘촘하게 짜여져야 했음에도 전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본(소지섭)은 과거 NIS 블랙요원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의 코드명은 테리우스. 그리고 그의 연인이자 정보원이었던 북한 핵물리학 박사 최연경(남규리)의 코드명은 캔디였다. 하지만 NIS 내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추측되는 첩자의 활약에 의해 최연경의 망명이 실패하면서 그녀는 목숨까지 잃고 만다. 그녀의 죽음만으로도 충격과 슬픔을 견디기 어려운데 설상가상 내부 첩자라는 누명까지 쓰게 된 김본은 NIS 위에 군림하는 거대한 세력이 있음을 확신하고, 신분을 감춘 채 숨어살며 그들의 정체를 쫓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설정만 봤을 때는 상당히 긴박감 넘치는 내용일 것 같은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이것은 첩보물로 가장한 코믹드라마다. 여주인공 고애린(정인선)의 캐릭터가 여섯 살배기 쌍둥이를 키우는 젊은 싱글맘이다 보니 시끌벅적한 가족드라마 느낌이 약간 풍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그 아이들을 이용한 에피소드에 너무 치우치다 보니 마땅히 심각해야 할 부분에서조차 긴장감이 전혀 느껴지질 않는다. 게다가 무시무시한 킬러로 등장하는 케이(조태관)의 캐릭터는 또 왜 그렇게 멍청하단 말인가?
케이의 인물 설정은 코너스톤 소속 킬러로서 원샷 원킬 저격수, 독극물 주사로 교묘하게 살인을 은폐하는 기술자, 표정 없는 사이코패스, 등장만으로도 어둠의 기운을 발산하는 자... 라고 하는데 정작 하는 짓은 허당도 그런 허당이 없다. 국가안보실장 문성수(김명수)를 살해하는 과정에서부터 케이의 일처리는 엉망이었다. 차 안에 숨었다가 문성수를 기습하여 단박에 제압했음에도 즉시 독극물 주사를 찔러넣지 못한 채 상대의 목만 조르며 식식거리다가, 우연히 바로 옆자리에 주차하던 차정일(양동근)과 눈이 딱 마주쳤을 때부터 그의 임무에는 망조가 든 셈이었다.
목격자 차정일을 쫓아가 독극물 주사로 심장 발작을 일으켜 살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또 수많은 일들이 벌어지게 된다. 악의 세력의 하수인으로서 케이에게 명령을 내려 온 J인터내셔널 대표 진용태(손호준)는 무슨 생각에선지 죽은 차정일의 아내였던 고애린을 자신의 비서로 채용하고 (진용태의 인물 소개에는 '연민으로 시작한 단 한 번의 선심' 이라고 되어있지만, 진용태의 야비한 캐릭터상 그런 설정은 참 어이가 없다는..;;) 무슨 이유에선지 어린 쌍둥이를 납치하려던 케이는 하필 김본에게 들켜서 추적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무엇보다 황당한 것은 케이가 쌍둥이 남매 준수와 준희를 납치한 행위에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사실이다. 차정일은 이미 죽었고, 그가 목격한 살인사건은 아무에게도 발설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쌍둥이를 납치해서 누군가를 협박할 이유도 없었는데, 괜히 쓸데없는 뻘짓을 벌였다가 온갖 분란만 일으킨 셈이었다. 더 웃기는 것은 킬러로서 최고의 실력자라는 케이가 아이들을 데리고 여기 저기를 기웃거리다가 동네 아줌마들한테 들켜서 낭패한 몰골로 혼자 도망치는 장면이었다. 물론 첩보물에도 코믹이 첨가될 수는 있지만, 이 정도로 망가져서는 몰입을 기대하기 어렵다.
남녀 주인공의 본격적인 접점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궁여지책으로 짜낸 에피소드인가 본데, 아무리 그래도 최소한의 개연성은 확보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쌍둥이를 납치하던 케이의 모습이 동네 아줌마들의 폰카에 찍혔고, 3년 동안이나 케이의 발자취를 쫓고 있던 김본은 그 사진을 통해 옆집 사람들과 킬러 케이 사이에 무언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결국 김본은 그 비밀을 캐기 위해 쌍둥이의 베이비시터를 자원하여 옆집에 침투(?)하며, 쌍둥이 엄마인 고애린과 수시로 얽히게 되는 것이다.
아직 초반에 불과하지만 이토록 허술한 첩보물을 시청하면서 과연 얼마나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긴장과 웃음이 적절히 어우러진 좋은 드라마를 쓰기 위해서는 끝없는 고민과 고통이 필요한 법인데, 오지영 작가는 이 어려운 문제를 너무나 안일하고 쉬운 방법으로 해결하려 한 것은 아닌지 아쉬워지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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