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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냄새 못 맡는 남자, 그 방송이 불편했던 이유 본문

예능과 다큐멘터리

'안녕하세요' 냄새 못 맡는 남자, 그 방송이 불편했던 이유

빛무리~ 2016. 10. 25.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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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안녕하세요'를 시청 안 하고 있었는데, 냄새를 못 맡는 사람이 등장했다기에 문득 호기심이 생겨서 보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도 최근 5~6년간 후각을 잃은 상태로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간에 한 달 정도 살짝 후각이 돌아왔던 적은 있지만 금세 날아가 버렸다. 어릴 적부터 나를 괴롭혀 온 극심한 알레르기성 비염과 축농증은 결국 비강 내부에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열리는 물혹을 발생시켰고, 후각을 느끼는 위치는 비강의 가장 안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물혹이 가로막고 있는 상태에서는 냄새를 맡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전신마취로 물혹 제거 수술까지 받았으나 머지않아 다시 재발했고, 그 후로는 벅찬 수술을 통해 무리하게 완전 제거를 시도하기 보다는 국소적으로 떼어내며 점진적으로 체질을 바꾸어 물혹을 말려버리는 방식이 더 좋을 것 같아 천천히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비염과 물혹 때문에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은 냄새를 못 맡는 것이 아니라 코로 숨 쉬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었다. 이 지긋지긋한 비염이 깨끗이 완치된다면, 그래서 후각까지 되찾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현재로서는 편안하게 숨만 쉴 수 있어도 만족할 것 같다. 


어쩌면 내가 후각 상실에 큰 불편을 못 느끼고 살아왔던 이유도, 숨 쉬기가 어렵다는 문제에 비하면 너무 하찮게 느껴졌기 때문일 수 있다. 몸이 편안한 상태에서는 손가락만 베어도 몹시 쓰라리고 아프지만, 목숨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는 손가락의 작은 상처쯤이야 신경쓰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요즘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증세가 심할 때는 양쪽 콧구멍을 시멘트로 막아 놓은 것처럼 실낱같은 단 한 가닥의 바람조차 통하지 않을 때도 많았다. 오직 입으로만 숨을 쉬어야 하는 그 고통은 느껴 본 사람 아니면 정말 모를 거다. 


이렇게 중차대한 문제가 있어선지, 후각 상실 정도는 별 것 아니게 느껴졌다. 오히려 갖가지 역겨운 냄새를 맡지 않을 수 있어서 좋은 점도 있었고, 가장 안타까운 부분은 음식 맛을 잘 못 느끼는 것이었지만 그 역시 대충 견딜만했다. 냄새를 못 맡아도 짜고 달고 매운 맛이 적절히 조화되면 맛있게 느껴졌고, 바삭하거나 쫄깃하거나 부드럽거나 하는 식감을 통해서도 음식 맛은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냄새를 맡을 수 있을 때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저 모든 즐거움을 다 누리고 살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겠거니 하며 지내왔다. (제발 숨만 편히 쉴 수 있다면!) 


그런데 '안녕하세요'에 출연한 남자는 단지 냄새를 못 맡을 뿐 숨 쉬는 데는 아무런 불편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후각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엄청난 불행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는 향수 선물을 받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고, 남들이 즐기는 커피의 향도 전혀 모른다고 했다. 그러자 MC들은 오래 빨지 않아 퀴퀴한 냄새가 나는 옷과 양말 등을 그의 코에 갖다 대며 정말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는데, 그것은 전초전에 불과했다. 


본격적으로 테스트를 하겠다면서 주인공의 눈을 가리고, 코 앞에다가 몇 가지 음식을 갖다 놓고서는 맞춰 보라고 하는 실험이 이어졌다. 치킨과 치킨무, 사과와 양파, 커피와 까나리가 차례로 등장했다. 주인공이 하나를 선택하면 그 음식을 막내 MC인 최태준이 먹어야 하는 실험이었다. 재미있으라고 준비한 코너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보기에는 대놓고 사람을 조롱하며 농락하는 실험에 지나지 않았다. 마치 시각장애인의 눈 앞에다가 "너 바보" 라고 쓰여진 종이를 갖다 댄 후 뭐라고 쓰여 있는지 맞혀 보라고 하는 것과 비슷했다.


 

만약 내가 그 출연자의 입장이었다면 굉장한 모욕감을 느꼈을 것 같다. 분명히 냄새를 맡을 수 없다고 말했는데, 그런 테스트를 한다는 것은 내 말의 진실성을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다. 또한 의심하지 않는다면 명백히 놀림감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냄새를 못 맡는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눈을 가려놓고 냄새만으로 음식들을 알아맞혀 보라니, 내가 무슨 헛짓을 하는지 뻔히 구경하며 웃어 보겠다는 뜻 아니겠는가? 그렇게라도 남들을 웃기는 걸 스스로 즐거워하는 사람이라면 괜찮을지 모르지만 나는 아니었다. 


주인공은 냄새를 맡지 못해서 위험한 일도 몇 차례 있었다고 한다. 작업 현장에서는 휘발유나 시너를 음료수 통에 담아놓는 일이 흔한데 그것을 물인 줄 알고 들이킨 적이 있었으며, 가스렌지 위에서 음식이 타는 냄새를 맡지 못해 화재가 날뻔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또 민망한 일도 있었는데, 엘리베이터 안에서 누군가 방귀를 뀌었는지 모두 진저리를 치며 내리는데 혼자서 멀뚱히 남아 있다가 억울한 오해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나의 경우는 한 번도 그런 경험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며 들을 뿐이었다. 


물론 아주 어렸을 때 후각을 잃어서 그 어떤 냄새에 대한 기억도 전혀 없는 주인공과, 어른이 되어서야 후각을 잃었기 때문에 거의 모든 냄새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는 나와는 입장이 다를 것이다. '냉장고를 부탁해'에 출연 중인 이연복 셰프도 벌써 후각을 잃은지 수십년이나 되었지만 아직까지 일류 요리사로 활동할 수 있는 이유는, 후각을 잃기 전에 맡았던 냄새의 기억 때문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주변에서 말하는 향긋한 냄새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주인공으로서는 많이 궁금하고 서럽기도 할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까지 글썽거리는 주인공과 가족들의 모습을 보는 내 마음은 썩 편치 않았다. 나는 몇 년 동안 후각이 없어도 별로 큰 불편을 느끼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잘 지내왔는데 갑자기 나와 비슷한, 아니 단지 냄새만 못 맡을 뿐 코의 다른 기능은 나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 나와서 그 문제로 너무나 슬퍼하는 모습을 보자니 기분이 좀 그랬다. 이것이 그렇게 온 가족이 눈물을 뚝뚝 흘리고, 주변 사람들이 토닥토닥 위로해 줘야 할 만큼 그렇게 큰 문제였단 말야? 그럼 나도 펑펑 울고 슬퍼해야 하는 건가? 


또한 사연의 주인공은 습관적으로 담배를 많이 피우는데 냄새를 못 맡으니 중독이 더 깊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줄담배를 피워도 될 만큼 - 상대적으로 - 건강한(?) 그의 코와 기관지가 부러울 뿐이었다. 나는 담배를 안 피우는데도 매일 코가 막혀서 숨 쉬기도 힘들고, 목에 가래가 껴서 기침을 하느라 밤에 자다가도 여러 번 깨는데, 그리고 미세먼지 심한 날은 항균 마스크 없이는 외출도 못 하고, 나갔다 와서는 식염수로 코 세척을 꼭 해줘야 하는데, 안 그러면 염증이 생겨 지독한 통증과 더불어 코에서 피가 쏟아지기도 하는데... 그 사람은 나보다 훨씬 살기 편한 거 아닌가? 


아울러 코에 관한 문제로 그렇게 고민하면서도 담배는 많이 피운다는 주인공이 나는 솔직히 좀 이해가 안 되었다. 호흡기에 문제 있는 사람이 무슨 담배를 그렇게? 자기 몸의 치료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함께 생활하는 아내와 자녀들의 건강을 위해서도 담배는 백해무익인데, 담배 끊을 생각은 전혀 안 하면서 남들에게 괴로움만 하소연하는 모습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아무튼 주인공을 대하는 제작진의 태도도, 후각의 결핍을 마치 엄청난 비극인 것처럼 울며 슬퍼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나에게는 불편하게 느껴졌다. 


물론 내가 후각의 결핍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고 해서, 남도 그래야 한다는 법은 없다. 나에겐 별 것 아니라도 그 사람에게는 얼마든지 심각한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기분이 좋지는 않다. 코의 건강은 매우 안 좋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는 건강하다 생각해 왔고, 내가 딱히 비정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남들에게 위로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이 방송을 보고 나니까 갑자기 내가 매우 불건강하고 비정상이고 위로받아야 하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이런 기분 참 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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