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다른 세상으로 떠나간 그녀를 추억하며... 본문
그녀가 '열혈구독자'라는 이름으로 내 블로그에 찾아와 처음 발자취를 남겼을 때는 2009년 가을에서 초겨울 무렵이었던 것 같다. '빛무리의 유리벽 열기'를 개설한지 불과 3~4개월밖에 되지 않아 고정 독자가 별로 없을 때였는데, 그 닉네임 만큼이나 열정적인 어조로 댓글을 달며 꾸준히 찾아와 주던 그녀는 참으로 인상적이면서도 고마운 존재였다. 나는 당시 드라마 속 캐릭터에 감정을 이입하여 편지 형식의 리뷰를 즐겨 쓰곤 했었는데, 어느 날 그녀가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의 남주인공 차강진의 편지를 꼭 읽고 싶다며 부탁하기에, 나는 그 드라마의 최종회 리뷰를 차강진의 편지 형식으로 작성하기도 했었다. 그것을 읽고 무척이나 기뻐하며 감사 인사를 남기던... 나중에 알았지만 그녀는 겨우 스무 살의 꽃다운 소녀였다.
이후로도 그녀는 나의 조그마한 이 공간에 종종 찾아와 따스한 발자취를 남겨주었고, 댓글창에 그녀의 이름이 보일 때마다 나는 특별한 반가움을 느꼈다. 한 번도 얼굴을 마주한 적은 없었지만 언제부턴가는 다정한 친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2년여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오랜만에 찾아온 그녀는 방명록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라는 고백을 남겼고, 나는 "축하합니다, 행복하세요"라는 인사 대신 "당신의 사랑 이야기가 궁금해지네요" 라는 답글을 달았다. 그러자 그녀는 메일을 통해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간략하게나마 털어놓으며 생면부지의 나에게 마음을 열어주었다.
사실 그녀와 메일을 주고받던 2011년 초겨울 무렵은 내가 아주 오래 전에 헤어졌던 첫사랑과 운명적으로 재회하며 죽었던 연애세포를 되살리고 있던 시기였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했다는 그녀 역시 나와 같은 달콤함에 빠져있을 거라고, 나는 무의식중에 생각했던 것 같다. 결혼 적령기가 한참 지난 시기이다 보니 내 친구들은 대부분 결혼한지가 오래 되었고, 그 밖의 몇몇은 불과 얼마 전의 나처럼 세월 속에 연애세포를 죽여가고 있는 노처녀들뿐이라, 바야흐로 연애를 시작하는 사람의 설레는 기분을 함께 나누기엔 좀 적절치 못했다. 그래서 어쩌면 나는 사랑을 시작할 무렵의 설렘과 행복을 그녀와 서로 나누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메일을 받고 보니, 그녀의 사랑은 나의 예상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 달콤함이 아니라, 응답받지 못하는 일방적 사랑의 애달픔과 쓰라림으로 가득했던 것이다. 나는 약간 당황했고 차마 그녀에게 나의 사랑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가 없어서, 그저 열심히 응원하며 격려하는 언어들로 채워진 답장을 보냈다. 미약한 격려에도 그녀는 무척이나 고마워했고, 그녀의 나이가 불과 스물 두 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비록 힘든 외사랑이라도 젊음의 힘으로 너끈히 이겨낼거라 생각하며 걱정하지 않았다. 많이 아프겠지만 그것은 청춘의 통과의례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던 거다.
다시 2년의 세월이 흘렀고, 나는 재회한 첫사랑과 결혼을 했다. 평화로운 일상이 지속되던 가을 날, 아주 오랜만에 '열혈구독자'의 반가운 이름이 보이기에 급히 방명록을 열었는데 뜻밖에도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친구였다. 사랑의 아픔을 견디지 못한 그녀는 혼자 외국으로 도망치듯 떠났으며, 가족 친지와도 거의 연락을 끊은 상태라고 했다. 그녀가 평소 나의 글을 무척이나 좋아했으니, 혹시 그녀에게 힘이 될 수 있을만한 글을 편지 형식으로 써줄 수 있겠느냐고 친구는 부탁해 왔다. 약간은 부담이 되었지만 그녀 자신도 나의 글을 원한다기에, 어떻게든 아주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나는 그녀의 사랑 이야기를 소재로 편지를 써 주었다. (사랑한 후에, 잊혀질 그에게 보내는 편지)
그런데 어찌 상상이나 했을까? 다시 1년여의 세월이 흘러 2014년도 저물어가는 겨울의 어느 날, 충격적인 비보가 전해졌다. 상처를 극복하려고 애써 노력했지만 실패한 그녀가 끝내 다른 세상으로 떠나갔다는 소식이었다. 참으로 모질고도 질긴 것이 사람의 목숨인데, 그토록 쉽게 끊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한동안 믿기지 않았다. 한 고비만 넘기면 얼마든지 또 다른 사랑을 만날 수 있을텐데, 지금은 전부인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별 것 아닐 수 있는데, 그 어린 나이에 그토록 허망하게 떠나버리다니...
내가 써 주었던 글을 그녀가 수없이 보고 또 보았노라, 그녀의 친구는 전했다. 그토록 내 글을 좋아했으니, 마지막 가는 길에 안식처가 될 수 있게끔 한 번만 더 편지를 써 달라는 부탁과 함께였다. 하지만 이미 세상에 없는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막막한 심경을 달래던 중, 그녀가 나에게 남겼다는 마지막 편지가 친구를 통해 전해져 왔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전 가족과 친구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써서 남겼는데, 나에게 보내는 편지도 그 중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내가 그토록 중요한 사람이었나? 슬픔과 의문이 뒤섞인 채, 나는 편지를 열어보았다.
숨을 쉬는 것도,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 것도 힘겹다는, 그저 육신 하나가 이토록 버거울 수 없다는 말 속에서 그녀의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아무것도 보답하지 못한 채 이토록 빨리 다른 세상으로 도망가는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꼭 한 번은 나를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 말을 꼭 하고 싶었지만 끝내 하지 못했노라고... 왜냐하면 글 속에서 전해지는 나의 성품이 너무 단단하고 단호하여 쉽게 응해주지 않을 것 같아, 말을 꺼내려다가도 멈추고 말았노라고 그녀는 털어놓았다.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는 듯했다. 나의 껍질이 얼마나 견고해 보였으면, 간절히 원하면서도 말조차 꺼내지 못했던 것일까? 과연 그녀가 만남을 청했다면 내가 선뜻 응했을지, 그녀를 만났다면 내가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었을지, 그건 알 수 없다. 하지만 일말의 가능성조차 스스로 포기하게 할 만큼 내가 단단함과 단호함으로 무장하고 있었다면...... 그건 확실히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는 그저 나의 개성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그녀의 편지가 흔들어 놓았다. 미안한 마음에 눈물이 솟구쳤다.
"흔적을 남기지 못해도 저는 언제나 열혈구독자란 닉네임처럼 항상 빛무리님의 글을 좋아하고 지지합니다. 언제 어디에서도 그렇게 응원할테니 잊지 말고 앞으로도 좋은 글, 마음이 담긴 글 부탁드려요!"
그녀의 마지막 당부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보잘것 없는 나의 글을 그토록이나 열렬히 사랑해 주었건만, 나는 결국 그녀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이제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최선을 다해 좋은 글을 쓰는 것뿐... 욕심에서 비롯된 불순한 글이 아니라, 부족하더라도 진정을 담아서 열심히 쓰는 것뿐이다. 최근 글쓰는 일에 약간의 염증과 회의를 느끼며 자신의 능력에도 의기소침해지던 터라 블로그에도 자주 글을 올리지 못했는데, 그녀는 진심어린 유언으로써 내 마음을 위로하고 힘을 북돋워 주었다.
열혈구독자님... 나는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는데, 어린 당신은 떠나가면서 나에게 커다란 은혜를 베풀어 주었군요...... 당신을 사랑했던, 그리고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을 위해서 미약하지만 내가 기도할게요. 부디 너무 오래 아파하지 않기를... 당신을 추억할 때마다 눈물 흘리기보다는 미소지을 수 있기를... 떠나간 당신보다는 남겨진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게요. 당신도 그것을 원할 것 같으니...... 부디 이제는 아픔 없는 곳에서 편히 쉬세요.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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