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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 후에, 잊혀질 그에게 보내는 편지 본문

나의 생각

사랑한 후에, 잊혀질 그에게 보내는 편지

빛무리~ 2013. 9. 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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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9월이네요. 내가 도망치듯 한국을 떠나온지도 어느 덧 4개월에 접어드는데, 머나먼 이 곳에서도 어김없이 새로운 계절은 시작되는군요,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열띤 이마를 식히니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지난 일들이 떠오릅니다. 이제 크리스마스가 되면 내가 당신을 가슴에 품은지도 꼭 3년인데, 그 때쯤에는 말간 얼굴로 다시 돌아가 아무 고통 없이 당신을 마주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돌이켜 보니 그것은 갑작스레 찾아온 열병이었습니다. 내 나이 스물 둘... 아직은 세상이 두렵고 알 수 없는 미래가 두려워 방황하던 그 때, 당신의 작은 친절은 삽시간에 내 마음을 무장해제시켰지요. 유난히 춥던 그 해 겨울은 그 열병 덕분에 따뜻했습니다. 당신으로부터 응답받지는 못했어도, 사랑했기 때문에 나는 행복했습니다.

 

나도 친구들처럼 내 사랑을 마음껏 자랑하고 싶었지만, 같은 회사 선배였던 당신은 나보다 아홉 살이나 많고 사귀는 사람까지 있었기에 그럴 수가 없었죠. 하지만 사랑에 빠진 마음은 턱없이 용감했고, 용감했던 만큼이나 어리석었습니다. 꼭 한 사람, 친한 언니에게만 상담하려고 했던 것인데 머잖아 나의 짝사랑은 온 회사 내의 잡담거리가 되었고,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 다른 동네에 살고 있는 친구의 오빠와 그 친구들까지 알게 되었네요. 당황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죄가 아니니까, 차라리 당당해지기로 결심했죠. 사람들이 짖궂게 놀려대도 나는 웃으며 받아들였고, 사랑하는 내 마음을 절대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당신을 좋아해선 안 된다고 나를 말리셨지만, 이미 시작된 사랑을 멈출 수는 없었어요.

 

나는 당신에게 무엇이든 주고 싶었지만, 거절당할까봐 손조차 내밀지 못했죠. 당신을 향한 내 짝사랑을 당신도 알고 있는데, 혹시라도 부담스러운 마음에 거절한다면 그 때 받게 될 상처를 나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회사 동료들에게 부탁하여 피로회복제며 간식거리 등을 전하곤 했는데, 당신이 거절하지 않고 받아주어서 정말 기뻤답니다. 당신이 내가 준 것들을 무작위로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있음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그리고 내가 직접 만든 레몬 꿀절임이 당신의 서랍 한 구석에 썩어가고 있음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더 바랄 것 없이 행복했어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처음 느끼는 나날이었는데, 결국 돌아온 것은 쓰디쓴 아픔이었습니다.  

 

 

왜 이제는 아무것도 주지 않느냐고, 당신은 어느 날 회사 사람들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스치듯 내게 물었죠. 내가 그토록 챙겨줄 때는 아무 반응도 없다가, 느닷없이 그렇게 묻는 당신 때문에 나는 혼란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상처받은 후에도 사랑을 멈추지 못하던 내 마음에는 그 한 마디 질문조차도 당신의 관심으로 느껴졌었나봐요. 나는 다시 선물과 간식거리들을 당신에게 챙겨주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무반응이었지만, 그래도 줄 수 있다는 게 좋았어요. 복도에서 마주친 당신이 사탕을 갖고 있느냐 물었을 때는, 나의 텅 빈 호주머니가 얼마나 안타깝던지요! 그 후로 나는 항상 호주머니에 사탕을 넣고 다니며, 마주칠 때마다 당신이 내미는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깜빡 잊고 사탕을 챙기지 못한 날이면, 쉬는 시간을 이용해 집에 다녀오기도 하면서, 그렇게 나의 무모한 사랑은 계속되고 있었죠.

 

그러던 중 당신은 먼 곳으로 발령을 받아 떠났고, 당신을 매일 볼 수 없게 된 나는 그리움에 시달렸습니다. 가끔씩 일이 있어 본사에 들어오긴 했지만, 매일 보고싶은 마음이 그 정도로는 채워지지 않았어요. 어느 날 나는 무작정 버스를 타고 당신이 있는 청송을 향해 달렸습니다. 당신을 꼭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당신이 숨 쉬고 있는 그 지역의 공기를 나도 함께 마시고 싶었죠. 그 지역의 풍광을 담아 사진이나 한 장 찍고, 그것을 당신에게 전송하면서 내가 다녀갔노라는 문자 한 통 보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로 당신을 만나게 되었네요. 당신의 일터에 가서 구경하고, 함께 저녁을 먹고, 당신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2시간이나 달렸던 그 날의 기억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 있습니다.

 

나는 참 바보였어요. 그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당신이 했던 그 말들은 모두 거절의 의미였음을 내가 눈치챘어야 했는데 그렇질 못했습니다. 아니, 어쩌면 받아들이기가 싫었던 걸까요? ... 당신은 아직 어린 내 마음을 믿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나의 앞날이 창창하니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왜 당신을 좋아하는지 알 수 없다고, 당신을 향한 내 마음은 곧 변해버릴 거라고도 말했죠. 내가 다른 사람을 만나 보고, 더 많은 세상을 경험하고, 3~4년쯤이 흐른 후에도 여전히 당신이어야 한다면 그 때는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노라고 당신은 말했습니다. 이제 생각하니 그 말들은 모두 확고한 거절의 뜻이었는데, 어리석게도 나는 "가끔씩 문자나 보내라"던 당신의 형식적인 말 한 마디만 부여잡고 기뻐했군요. 그렇게라도 마지막 희망의 한 가닥을 놓고 싶지 않았던가 봅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새 일터로 옮겨서도 나의 열병은 지속되었죠. 못 견디게 그리울 때면 전화 한 통이라도 걸고 싶었지만, 당신 목소리라도 들으면 좀 살 것 같았지만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문자와 카톡을 수없이 보내도 당신은 단 한 번의 답장이 없으니, 나의 메시지들을 읽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답답한 나날이 계속되었어요. 대답없는 벽과 마주선 인형처럼, 나는 그렇게 외롭고 무력했습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느꼈을 때, 나는 마지막으로 꼭 한 번만 당신을 만나보고 이 미칠듯한 외사랑을 접기로 결심했죠. 비록 아프고 허무하게 끝날 지언정, 내 청춘의 한 자락으로 기억될 이 사랑을 위해 그 정도의 마지막 의식은 치러주고 싶었습니다. 안 그러면 내 사랑이 너무 가여울 것 같아서요.

 

하지만 당신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보자는 나의 메시지에도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죠. 당신 마음속의 내가 어떤 존재였는지, 당신을 향해 품어 온 한 가닥 희망이 얼마나 헛된 것이었는지를요. 내 삶의 모든 것을 멈추고 한국을 떠난 이유가 상처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졌는데도 쉽사리 내려놓을 수 없는 마음... 이 고집스런 사랑의 열병을 도저히 당신과 함께 있는 한국에서는 떨쳐낼 수 없을 듯한 느낌 때문이었어요. 마치 늪에서 빠져나오듯,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이 먼 곳으로 도망쳐 왔습니다. 혹시 한국의 친구들과 통화를 하다 보면 다시 늪에 빠지게 될까봐, 친구들과도 연락을 끊었습니다.

 

낯선 곳에 철저히 혼자 남아 생각하니, 당신의 마음이 조금씩 보이더군요. 어린 내 사랑을 한 때의 치기라고 생각하며 가볍게 여겼던 마음... 상처주지 않고 거절하는 방법을 몰라 고민했던 마음...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못 박듯 말하자니 차마 그럴 수 없어 침묵했던 마음... 몇 번 응답하지 않으면 눈치채고 포기할 줄 알았는데, 너무 오랫동안 간절히 날아오는 문자메시지 때문에 난처했던 마음... 마지막으로 한 번 만나자 했으나, 혹시라도 얼굴을 보면 다시 내 마음이 격동하여 매달리게 될까봐 끝내 외면했던 마음... 그래요. 이제 알 것 같습니다.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사탕을 달라며 손을 내밀던 것도 단지 가벼운 장난이었을 뿐, 내 사랑을 이용했다고 생각하진 않을래요. 당신은 무책임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약했을 뿐이라고, 냉혹하거나 잔인한 것이 아니라 방법을 몰랐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은 채 식지 않은 열기와 통증이 남아 있지만, 지금 이 순간도 먼 훗날 돌이켜 보면 아름다운 추억일 것을 믿습니다. 언젠가 활짝 핀 꽃을 봐도 웃음이 나지 않고, 흩날리는 낙엽을 봐도 허무하지 않게 되는 무감한 시절이 오면, 이 젊은 날의 뜨거웠던 열병을 그리워하겠죠. 흔들림 없이 피어나는 꽃은 없는 것처럼, 아픔 없이 성장해 가는 마음도 없으니까요. 이제 스물 다섯... 나는 어떤 미움이나 원망도 없이, 슬픔과 상처는 귀한 선물처럼 감싸 안으며, 오래된 책장을 덮듯이 내 사랑의 기억을 고이 덮어 둡니다. 그 책장 한 페이지에 빛바랜 그림으로 남겨진 당신, 부디 안녕히 계세요. 올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 나는 새벽의 하얀 길목에 꼭 첫 발자국을 남겨보고 싶습니다.

 

*** 이 글은 제 블로그의 애독자이신 한 분의 친구를 위해 쓰여진 것입니다. 저의 드라마 리뷰 중에서도 캐릭터에 몰입하여 쓰는 편지를 가장 좋아하시던 분인데, 사랑의 깊은 상처 때문에 한국을 떠나 먼 곳에서 외롭게 지내고 계시다는군요. 그 분에게 저의 글이 위로가 될 것 같다는 친구분의 요청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 싶어서 작성한 글입니다. 오히려 실례가 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제 마음만은 그대로 전해졌으리라 믿어요. 부디 빠른 시간내에 상처를 훌훌 털고 한국으로 돌아와, 가족 친구들과 더불어 행복하게 지내시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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