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인간승리? 아니, 모기승리다! 본문
그래도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이 방 주인은 굉장히 어리버리하고 겁이 많다.
방을 잘못 찾아든 내 친구들은 벌써 이 세상 모기가 아니다.
두려움 없이 잽싸게 파고드는 손바닥 또는 파리채에 의해 그들은 영혼이 되었다.
살아 생전에도 가벼운 몸이었지만, 이제는 더욱 더 가벼운 영혼이 되었다.
그런데 이 방 주인은 나를 무서워한다.
추워진 날씨 때문에 빠릿빠릿하게 날아다니지도 못하는 나를 무서워한다.
슬로비디오처럼 천천히 날아다니는 나를 무서워한다.
바로 눈 앞을 날아가도 절대 나를 잡지 못한다.
비명을 지르면서 헛손질을 하고 헛손뼉을 칠 뿐이다. 불쌍하다.
하지만 그의 눈앞을 오락가락하면 그 댓가로
나에게는 지독한 화생방 훈련이 주어진다.
치익~ 치익~ 그는 침대와 베겟잇에 거리낌 없이 독가스를 살포한다.
자기가 잠들면 어차피 그 독가스는 모두 자기 코로 들어갈텐데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나를 죽이기 위해 자기 자신의 희생조차 마다하지 않는다. 불쌍하다.
나는 이 방 안에서 벌써 일주일째 살아 남았다. 아니, 열흘쯤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독한 가스를 살포해봤자, 이 겁많은 인간은 나를 죽이지 못했다.
평소에는 한쪽 구석에 죽은 듯이 틀어박혀 있지만
가끔씩 심심하다는 생각이 들면, 나는 눈부신 날개를 펴고 밖으로 날아간다.
일부러 그의 눈앞을 스칠 듯 가까이 지나치기도 한다.
나의 조그만 날개짓에 비명을 지르고 두려워하는 인간을 보며
나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쾌감을 느낀다.
헛되이 허공을 가르는 그의 손놀림을 나는 조롱한다.
어김없이 그에 이어서 살포되는 독가스조차도 나는 이제 사랑하게 되었다.
어차피 내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내 몸을 스쳐가는 바람에서 심상치 않은 찬 기운이 느껴질 때부터
나는 이미 최후가 멀지 않았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각오하고 있던 일이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니 막막했다.
아무렇지 않았다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어차피 한 세상 살다 가는 건
저들 잘난 인간이나 우리 하찮은 모기나 마찬가지 아니던가?
그들은 우리의 삶이 훨씬 짧고 허무하고 의미없다 생각하겠지만
너희의 인생은 얼마나 더 길고 의미 있는가?
너희 삶도 한 순간일 뿐이다.
우리는 남의 피를 빨아먹고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가 원해서 이렇게 된 것은 아니다.
태초부터 정해진 운명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너희는... 남의 피를 빨아먹으며 살아가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너희도 우리처럼, 자기 뜻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웃는다. 소리없이 통쾌하게 온 몸을 전율하며 웃는다.
어차피 한 세상 살다 갈 거라면
이렇게 무능한 인간을 놀리고 그 비명소리를 즐겨보는 것도 즐겁지 아니한가?
이 겁쟁이는 말한다.
가을 모기는 입이 비뚤어져서, 물어봤자 세게 물지도 못한다고...
그래서 별 것은 아니지만, 며칠째 자기 방에 머물며 신경을 쓰이게 한다고 말한다.
그의 말은 사실이기도 하다. 찬바람이 불면서 내 입은 비뚤어졌고
그래서 물어봤자 그의 몸에 약간의 가려움 뿐... 큰 피해를 주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이미 나는 그의 팔꿈치, 손등, 발등, 무릎, 종아리, 옆구리 등을 공격했고
그는 속수무책으로 나의 공격에 당했다. 한 번도 피하지 못했다.
이 멍청한 인간의 몸에서는 물파스 냄새가 진동을 한다.
이 정도면 하찮은 모기의 생애로서는 충분하지 아니한가?
그가 얼마나 잘난 인간인지는 모르나, 그는 100% 나에게 패배했다.
나는 오늘도 그의 눈앞을 윙윙 날아다니며 조롱한다.
이제 난 머지않아 떠나겠지만, 누군가는 나의 업적을 잊지 않고 기억할 것이다.
인간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뱃속에 채워넣은 핏물들을 모두 허공 중에 흩뿌리면서
인간의 손바닥에 허무하게 죽어간 동료들에 비한다면
단 하루라도 더 살면서 이와 같이 위대한 업적을 남긴 나를 어찌 행운아라 하지 않겠는가?
이 모진 겨울을 버텨내고 살아남는 나의 동료들에게 행운이 있기를!
*******
요즘 제 방에, 그것도 침대 옆에서
대략 열흘 정도 기생하고 있는 단 한 마리의 모기가 있습니다.
그 모기의 심정을 상상해서 글로 써 봤습니다.
수시로 독가스 살포에, 끊임없는 찬바람을 더하면 죽지 않을까도 싶었지만
밤새도록 창문을 열어놓고 잠을 자다가 제 목구멍에 탈이 날지언정
이 녀석은 끄덕도 없이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군요.
네, 네... 존경스러울 지경입니다. 그 생명이 오늘 밤을 넘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으로부터 존경을 받아 보았으니, 모기의 생애치고 나쁘지는 않을 듯 싶군요.
아니면 혹시... 저라는 인간이 모기만도 못할 만큼 하찮은 걸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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