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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구', 현대인 심리의 탁월한 묘사 본문

책과 영화와 연극

'절망의 구', 현대인 심리의 탁월한 묘사

빛무리~ 2009. 9. 1.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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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멀티 문학상' 수상작인 김이환의 소설 '절망의 구'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숨막힐 듯한 긴장감이 흐른다. 현대인은 항상 무언가에 쫓기는 듯 불안해하고, 언제 어디서 치명적 불행이 닥칠지 몰라 공포에 떨고 있으며, 겉보기에는 화려한 듯 하지만 정작 진심을 나눌 친구는 없어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는데다가,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폭발할 듯한 분노의 불길을 가슴 속에 잠재우며 살아간다. '절망의 구'는 그런 현대인의 삭막한 내면을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1. 공포(恐怖)

이 소설을 지배하고 있는 전반적인 정서는 '공포'이다. 주인공인 '남자' 김정수는 무려 418페이지에 달하는 긴 소설 속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공포에 질려 있다. 서울 시내에 갑자기 정체를 알 수 없는 2미터 가량 크기의 검은 구(球)가 출현하여 접촉하는 사람들을 모두 집어삼키기 시작하면서 공포는 시작된다. 그 공포의 검은 구는 아메바처럼 자가분열을 하여 수없이 늘어난다.

참 특이한 발상이다. 현대인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는 그 공포의 정체를 지은이는 어떤 물체에 대입하여 검은 구(球)로 설정한 것이다.

하여튼 검은 구에 신체가 닿으면 빨려들어가게 되고 그것은 곧 죽음이라는 전제하에 주인공은 쫓기고 또 쫓긴다. 그러다가 우연히도 자기 자신이 그 구에 빨려들어가지 않는 유일한 사람임을 알게 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구가 모두 사라지고, 구에 흡수되었던 사람들이 돌아오게 되자 이번엔 사람들을 피해 도망치며 더욱 더 큰 공포를 느낀다.

구에 빨려들어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은 빨려들어가던 그 순간의 느낌을 '절망'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구에 흡수된 적이 없는 주인공의 시각에서 서술된 이 소설은 절망을 노래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어떻게든 살아야 하겠다는 절박한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그것은 끊임없는 새카만 공포 속에서 울려퍼지는 삶을 향한 희망의 노래였다.

2. 고독(孤獨)

주인공인 '남자'는 전형적인 현대인이라고 할 수 있다. 시시각각으로 목을 죄어오는 공포 앞에서 그는 지극히 이기적인 모습을 보인다.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안전지대를 빠져나가 남들을 구하러 다니는 교회 사람들의 정서를 그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을 오히려 정신나간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서 혼자 몸을 피해 도망칠 때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안위만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우연히 피신해 들어간 마트에서 '청년'을 만나 동거하게 되었을 때도 그 두 사람에게서 진심으로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은 찾아볼 수 없다. 두 사람이 신체의 일부를 밀착하고 있기만 하면 검은 구를 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했기에, 자기의 죽음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붙어 있었을 뿐이다. 둘 중에서도 특히 걸핏하면 체력이 약한 청년에게 폭력을 휘둘러대며 자기의 입장만을 고집하는 주인공 '남자'는 더욱 이기적이다.

그러나 신체 접촉이 잠시 떨어져 있던 틈에 검은 구가 다가와 청년을 삼켜버리자, 유일하게 구에 흡수되지 않은 남자는 세상에 홀로 남게 된다. 음식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마트에서 홀로 지내며 남자가 느끼는 것은 절대고독이다. 오랫동안 곁에 있었지만 사랑하지도 않았던 그 청년을 남자는 처절하게 그리워한다. 청년이 갖다주었던 감기약의 사용설명서를 소중히 간직하며 청년의 존재를 잊지 않으려 하는 남자의 심리 묘사는 가슴이 저리도록 리얼했다.

3. 분노(憤怒)

어느 날 갑자기 수천수만개의 검은 구는 서로 합체를 시작하더니 결국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흡수되었던 사람들이 돌아왔다. 돌아온 사람들은 고통과 흥분과 분노에 휩싸여 있다. 그들에게는 분노를 폭발시킬 분화구가 필요했다. 남자는 그 표적이 되어 쫓기기 시작한다.

검은 구에 흡수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다는 이유로, 즉 자기네와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일제히 남자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린다. 남자 자신조차도 자기가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지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알았다 한들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천하만고의 죄인이 되어 쫓겨야 한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그렇게 위험하고도 외로운 일이다.

분노는 분노를 낳고 또 낳으며 거대한 해일처럼 남자를 덮쳐 온다. 그 분노 앞에서 남자는 또 다시 공포에 질리며 살기 위해 처절하고도 이기적인 몸부림을 친다. 한때는 절대고독 속에서 그토록 그리워했던 청년을 다시 만났으나, 자기가 살기 위해 청년을 모함하고 자기에게 향했던 분노의 화살들을 청년에게로 돌려놓은 것이다. 억울하게 표적이 되어버린 청년이 그 분노 속에서 처참한 최후를 맞이할 때 남자는 다시 도망친다.

*******

'절망의 구'는 엔딩에 이르러서도 특별한 주제를 제시하거나 어떠한 단정을 내리지 않는다. 그저 인간이 느끼는 공포와 외로움과 분노를 사실적으로 긴박하게 표현함으로써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을 뿐이다. 검은 구의 존재는 비현실적이었으나 워낙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탁월했으므로 각각의 상황에 대처하는 남자의 모습은 묘하게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청년이 자주 되뇌이던 것처럼, 이 세상 사람 모두가 "다 죽어도 싼 ××들" 일지언정 그래도 누군가의 손을 잡지 않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가 없으니 "그래도 결국 사랑해야 할 것은 사람" 이라는 따뜻한 주제가 혹시 담겨있는 게 아닐까 하고 중간중간에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쏟아지는 분노 속에서 칼날같은 배신을 하고 도망치는 남자의 삭막하기 이를데 없는 마지막 모습을 보니 주제를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을 듯하다.

이 작품 '절망의 구'는 현대인의 특징적인 심리 묘사는 탁월했으나 결과적으로 어떠한 방향을 제시하지는 못하였으므로, 공감을 얻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감동을 주는 데에는 실패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열린 엔딩으로 마무리하여 엔딩 공모전을 열도록 하기 위한 의도적 결말이었다면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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