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1박2일' 유호진 PD의 놀라운 능력, 서울 시간여행 본문
나영석 PD가 이끌던 '1박2일' 시즌1에 신입 PD로 배정되어 오던 첫 날 강호동과 김C의 음모(?)에 걸려들어 호된 몰래카메라 신고식을 치를 때, 그저 파릇한 청년으로만 보였던 유호진 PD가 불과 5년 후에 이토록 많이 성장해 있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었다. 5년이라는 세월이 길다면 길수도 있겠지만, 신입 PD가 공중파 주말 예능의 수장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치고는 매우 짧은 편이다. 치열한 주말 예능의 전쟁터에서 백여 명 스태프와 예능 초보까지 뒤섞인 연기자들을 이끌고 프로그램을 꾸려나가는 것 자체가 만만찮은 일인데, 유호진 PD의 '1박2일' 시즌3는 출범하자마자 가파른 시청률 상승 곡선을 그리며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탈환했다. 물론 '런닝맨'과 '진짜 사나이'의 기세가 여전히 등등하므로 시청률은 자주 엎치락 뒤치락하지만, 3사 예능 중 가장 식상하다는 혹평을 들으며 침몰해가던 '1박2일'을 단시간 동안 이렇게 살려놓은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1박2일' 시즌2가 침몰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유약한(?) 제작진이 연기자들을 너무 편하게 해주었던 탓임을 부인할 수 없는데, 그 반작용 때문인지 유호진 PD의 시즌3는 초반부터 연기자들을 생고생 나락으로 떨어뜨리며 가학성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어쨌든 그만큼 시즌3의 출범은 강렬하고 인상적이었으며, 시청자들의 나른한 눈빛을 초롱초롱하게 깨워 놓았으니 그만하면 대성공이었다. 새로 합류한 김주혁, 김준호, 데프콘, 정준영은 불과 몇 주일만에 제각기 뚜렷한 캐릭터를 잡고 뿌리를 내렸으며, 기존 멤버인 차태현도 원래의 캐릭터에 살짝 변형을 주면서 새로운 구도에 빠르게 적응했다. 시즌2에서는 불운의 아이콘이며 게임의 구멍이었던 차태현이 시즌3에 접어들면서 강인한 신체 능력을 보여주고 행운까지 따르는 모습은 나름 신선했다. 오직 김종민은 예전 캐릭터와 별다를 것 없어 보여서 안타까운데, 이젠 뭐 그냥 그러려니 한다.
2월 9일에 방송된 '서울, 시간여행' 편은 녹화 날짜가 하필 설날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약간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촬영 장소가 서울 한복판이라는 점을 알고 나니, 시내에 차량이 적고 한산하여 이동이 수월한 설날을 굳이 선택한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멤버들은 각기 흩어져 서울 시내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과 다방 등을 찾아가 미션을 수행했고, 93세의 할머니를 모시고 가족 4대가 모여 사는 집을 방문하여 식사 대접을 받기도 했다. 나는 데프콘이 방문했던 오래된 다방의 풍경을 보니 '지붕킥'의 한 장면이 생각나서 왠지 아련한 기분이 되었다. (지훈과 세경이 마주앉아 있던 그 대학가의 오래된 찻집이 떠오르며, DJ 박스 안의 데프콘이 'pale blue eyes'를 틀어주길 바랐다는 엉뚱한 이야기..;;)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에서는 을사늑약이 유효한 국제조약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5가지 이유를 배웠는데, 간략하면서도 매우 인상 깊은 가르침이었다.
식사를 마친 멤버들은 2인1조를 이루어 다시 서울 탐방에 나섰다. 김주혁과 데프콘은 명동성당, 김준호와 김종민은 창경궁, 차태현과 정준영은 남산에 가서 그 지역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오는 미션이었다. 가장 멋진 사진을 제출한 팀에게는 다음 날 아침의 밥차 이용권 또는 그보다 더 좋은 상품을 주겠다고 제작진은 약속했다. 밥차 이용권에 혹한 멤버들은 각기 최선을 다해 사진을 찍어 왔는데, 놀랍게도 그 미션의 참된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한참 동안 연기자들에게 호된 고생을 시켰으니 이제는 따뜻한 감동으로 분위기를 전환시킬 때가 왔노라고 판단한 걸까? 적절한 시기에 밀당을 함으로써 쫄깃한 재미를 준 것도 훌륭하지만, 무엇보다 이번에는 아이디어가 기발했다. 유호진 PD는 참 영리한 사람인 것 같다.
가장 먼저 뽑힌 것은 명동 성당 앞에서 아무런 포즈도 취하지 않고 그냥 우두커니 서 있는 김주혁의 사진이었다. 그게 어째서 최고의 사진이냐고 멤버들이 의아해하자 유호진 PD가 말했다. "저 자리에서 생애 최고의 환희를 느끼셨던 어떤 분들의 사진이 있습니다. 그 사진과 가장 유사한 구도이기 때문에 선택된 것입니다." 알쏭달쏭한 말에 모두 어리둥절한데 화면에는 아주 오래된 흑백사진 한 장이 떠올랐다. 1967년 초여름, 명동성당 앞에 나란히 서 있는 젊은 커플의 모습이었다. 그 사진을 보자 김주혁의 표정이 확 달라지더니 눈시울이 급격히 젖어들기 시작했다. 사진 속 인물들은 故김무생과 그의 아내, 즉 김주혁의 부모님이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결혼하기 전의 연애시절이었다.
김주혁의 어머니는 그 사진을 제작진에게 건네주며 '사실 이것은 너무나 소중해서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혼자서만 간직해 왔던 것'임을 밝히셨다고 한다. 그래선지 아들인 김주혁조차도 그 사진은 생전 처음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혼자서만 간직해 온 사진을 드디어 품에서 꺼내셨으니, 못 견딜 것 같던 그리움도 이제는 추억으로 남길 만큼 편안해지신 게 아닐까? 전혀 예상 못한 순간에 허를 찔린 김주혁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뿐 한참 동안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다음 차례로는 남산 팔각정에서 찍은 차태현의 사진이 뽑혔는데, 역시 그 자리에서 1973년에 찍으셨던 차태현 부모님의 사진이 뒤이어 나타났다. 차태현의 얼굴에도 어김없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창경궁의 한 나무 아래서 찍은 김종민의 사진 뒤에는 1978년 봄의 창경궁에서 찍으신 김종민 아버지의 사진이 떠올랐다. 김종민이 고등학교 때 세상을 떠나셨다는데, 사진 속에는 29세의 푸르른 청춘으로 남아 계셨다.
모두들 아버지의 얼굴이 김종민과 너무 똑같다고 난리인데, 김종민은 넋 나간 듯 중얼거렸다. "닮았어요? 이젠 잘 생각 안 나는데... 오래돼서..." 무감한 듯 말했지만 역시 그 눈에도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계셨다면 어떤 아버지였을 것 같으세요?" 제작진이 묻자 "소주 한 잔 같이 마실 수 있는 아버지요." 라고 김종민은 대답했다. "나중에 아이들을 낳게 되면 어떤 아버지가 되어주고 싶으세요?" 하자 "그냥 오래오래 같이 있어주는 아빠요."라고 대답했다. 아, 나는 사실 김종민을 별로 안 좋아했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함께 울어버렸다. 어린 김종민을 꼭 끌어안고 찍으신 아버지의 사진들을 보니, 나한테 잘못한 것도 없는 김종민을 괜히 좀 싫어했던 것이 몹시 미안해졌다. 누군가에겐 그토록 애틋하고 눈물겨운 사람인 것을... "아이들과 함께 서울의 어디를 가고 싶으신가요?" 하고 묻자 김종민은 활짝 웃으며 "창경궁이요!"라고 대답했다.
무심히 지나치던 명동 성당도, 남산 팔각정도, 창경궁도 이제부터는 더 이상 무의미한 장소가 아니게 되었다고 그들은 말했다. 언젠가는 꼭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그 곳에 가서 사진을 찍으며 옛날 이야기를 해 주겠노라고도 말했다. 제작진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특별한 선물을 또 준비했다. 부모님의 과거 사진에 현재 그들의 모습을 합성하여, 마치 함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진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차태현은 익살맞은 표정으로 자기 부모님을 가리키며 웃고 있었다. 김종민은 그의 아버지가 기대어 계신 나무 아래에 등을 기대고 앉아 하늘을 보고 있었다. 김주혁은 마치 성당 앞에서 부모님을 만난 것처럼 대화하는 자세로 마주 서 있었다. 특히 현실 속에서 아버지를 만날 수 없는 김주혁과 김종민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선물이 아니었을까 싶다. 데프콘과 김준호와 정준영도 비록 합성 사진은 없었지만 부모님의 옛 사진들을 보며 추억에 잠길 수 있었으니 충분히 행복했을 것이다.
정말 따뜻하고 특별했던 '1박2일'의 서울 시간여행은 멤버들뿐만 아니라 시청자에게도 크나큰 선물이었다. 잊고 지냈던 소중한 사람들과 추억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게 해주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해냈을까? 유호진 PD는 무엇이 인간의 가장 깊은 곳을 휘저어 놓는지, 어떻게 해야 충격의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아무런 준비 없이 폭탄을 얻어맞은 멤버들은 거의 오열하다시피 눈물을 흘렸지만, 세상에 이보다 더 기분 좋고 감미로운 충격이 있을까? 이로써 더 이상 신입 PD가 아닌, 베테랑 유호진 PD의 놀라운 능력이 증명되었으니 차후 '1박2일' 시즌3의 행보가 무척이나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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