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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에서 온 그대' 도민준(김수현)의 쓸쓸한 독백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별에서 온 그대

'별에서 온 그대' 도민준(김수현)의 쓸쓸한 독백

빛무리~ 2013. 12. 27.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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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상하다. 천송이(전지현)는 분명 천송이일 뿐 400년 전의 서이화가 아니다. 단지 12년 전에 마주쳤던 그 얼굴이 좀 비슷했을 뿐이다. 사방 팔방에서 늑대 같은 무리들이 그녀의 어린 목숨을 노리고 달려드는데,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혼자 외롭게 발버둥치던 그 아이의 처연한 눈빛과 좀 비슷하게 느껴졌던 것뿐이다. 거대한 트럭이 달려올 때 그 앞에 속수무책으로 떨고 있던 모습이, 너무나 작고 가냘프던 그 때의 이화를 똑같이 닮아서 잠시 눈길이 멈추었던 것뿐이다. 그런데 왜 나는 천송이를 외면할 수 없을까?

 

 

이 별에서 지나 온 400년은 참 많이 힘겨웠다. 떠나기 전에 꼭 한 번 다시 만나고 싶다는 것은 그저 추억에 대한 예의였을 뿐이다. 400년 전처럼 다시 그녀 때문에 발목이 잡혀 이 곳에 남고 싶지는 않다. 이 별의 사람들은 고작 100년도 안 되는 짧은 생을 살기 때문인지 욕심이 너무 많다. 서로 싸우고 피 흘리고 죽이는 것은 욕심이 많기 때문이다. 남을 속이고 배신하는 것도 욕심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 인생에 남은 몇 십 년을 조금이나마 더 풍요롭게 살고 싶은 까닭이다. 수천 수만 년을 살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을, 그 모든 욕심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이 별의 사람들은 절대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땅에 처음 발을 딛고 내가 본 세상은 참으로 잔인했다. 나의 고향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무 죄 없는 어린 소녀를 캄캄한 골방에 가두고 평생 혼자 살도록 강요하는 것도 모자라, 힘 없고 가여운 그 목숨을 죽여서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어른들의 욕심은 끔찍하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혼례를 치르자마자 과부가 된 이화에게 그녀의 시부모는 끝없이 자살을 종용했고, 뜻대로 되지 않자 급기야 살해를 시도했다. 열녀문 표창을 받아 집안의 명예를 높이려면 그녀가 죽어야만 했던 까닭이다. 내가 구하지 않았다면 이화는 그 때 죽고 말았을 것이다.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마는 것을, 그게 바로 이 별 사람들이 말하는 운명인 것을.

 

절벽에서 그녀의 목숨을 구해 준 후, 고향으로 돌아가기까지는 다소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딱히 할 일도 없었던 나는 왠지 신경이 쓰이고 안부가 궁금해서 그녀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그 작은 관심이 내 삶을 이렇게 바꿔놓을 줄이야! 함께 왔던 친구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어째서 나 혼자만 지독한 운명의 덫에 걸리고 말았던 걸까? 이렇게 될 것을 알았다면 차라리 그녀를 외면해야 했다.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마는 것을, 그녀를 살리려 했던 나의 노력도, 400년 동안의 지루한 삶도 아무런 의미 없게 되어 버리는 것을.

 

 

고향 별로 돌아갈 시간이 임박해 왔지만, 나는 이화를 친정 부모님에게 데려다 주기로 했다. 죽음의 위협에 쫓기는 그녀를 도저히 혼자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그녀가 부모님 곁에서 무사한 모습을 본다면, 고향에 돌아가서도 마음이 좀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비극의 시작이었다. 양반가 규수로서 과부가 된 딸이 낯선 남자를 데리고 친정에 들어선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를 몰랐던 까닭이다. 순진한 이화는 그저 생명의 은인인 내게 작은 보답이나마 하려는 것뿐이었고, 나는 그녀의 집에서 밥 한 끼나 얻어먹고 떠나려는 것뿐이었다. 이 별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끝내면, 그녀와의 추억을 고이 간직한 채 고향으로 돌아갈 일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창자가 뒤틀리는 아픔을 느끼며 눈을 떴을 때, 나는 꽁꽁 묶인 채 어두운 헛간에 갇혀 있었다. 나는 분명 그 집 딸의 목숨을 구해 주었건만, 그 집 주인은 오히려 내 목숨을 거두려 했던 것이다. 그들은 황소 한 마리를 너끈히 죽일만한 맹독을 내 밥에 뿌려 넣었고, 그것을 먹고도 신기하게 죽지 않는 내 모습을 보며 놀라고 있었다. 그 독과 포승줄이 나의 능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UFO는 정확한 시간에 출발해야 했기에 나를 기다려줄 수 없었고, 밤하늘의 차가운 달빛 속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친구들의 모습을 나는 속절없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견딜 수 없는 고통은 그게 아니었다. 이화의 친정 아비는 집안의 명예를 지킨다는 구실로 죄 없는 딸을 죽이려 했고, 어미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 나왔지만 그녀는 정말 갈 곳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 잘난 명예가 무엇이기에 자식의 생명보다 귀했단 말인가? 따지고 보면 가장 추악한 욕심에 지나지 않는 것을, 그들은 가장 고귀한 가치인 양 숭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모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이화의 눈빛을 보며, 슬픔이 무엇인지 모르던 나는 비로소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애써 담담한 척했지만, 슬픔은 이후 400년 동안 견고하게 내 삶을 지배해 왔다.

 

 

이젠 놓여나고 싶다. 삶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견뎌야만 했던 슬픔의 나날들에서, 너무나 시끄러운 이 별 사람들의 질투와 욕심에서 벗어나고 싶다. 호수처럼 고요하고 맑은 내 고향으로 돌아가, 슬픔의 기억 따위는 모두 잊은 채 평화롭게 살고 싶다. 이제 마지막 3개월만 무사히 버티면 되는데, 천송이 그 여자가 죽든 말든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설령 이화가 돌아온다 해도 그녀 때문에 다시 이 곳에 발목이 묶일 수는 없다. 가벼운 눈인사 정도만 나누고 미련없이 헤어져야 하는 것이다. 더욱이 천송이는 서이화가 아닌데, 나는 왜 자꾸만 그녀에게 신경을 쓰는 것일까? 이건 아니다. 외면해야 한다. 모른 쳑 해야만 한다!

 

그런데 나는 거짓말처럼 시간을 멈추고 크루즈 위로 날아가 추락하기 직전의 그녀를 안아 올린다. 12년 전에도 구해주지 말아야 했던 것을, 어차피 그녀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아무리 멈추려 해도 끝내 일어나고야 마는 것을, 아무 소용 없는 줄을 알면서도 나는 또 그녀에게 손을 내민다. 어떻게 된 일일까? 내 머리가, 내 심장이 고장나 버린 것일까? 나는 두려워진다. 400년 동안 24번이나 군대를 가며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 한 가운데서도 두려움을 몰랐던 내가 지금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 이상하게도 천송이 그녀를 보면, 죽음을 앞두고 처연히 미소짓던 이화의 눈빛이 떠오른다. 그 눈빛에 다시 붙잡히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자꾸만 그녀에게 다가서는 내가, 어느 덧 운명의 노예가 되어버린 내가, 나는 두려워 미칠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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