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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 조인성, 슬픔은 또 다른 슬픔으로 잊혀지네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그 겨울, 바람이 분다

'그 겨울' 조인성, 슬픔은 또 다른 슬픔으로 잊혀지네

빛무리~ 2013. 2. 2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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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 남자, 오수(조인성)의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처음엔 돈을 목적으로 오영(송혜교)에게 접근했지만 어느 사이엔가 이용하려던 대상을 사랑하게 되어버린 그 남자... 짧은 시간이라도 마음껏 사랑하고 싶지만 오빠라는 이름으로 다가갔기에 다른 관계의 가능성은 애초부터 차단되어 있는 갑갑하고 슬픈 운명... 그 누구보다도 가감없는 현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기에 오수가 느끼는 공포와 불안, 슬픔과 두려움은 남들보다 훨씬 더 크고 생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가 10년 전에 죽은 옛사랑 문희주(경수진)를 잊지 못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마음까지 짊어지고 살아가니, 오수 이 녀석의 인생도 참 고달프기 짝이 없군요. 아무런 꿈도 목표도 없이 살아 왔지만 이제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서 모처럼 사람답게 살아 보고도 싶어지는데, 눈 앞에는 삶보다 죽음이 더 가까우니 하루 하루의 감정은 더욱 처절해집니다.

 

'그 겨울' 5회의 전반부에서는 얼음처럼 차갑던 오영이 드디어 오수에게 마음을 활짝 열었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돈을 노리고 달려든 가짜라고 생각하더니만, 이제는 정말 친오빠라고 90% 이상 믿게 된 것 같아요. 오수의 손에 이끌려 동창회 파티에 참석하는 등 새롭고 즐거운 체험들을 하면서 조금씩 경계심이 늦춰졌을 때, 오수가 건네준 솜사탕은 그야말로 결정타였죠. 21년 전에 친오빠 오수와 함께 먹던 솜사탕, 나중에 만나면 꼭 다시 사주겠노라 약속했던 것은 바로 솜사탕이었거든요. 죽은 엄마의 방에서 녹화 테이프를 열심히 돌려 본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결코 쉽지 않았을 퀴즈의 정답을 정확히 맞힌 오수의 겜블러 본능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정신없이 바다로 걸어들어가던 오영을 끌어내어 뺨을 후려친 오수의 행동은 염려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즉흥적인 것이었지만, 공교롭게도 오영의 머릿속에 남은 과거의 기억과 정확히 일치하고 말았습니다. "엄마가 물수제비만 뜨랬지, 바다에 들어가지 말고!" 어렸을 때도 수 오빠는 바다에 걸어들어가던 영을 붙잡고 호되게 뺨을 때렸었던 거죠.

 

 

어차피 친오빠든 아니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었지만, 차츰 의심이 걷혀지고 믿음이 생기니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가짜라고 생각할 때도 그와 함께 다니는 것이 자유롭고 즐거웠는데, 이제 친오빠라고 철석같이 믿게 되니 점점 더 좋아지면서 어리광까지 부리고 싶어집니다. 무려 21년만에 다시 만난 한 점 혈육... 지난날의 오랜 기다림과 외로움을 한꺼번에 보상이라도 해주려는 듯, 오빠는 더없이 다정하고 따스합니다. 그녀는 눈 먼 온실 속 화초이기에 위험한 순백의 빛깔을 지녔군요. 아무리 영특해도 아무리 차가워도, 일단 무장해제가 되어버린 그녀는 아이처럼 무방비 상태입니다. 아니, 오영은 벌써 6살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21년 전처럼 오빠와 끌어안고 잠을 자도 아무렇지 않은 모양입니다. 이제 자기는 스물일곱, 오빠는 스물아홉의 어른이 되어 버렸는데도.

 

그녀의 눈부신 흰 빛깔에 자기의 검은 손때라도 묻을까, 오수는 점점 두려워집니다. 오빠 너를 알고 싶은데 나는 보이질 않아서 만져봐야만 알 수 있다고, 네가 떠난 후에도 너를 만졌던 손의 기억이 남아 있으면 덜 외로울 것 같다는 영의 말에, 난처해하던 수도 결국 온 몸을 그녀의 손길에 맡기고 말았죠. 신기하다는 듯 손뼘으로 키를 재고, 팔과 손가락을 만져보고, 발의 크기를 맞대어 보는 등, 오영의 천진한 손길에는 한 방울의 에로틱함도 담겨있지 않았지만, 왠지 그 장면에서는 마치 오수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더군요. 동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는 수의 입장에서는, 영의 존재를 여자로 인식하게 되는 결정적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곧이어 수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허리를 감싸안은 채 "오빠, 가지 마... 내 옆에 있어" 라고 중얼거리며 잠들어 버린 영... 그녀의 어깨를 안고 토닥이며 "네가 가지 말라고 하면, 언제까지든 네 옆에 있을게" 라고 약속하는 수... 그것은 참으로 기이한 베드신(?)이었습니다. 한 점의 노출도 진한 스킨쉽도 없지만 오히려 가슴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벅차게 뛰며, 너무나 따스하고 다정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미어지게 슬픈... 남매이면서 남매가 아닌 오수와 오영의 첫 베드신은 그렇게 이루어졌네요. 그 겨울, 바람에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던 어느 바닷가에서.
 
 

이어지는 5회의 후반부에는 오수의 어두운 과거, 그 중에도 정점을 이루는 슬픈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백합같은 오영에게 빠져들어 까맣게 잊고 있던 그 이름 문희주... 열아홉 살 어린 나이에 당돌한 사랑을 고백하며 부모의 집을 떠나와 오수 곁에 남았던, 붉은 장미같던 희주... 하지만 때이른 임신 소식에 당황한 동갑내기 오수는 그녀를 뿌리쳤고, 그의 오토바이를 쫓아 달려가던 희주는 갑자기 차에 치어 뱃속의 아이와 함께 속절없이 떠나갔지요. 오수 인생의 꿈과 사랑도 그녀와 함께 떠나가고, 애증으로 얽힌 두 사람이 오수 곁에 남았습니다. 문희주를 사랑했던 만큼 오수를 증오하게 되어버린 조무철(김태우), 그리고 얄궂게도 죽은 언니의 남자를 사랑하게 되어버린 문희선(정은지).

 

 

그러잖아도 남자는 첫사랑을 평생 못 잊는다는데, 자기 때문에 눈 앞에서 처참히 피 흘리며 죽어간 희주를 오수가 잊지 못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희주를 깊이 사랑하면서도 그녀가 후배 오수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내색조차 못했던 무철의 마음도 공감이 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 부디 잘 해주라고 당부까지 하면서 보냈건만, 제 아이까지 품은 여자를 냉정히 뿌리쳐서 죽게 만든 놈이니까, 오수를 바라보는 무철의 눈빛에 섬뜩한 증오심이 떠오르는 것도 당연한 일이죠. 문희주를 사랑했던 두 남자의 과거는 그렇게 검붉은 핏빛 슬픔으로 덮여 있었는데.

 

이제 오수의 가슴은 또 다른 빛깔의 슬픔으로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하얀 눈(雪)빛보다 더욱 새하얘서 보기만 해도 눈(眼)이 시린, 오영의 슬픔이 오수의 가슴을 비집고 들어옵니다. 비록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지만 희주의 슬픔에는 미래의 꿈도 있고 열정도 있었는데, 현재 진행중인 오영의 슬픔에는 예정된 시간이 너무 짧아서 꿈도 열정도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네요. 뇌종양이 재발한 듯 최근 잦아지는 두통 속에, 오영은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합니다. (사실 저는 뇌종양이 아니길 바랐는데, 그래서 차라리 왕지혜가 독을 써서 오영의 눈이 먼 거라고 믿었는데, 실명의 원인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뇌종양에 걸렸던 것은 사실인가봐요..;;) 21년만에 재회한 오빠와 또 헤어져야 하는 영은, 수에게 남겨줄 마지막 선물로 돈보다 귀한 자신의 모습을 담아두려 합니다.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그저 남은 시간 동안 오빠 너와 함께 지금처럼 즐겁게 지내고 싶다고, 보이지 않는 눈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며 담담한 미소로 말하는 영.

 

 

문희주의 제삿날을 잊어버린 죄로 조무철에게 피터지게 얻어맞고 돌아온 수는, 무철이 차갑게 웃으며 전해 준 작은 약병을 바라봅니다. 빠르고 정확하게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음에 이르게 하고, 그 약효는 감쪽같아 사체 부검에도 걸리지 않는다는 신비의 명약(?)... 오수 네가 먹든가 아니면 가짜 동생 영이에게 주라고 무철은 말했죠. 이미 수의 마음이 영에게 기울었다는 것을 눈치챈 듯, 무철은 잔인하게 두 사람의 목숨을 놓고 저울질함으로써 수를 더욱 괴롭히려 한 것입니다. 수는 집에 돌아와서도 희주에 대한 죄책감으로 몸부림치고, 영은 차분히 그의 머리를 가슴에 안고 위로해 주다가 우연인 듯 발치에 떨어진 약병을 줍고 묻습니다. "이건 ... 뭐?" 

 

"친구놈이 어렵게 구한 약인데, 죽고 싶을 때 먹으면 괴로움도 고통도 절망도 한순간에 사라지면서 마음이 아주 편해진대..." 얼음처럼 희고 투명한 오영의 얼굴은 기본적으로 아무런 표정이 없죠. 오수와 함께 밖에 있을 때는 활짝 웃기도 하고 소리치며 울기도 하지만, 새장에 갇힌 새처럼 집 안에 있을 때는 항상 조각같은 무표정입니다. 그런데 약병의 정체에 관해 답하는 수의 말을 들었을 때, 영의 담담한 표정에는 순간 안도의 빛이 스치네요. 송혜교의 미묘한 눈빛과 표정 변화는 그야말로 일품이었습니다. "그런 약이... 정말 있어?" 마치 한 줄기 구원의 빛이라도 발견한 듯, 간절히 그렇다고 답해 주기를 바라는 모습... "그럼" 수가 긍정의 대답을 하자, 영이 부탁합니다. "그럼 이거, 나 줘!"

 

 

"그럴까? ...그냥 이거, 너 줄까?" 수가 묻자, 영은 서슴없이 대답합니다. "응!"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어서, 그 어떤 희망이나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아서, 오영의 새하얀 슬픔은 희주의 붉은 슬픔보다 더욱 깊게 느껴집니다. 하림의 노래 중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 라는 유명한 곡이 있지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수라는 인물의 사랑에는 과거에나 현재에나 슬픔만 가득할 뿐이라. 차라리 '슬픔은 또 다른 슬픔으로 잊혀지네' 라고 하는 편이 맞을 듯합니다. 오영의 슬픔이 벌써 과거를 밀어내고 오수의 가슴을 절반 넘게 채웠으니, 이제는 78억을 단숨에 얻어낼 수 있다 해도 그녀를 해칠 수 없을 거예요. 그 겨울의 바람은 점점 더 세차게 불어오고, 사랑보다 짙은 그들의 슬픔도 나날이 비감한 아름다움을 더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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