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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 오영(송혜교),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그 겨울, 바람이 분다

'그 겨울' 오영(송혜교),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빛무리~ 2013. 3. 1.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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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 겨울, 바람이 분다'를 보면서 여주인공 오영과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송혜교에게 점점 더 빠져들고 있습니다. 조인성이 열연하고 있는 남주인공 오수도 물론 아찔하게 매력적이지만, 솔직히 그 캐릭터의 설정 자체는 비교적 평범하고 식상하거든요. 어려서 부모에게 버림받고 지독한 가난과 외로움 속에 성장했으며 아픈 사랑의 상처까지 간직한 청춘 부랑아... 더 이상 밑바닥으로 내려갈 것도 없으니 아무런 희망도 없이 되는대로 살아가던 중, 운명처럼 구원의 여인을 만나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가는 남자... 이건 숱한 영화와 드라마와 책 속에서 닳도록 보았던 주인공이죠. 

 

 

하지만 오영이라는 여자는 지금껏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신선한 캐릭터라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네요. 그녀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온통 눈과 귀에 신경이 집중됩니다. 지금 영이가 어떤 말을 하는지,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주의깊게 보고 들으며, 하나하나 소중히 간직하고 싶어지는 마음이에요.

 

가난하지만 밝고 명랑한 캔디스타일[ex : '옥탑방 왕세자'의 박하(한지민)]이거나, 돈이 너무 많아서 싸가지를 챙기지 못한 부잣집 상속녀 스타일[ex : '환상의 커플' 나상실(한예슬)]이거나, 무서운 야망으로 신분상승을 꾀하는 악녀 스타일[ex : '야왕'의 주다해(수애)]이거나, 이제껏 드라마의 여주인공은 대략 세 종류로 구분되었습니다. 물론 가끔씩 예외의 경우는 있었죠. '돈이 많다'는 설정에 기반을 두고 교집합을 찾아 본다면, 부잣집 딸이면서도 건강한 개념녀였던 '골든타임'의 강재인(황정음)이 있었고, 구체적인 예는 생각 안 나지만 오영과 비슷한 외로움에 시달리던 상속녀 캐릭터도 몇몇은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오영만큼 처절한 고통과 외로움에 꽁꽁 갇혀 살아온 공주님은 없었고, 오영만큼 순백의 천진난만함을 그대로 간직한 캐릭터도 없었습니다. (발달장애나 정신이상 캐릭터는 제외) 그런 와중에도 오영처럼 타인에 대해 깊은 이해심과 포용력을 지닌 여주인공은 더욱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1. 제발 오빠 너만은 내가 믿어도 된다고 말해 줘

 

 

분명 이 세상은 '돈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세상인데, 심지어 돈 보고 덤비는 것마저 '그것도 사랑' 이라고 우기는 사람들까지 나타나는 세상인데, 이렇게 '사랑'의 가치와 개념조차 '돈'과 끈적하게 얽혀서 희미해지고 더러워진 세상인데, 놀랍게도 어떤 사람에게는 그 '돈'이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것일 수 있음을, 오히려 그 '돈'이 최대의 비극이며 올가미일 수 있음을, '그 겨울'의 여주인공 오영은 생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영은 여섯 살 어린 나이에 부모의 이혼으로 엄마와 오빠를 잃고, 하필이면 그 해에 뇌종양까지 걸려 차가운 수술대 위에서 생사의 고비를 오갔고, 얼마 후에는 R.P(retinitis pigmentosa : 망막색소변성증)까지 발병하여 시력을 잃고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불쌍한 영이의 곁을 아빠가 굳건히 지켜주었다면 좋았으련만, 신데렐라 아버지나 콩쥐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영이 아버지 오회장도 집안 사정에는 깜깜했던 모양이에요. 정식 새엄마도 아니면서 팥쥐 엄마보다 더 냉혹한 왕비서 왕혜지(배종옥)는 영이를 감옥같은 집안에 꽁꽁 가두고 아무도 그 곁에 머물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영이의 눈이 멀게 된 원인도 사실은 왕혜지에게 있었습니다. 영이의 망막색소변성증은 초기에 수술과 치료를 병행하면 호전될 가능성도 있었는데, 왕혜지는 남몰래 의사를 매수하여 말을 바꾸게 하고 오회장에게 딸의 병을 속였죠. 오회장이 알기만 했더라면 수천억을 들여서라도 딸의 눈을 고쳐주지 않았을까만, 등잔 밑이 어둡다고 왕혜지의 농간에 속절없이 넘어갔던 겁니다. (설마 비디오로 남긴 영이의 일기장 내용이 근거없는 헛소리는 아니겠죠. 아직 왕비서의 정체가 확실히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정황상 그녀가 선역일 가능성은 극히 미미하다고 봅니다.)

 

"왕비서, 미안하지만 오늘로 끝이 아니야. 난 혼자가 아니니까. 나한텐 오빠가... 나한텐 오빠가 있어! 오빠가 오면, 날 이렇게 만든 당신 가만두지 않을거야!" 교복을 입은 채 화면 속에서 오열하는 영이... 하지만 그녀가 마지막 희망으로 간절히 기다려 온 친오빠 오수는 이미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지 오래입니다. 지금 영이 곁에서 그녀를 지켜보는 오수는 오빠와 동명이인일 뿐 오빠가 아닙니다. 원래는 돈을 목적으로 그녀에게 접근한 하이에나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하도록 아파오는 영이의 불행에, 오수의 타고난 여린 마음이 흔들립니다. "나는 내 옆의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어. 제발 오빠 너만은 내가 믿어도 된다고 말해 줘!" 눈물로 애원하는 영이의 모습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은, 이미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2. 우리 MT 가자. 친구들 다 불러서 같이 가자!

 

 

처음에는 차갑게 닫혀있는 그 마음의 문이 쉽사리 열리지 않을 듯 싶더니만, 오수와 희선(정은지)과 진성(김범)이 힘을 합쳐 꾸며낸 한 편의 치밀한 사기극에 의외로 쉽게 속아넘어간 오영은 마음의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가끔씩은 영이가 수의 정체를 눈치채고도 모른체 하나 싶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여섯 살 이후로 눈이 멀어버린 데다가 왕비서가 만든 감옥에 꽁꽁 갇혀 사느라 성장이 정지되어 있던 오영은 이미 스물일곱 살의 원숙한 아가씨가 되었지만 그냥 어린애입니다. 차가운 껍데기가 벗겨지니 더없이 따스하고 여린 내면이 드러나는군요.
 

스물일곱 살이면서 동시에 여섯 살인 영이는 참 하고 싶은 게 많습니다. 비록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온 몸의 다른 감각들을 통해서 보고 싶은 것도 많고, 가고 싶은 곳도 많습니다. 심각한 이야기를 하다가도 놀러가자고만 하면 너무 좋아서 폴짝폴짝 뛰기라도 할 기세입니다. 오수에게 마음을 열자 덩달아 그 친구들까지 좋아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정체모를 침입자들인데, 특히 말 한 마디 곱게 던지지 않는 까칠한 희선이는 싫어할 법도 하건만, 그저 오빠가 데려온 친구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믿고 좋아합니다.

 

 

 

정말 속속들이 나쁜 놈한테 걸렸으면 어쩔 뻔했나 싶어 가슴을 쓸어내리게 되는, 영이는 순백의 천진난만한 어린애입니다. 하지만 희선이의 말처럼 오수는 '완전 나쁜 놈이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지요. 바람둥이에 거짓말도 꽤 잘하고 성질도 못돼 처먹었고 이기적이지만 왠지 그게 오수의 전부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는, 사실은 착한 놈이니까요. 

 

3. 사람이 사람한테 해줄 수 있는 건 용서가 아니라 위로야

 

영이의 가슴속에 천천히 불어오는 따뜻한 사랑의 바람... 그 바람을 일으키는 남자가 오빠와 동명이인인 오수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끼는 걸까요? 분명 진실을 알고 있는 건 아닌 듯한데, 영이는 이상하게도 그 남자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오수 이야기 좀 해 줘. 그 사람의 '수'자는 무슨 '수'자야? 오빠 너처럼 지킬 수? 아니면 빼어날 수?" 참 별 게 다 궁금합니다. 자기 아닌 척하고 자기 이야기를 하려니 은근 찔리고 켕기는 오수는 자꾸 피하려 하지만, 어린애같은 영이의 집요함에 결국 두 손 들고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는군요.

 

"어릴 때 엄마가 나무 밑에 버리고 갔대. 그래서 나무 수(樹)... 그래도 꼭 한 번 엄마를 본 적은 있다지. 열 몇 살 때 학교 앞에 불쑥 나타나 오만 팔천원을 쥐어주고 가더래. 그게 끝" 보이지 않는 눈을 반짝이며 듣고 있던 오영이 말합니다. "안됐다. 그래서 그 사람은 마음의 상처 때문에 사기꾼이 됐나?"

 

 

오수는 자기 인생을 비웃으며 대답합니다. "핑계 좋네. 그놈은 원래 그런 놈이야. 태생부터 쓰레기 같은 놈... 사랑하는 여자가 자기 애를 가졌다고 하는 순간 야멸차게 뒤도 안 돌아보고 여자를 버렸대. 그러다가 그 놈을 뒤따라오던 여자는 그만 사고로 죽었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야." 그러자 영이는 마치 오빠를 타이르듯, 꾸중하듯 말합니다. "네가 뭔데 그 사람을 용서해. 사람이 사람한테 해줄 수 있는 건 용서가 아니라 위로야."

 

괜찮다고, 안 무서운 거라고, 울지 말라고, 넌 이길 수 있다고... 사람들이 위로랍시고 건네는 말들이 사실은 위로가 아니라 용기를 강요하는 잔인함이었다고 영이는 말합니다. 안 괜찮아도 돼. 무서워해도 돼. 울어도 돼... 여섯 살 나이로 뇌종양에 걸렸을 때, 영이가 원했던 것은 이런 위로였어요. 하지만 영이는 마음껏 무서워할 자유와 실컷 울어버릴 자유마저 박탈당했던 거죠. 엄마의 품에 안겨 벌벌 떨면서 엉엉 울기라도 했더라면 속에 응어리는 지지 않았으련만, 나이에 걸맞지 않는 씩씩함과 용기를 강요당하며 모진 투병을 견뎌냈던 겁니다.  

 


 
"그 사람도 나 같지 않았을까? 기억도 못할 나이에 나무 밑에 버려졌는데... 어쩌다 나타난 엄마는 고작 오만 팔천원을 주고 떠났는데... 그것도 모자라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한 여자를 어린 열 아홉 살에 영원히 잃어버렸는데, 아무한테도 위로받지 못했잖아." 세상 그 누구도, 가장 친하다는 후배 진성이마저도 오수를 이토록 깊이 이해해주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친한 형이니까 무조건 편들어 주었을 뿐, 오수의 마음이 어땠을지, 어떤 고통에 시달려 왔을지를 일일이 헤아리며 공감하기에는 무딘 녀석이거든요. 그런데 이제 고작 만난지 한 달 남짓한 가짜 동생 영이가, 눈도 보이지 않는 이 아이가 오수의 아픔에 아주 가까이 다가섭니다. 어린애답게 주저하지도 않고 성큼성큼 다가섭니다.

 

"그래도 아이를 책임지지 못한 건 잘못이야!" 아직 자기를 용서할 수 없는 오수는 악을 쓰듯 외쳐 보지만, 영이의 잔잔한 미소와 평온한 눈빛은 한치의 흔들림이 없군요. "잘못이지 아주 큰 잘못... 하지만 그 사람은 자기도 책임질 수 없는 열 아홉이었어. 그 나이에 자기 인생을 꼭 빼닮을 것 같은 아이는 많이 무서웠을 거야." 고통뿐만 아니라 두려움까지도 그녀는 수와 함께 느껴주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너무 오랜 외로움 속에 방치되었던 어린아이를, 솜사탕 한 입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놀러가자고 매달리는 이 아이를, 내 깊은 상처에 약을 살살 발라주고 행여 덧날까 입김까지 호호 불어주는 이 아이를 어떻게 감싸안지 않을 수 있을까요? 사랑은 불가항력이었습니다. 지울 수 없는 상처로 희주를 떠나보냈던 오수에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오영의 존재는 최고의 행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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