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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무조건적 선의보다는 이유있는 악의가 낫다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마의

'마의' 무조건적 선의보다는 이유있는 악의가 낫다

빛무리~ 2012. 10. 3.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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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는 감독의 역할이 절대적이지만, 상대적으로 드라마에서는 작가의 역할이 매우 큽니다. 영화 시나리오는 연출자인 감독이 직접 쓰는 경우도 많지만, 드라마 대본은 전문 드라마 작가가 아닌 이상 쓰기 어렵죠. 영화에서의 '스토리'가 영상미나 배경음악 등과 마찬가지로 작품의 여러 가지 구성 요소 중 하나에 불과하다면, 드라마에서는 '스토리'가 작품 전체의 80% 이상을 좌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스토리의 비중이 높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이 절대적인 원칙은 아니며 예외의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장르의 특성이 그러한지라 저는 드라마를 선택할 때 연출자보다는 작가의 이름에 더 주의를 기울이는 편입니다.

 

'허준'과 '대장금'의 눈부신 대성공에 힘입어, 1944년생의 노익장 이병훈 감독은 이 시대 퓨전사극(고증에만 몰두하는 교과서 같은 역사물, 딱딱하고 지루한 느낌을 주던 정통 사극에서 벗어나, 기발한 상상력과 화려한 감각, 탄탄한 극작법으로 무장한 새로운 사극을 지칭하는 용어)의 열풍을 선도하는 대표주자가 되었습니다. '허준'(1999)과 '상도'(2001)는 최완규 작가와 함께 했고, '대장금'(2003)과 '서동요'(2005)는 김영현 작가와 함께 했었죠. 이 때까지 작품들의 시청률을 살펴보면 '대박-중박-대박-중박'의 형상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허준'보다 '상도'가 좋았고 '대장금'보다 '서동요'가 좋았다는..^^)

 

 

하지만 김이영 작가와 손을 잡으면서부터 '대박-중박'의 법칙은 깨지고 말았으니, 이병훈 감독이 은퇴를 앞두고 야심차게 제작했던 '이산'과 '동이'가 모두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거두면서 아쉬운 중박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없지는 않겠으나, 대본이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는 드라마의 특성상 1차적인 원인은 작가에게 있다고 생각되는군요. 제가 보기에 김이영 작가의 가장 큰 문제는 뒷심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초반에는 스토리 구성도 제법 탄탄하고 각 인물 캐릭터의 개성적 매력도 충분히 어필하면서 굿 스타트를 선보이지만, 중반쯤 접어들면서부터는 급격히 힘이 딸리는 양상을 숨기지 못하더군요. 스토리는 점점 짜임새를 잃어가며 우연의 행운이나 주인공의 원맨쇼에 의지하는 경향이 엿보이고,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때도 기존 인물과 겹쳐지는 어정쩡한 캐릭터로 인해 서로의 매력을 깎아먹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 김이영 작가는 소녀적 감수성이 지나치지 않은가 싶습니다. 그렇다 보니 후반에 치달을수록 무게감이 점점 더 부족해지며 드라마는 새털처럼 가벼워져 버리곤 하죠. '이산'은 사도세자의 죽음이라는 실제 역사에서부터 장중하고 비감하게 출발했으나, 중반 이후 정조(이서진)와 성송연(한지민)의 멜로가 일종의 순정만화처럼 진행되면서 점점 다른 장르(?)로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동이'의 남주인공 숙종(지진희)는 초반에 '깨방정 임금님'으로 신선한 캐릭터를 선보이며 인기를 끌었지만, 나중에 등장한 심운택(김동윤)마저 비슷한 깨방정 캐릭터로 설정되니 퀄리티가 급격히 하락하며 식상해지더군요. 마치 '캔디'처럼 온갖 역경 속에서도 밝게 살아가던 여주인공이 따뜻하고 순수한 왕자님을 만나 신데렐라가 되는, 70년대 순정만화의 공식같은 전개가 '이산'과 '동이'에서 반복된 것도 소녀적 감수성에서 기인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어쩌면 이병훈 감독의 은퇴작이 될지도 모른다는 '마의'는 과거 '허준'과 '대장금'의 대박 신화를 이어받으며 찬란한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을까요? '대장금'이 2003년작이니 벌써 근 10년 동안 대박의 짜릿한 손맛을 못 보고 지내온 터라 노익장의 가슴도 적잖이 목말라 있으리라 예상됩니다만, 김이영 작가의 작품이 언제나 그렇듯 출발은 제법 산뜻했습니다. 1회에서는 전노민, 장영남, 정겨운 등의 믿음직한 배우들이 카메오로 등장하여 윗세대에서 심겨진 갈등의 씨앗을 멋지게 표현해 주었고, 2회에서 등장한 아역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습니다. 남녀 주인공 백광현과 강지녕의 첫 만남도 짜임새 있게 잘 그려졌고요. 게다가 이 작품의 남주인공은 '왕자님'이 아니므로 여주인공이 신데렐라가 될 가능성도 전혀 없다는 설정이 꽤나 고무적입니다.

 

하지만 김이영 작가는 과연 뒷심 부족과 소녀적 낭만이라는 족쇄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감독의 애타는 갈망을 채워줄 수 있을까요? '마의' 1~2회는 상당히 역동적이고 흥미진진했으나, 약간 불안한 마음으로 시청했기 때문인지 제 눈에는 적잖은 위험요소가 눈에 띄기도 했는데, 그 중에도 가장 우려되는 것은 주인공 백광현의 두 아버지가 지나치게 선량한 인물로 등장한 것이었습니다. 광현의 생부 강도진(전노민)은 양반 출신이지만 그저 의술이 좋고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게 즐거워서 스스로 신분을 낮추고 중인계급에 해당하는 의원이 되었지요. 그는 타고난 정의감으로 소현세자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려다가 결국 목숨을 잃고 마는데, 죽음 직전 백석구(박혁권)에게 무조건적 선행을 베풂으로써 아들 광현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운명처럼 광현의 양아버지가 된 천민 백석구는 그야말로 재수가 없어서 살인사건 현장을 목격했다가 만삭의 아내와 함께 쫓기는 신세가 되었더랬습니다. 의원 이형익은 소현세자의 죽음과 깊은 연관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실존 인물인데, 이 드라마에서는 침을 놓아 사람을 죽이는 법을 연구하기 위해 연습삼아 살인까지 저지르는 악마같은 인물로 설정되었군요. 인조 임금으로부터 밀명을 받은 이형익은 소현세자를 침술로 살해하기 전에 완벽한 준비를 갖추고자 천민 두 남자를 실험 상대로 끌고 왔는데, 그 중 한 사람은 희생양이 되었지만 나머지 한 사람은 몰래 눈을 뜨고 그 장면을 지켜본 후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가 바로 백석구였지요. 하지만 함께 도망치던 아내는 임신중독증이 악화되어 쓰러졌고, 마침 의원 강도진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백석구는 아내와 아이를 한꺼번에 잃어야만 했을 겁니다.

 

강도진의 뛰어난 의술로도 아내는 살릴 수 없었지만, 살아 숨쉬는 딸자식을 품에 안을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백석구는 강도진을 평생의 은인으로 여기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은혜를 갚기 위해 백석구가 선택한 방식은 너무도 극단적이었습니다. 강도진이 갑작스레 역모의 누명을 쓰고 처형된 후 그의 아내는 유복자로 아들을 출산하는데, 그 아기는 대역죄인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태어나자마자 죽을 위기에 처합니다. 그러자 백석구는 며칠 전에 태어난 자기 딸과 강도진의 아들을 바꿔치기함으로써 은인의 아들을 살리는군요. 여자아이일 경우는 관비가 될지언정 죽음은 면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천민 계집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백석구입니다. 제 자식을 제 손으로 키우지 못하고 남의 손에 맡겨야 한다는 것도 애간장 끊어지는 일인데, 그 가엾은 핏덩이는 최소한의 바람막이가 되어줄 부모조차 없이 어딘가의 관비로 보내졌습니다. 사시사철 밤낮없이 고된 노동으로 혹사당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어린 시절부터 양반상놈을 막론하고 온갖 사내의 노리개가 될 것이 뻔한데, 딸을 살려준 강도진의 은혜를 갚는다면서 정작 그 딸을 죽음보다 나을 것 없는 험한 삶 속으로 던져버린 백석구의 선택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이렇게 되면 은혜라고 할 것이 뭐가 남았습니까? 오히려 백석구가 강도진에게 베푼 은혜가 훨씬 더 커진 셈이지요.

 

하지만 백석구는 강도진을 여전히 은인으로 여기며 그가 남긴 광현을 자기 아들삼아 키웁니다. 죽은 강도진의 뒤를 이어 훌륭한 의원이 되게 하기 위해 어려운 형편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으면서 말이죠. 친아비라도 그렇게는 못할 만큼 지극정성이니, 백석구는 죽은 강도진 못지 않게 무조건적 선의를 지닌 인물이네요. 강도진이 아무 이유 없이 백석구를 도와주었던 것처럼, 백석구도 아무 이유 없이 강도진의 아들을 지켜 왔으니까요. 물론 현실에도 그처럼 선량한 사람들은 존재합니다. 오히려 현실에서는 이렇게 무조건적인 선의야말로 험한 세상을 살만하다 여기게 해주고 어둠을 밝혀주는 가장 소중한 것이지요. 하지만 드라마는 현실과 다릅니다. '원인 없는 결과'로는 설득력을 확보할 수 없고, 따라서 시청자의 공감을 끌어내기 어려워요.

 

 

솔직히 저는 강도진과 백석구의 선량한 캐릭터를 보면서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이구나... 억울하게 죽었으니 안타깝구나..." 그저 머릿속으로만 생각했을 뿐 가슴이 울리지 않더라는 거죠. 친부와 양부의 캐릭터가 모두 그러하니, 강도진의 피를 물려받고 백석구의 손에 길러진 백광현(조승우) 역시 두 아버지처럼 정의롭고 무조건적 선의를 지닌 인물로 성장하리라 예측됩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이것이 '마의'를 위협하는 커다란 함정이에요. 시청자의 공감을 끌어내기에는 무조건적 선의보다 차라리 이유있는 악의가 더 낫거든요.

 

'마의' 1~2회를 시청하는 동안 제 가슴을 가장 크게 울린 캐릭터는 놀랍게도 악역 이명환(손창민)이었습니다. 물론 배우의 노련한 연기도 한 몫을 했겠지만, 친구를 배신하지 않으면 자기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절체절명의 갈등 속에서 이기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명환의 선택에는 충분한 공감이 되었거든요. 더구나 천민 마의의 아들로서 인간 대접도 못 받고 살다가 기적처럼 내의원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친구와의 의리를 지킨답시고 현재의 꿈 같은 삶을 차마 포기할 수 없었던 심정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괴로움에 부들부들 떨면서도 친구를 죽음으로 몰아가던 이명환의 모습은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인간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아무 이유 없이 남을 도와주며 자신을 희생하는 강도진과 백석구의 캐릭터보다는, 이명환의 캐릭터가 훨씬 입체적으로 잘 만들어진 것이죠.

 

 

12년 후, 임금 효종은 무슨 까닭에서인지 오래 전에 죽은 형 소현세자의 죽음에 의문을 갖고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자기 손으로 세자를 살해했던 이형익은 혼비백산하고 말았지요. 당시 실세이며 그 사건의 배후였던 소용 조씨와 김자점은 처형당해 죽었고, 진실을 알면서도 묵과해 주었던 선왕 인조 또한 승하한지 오래이니, 이제 와서 명을 받은 하수인에 불과했다고 주장해 봤자 아무도 이형익을 보호해 줄 사람이 없었거든요. 연습 살인의 목격자 백석구를 끝내 놓친 것은 이형익을 더욱 불안하게 합니다. 당시 대화를 엿듣고 최종 살해 목표가 소현세자라는 사실을 그놈이 알게 되었다면 명백한 증인이 남아있는 셈이니까요.

 

다급해진 이형익은 공범이었던 이명환에게 죄를 덮어씌우고 혼자 빠져나갈 계책을 꾸며 보았지만, 오히려 잽싸게 알아차린 이명환의 덫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인과응보, 이형익은 자기가 남을 살해했던 방식 그대로 침술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되었네요. 그런데 냉혹한 얼굴로 이형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이명환의 대사가 이상할 만큼 가슴에 아프게 꽂힙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했었지. 만약 그 때 당신이 나를 옭아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럼 내 유일한 벗과 내 정인이었던 여인... 난 그 두 사람을 잃지 않았을까? 그 두 사람은 여전히 내 곁에 남아 있었을까? 아니, 아니었을 거요. 난 결국 이리 되었을 거야. 이 편이 더 어울리거든!"

 

 

김이영 작가는 전체적인 구성 능력보다 대사 등의 디테일이 매우 강한 편이죠. 친구를 배신하고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죄책감... 그로 인해 사랑하던 의녀 장인주(유선)마저 잃었다는 괴로움... "네가 살려면 다른 도리가 없다"고 유혹하며 자기를 끔찍한 범죄로 이끌어들였던 이형익에 대한 분노와 증오... 지난 12년 동안 이명환의 마음을 끈덕지게 괴롭혀 왔던 모든 감정들이 몇 마디 대사에 그대로 녹아들어 있었습니다. 특히 "난 결국 이리 되었을 거야. 이 편이 더 어울리거든!" 라는 부분에서는 끝없는 고통에 시달리다 점점 인간의 본성을 잃고 악마가 되어가는 사람의 자학적 감정이 생생히 느껴졌죠. 훌륭한 대사였습니다.

 

'마의'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캐릭터의 다이내믹한 입체성을 악역보다 주인공에게 입혀 주어야 합니다. 만약 주인공 백광현이 두 아버지처럼 무조건적 선의를 지닌 평면적 인물로 성장한다면 '마의'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을 거예요. 아무쪼록 드라마는 '인과관계'의 예술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인물에게 골고루 신경쓸 수 있다면 최선이지만 그게 어렵다면, 최소한 주인공의 말과 행동만이라도 촘촘한 인과관계 속에 짜여져 있어야 해요. 다시 분명히 말하지만, 드라마 속에서는 무조건적 선의보다 이유있는 악의가 낫고 '우연'이라는 설정은 작품을 수렁에 빠뜨리는 첩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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