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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 나무' 사대부의 모순, 그 비뚤어진 분노가 무서운 이유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뿌리깊은 나무

'뿌리깊은 나무' 사대부의 모순, 그 비뚤어진 분노가 무서운 이유

빛무리~ 2011. 12. 1.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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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한석규)의 한글 반포를 막으려는 정기준(윤제문)과 밀본의 계략은 일단 성공한 듯 보입니다. 반촌 노비 서용이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급제를 하고 성균관 유생 박세명의 투신 자살 사건이 일어나면서, 한글에 대한 사대부의 저항은 극에 달했습니다. 반포되기도 전에 곳곳에 피가 뿌려지고 사람의 목숨이 오가는 살벌한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이토록 심각한 문제인 줄 모르고 그저 단순하게만 생각했던 강채윤(장혁)의 놀라움은 컸습니다.  "모두가 글자를 안다는 것이... 그렇게 사대부를 분노케 하는 거야? 자기 목숨을 내버릴 만큼?"

역사적으로 보아도 그렇거니와 드라마의 전개 상황을 보아도 어차피 밀본은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당당하게 내세우는 대의는 사실상 근본적으로 모순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의정 이신적(안석환)은 정기준에게, 눈엣가시와도 같은 집현전을 철폐시킬 수 있었던 유리한 거래를 취소하면서까지 한글 반포를 막은 이유를 묻습니다. 그에 대한 답변으로 정기준의 피를 토하는 듯한 연설이 시작됩니다.

"사대부가 왜 사대부냐? 선비들이 관료가 되어 나라를 지배하게 된 데는 유학을 아는 것이 중요했다. 한자를 아는 것이 핵심이었어. 그래서 우린 전조 고려의 귀족들처럼 세습으로 혈통으로 나라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야. 과거를 통해 실력으로 뽑힌 사대부들이 조정을 운영한다. 그것이 조정의 이상이야. 모르겠는가? 글자와 권력은 뗄래야 뗄 수가 없는 것이야. 헌데, 글자가 반포된다면 그 뿌리가 흔들리는 것이다. 글자라는 권력이 모두에게 나누어지고 질서는 무너지고 나라는 혼돈 속으로 들어가는 게야."

그 당시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워낙 신분제가 견고히 박혀 있었기 때문에 쉽게 알아차릴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면, 저 말 속에 엄청난 모순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우선 정기준은 혈통이 아닌 실력 위주로 조정의 관료들이 뽑힌다는 원칙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조 고려보다 조선이 우월한 나라라고 확신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그의 말은 앞선 논리를 전면으로 부인하고 있습니다.

글자라는 권력이 모두에게 나누어지면 질서가 무너지고 나라가 혼돈에 빠진다는 것은 대체 무슨 근거입니까? 혈통이 아니라 실력으로 뽑힌 사대부들이라면서 기껏 잘난체 하더니만, 어째서 그 실력을 갖출 기회가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주어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까? 왜 누구는 글자를 익혀도 되는데, 왜 누구는 안 됩니까? 왜 누구는 권력을 가져도 되는데, 왜 누구는 안 됩니까? 극소수 특권 계층만이 글자와 권력을 독점해야 한다면, 그런 사고방식이야말로 혈통과 세습을 가장 중요시하는 게 아니고 뭐겠습니까? 겉으로는 고고한 척하면서 전조 고려의 제도를 흉보고 있지만, 속은 그보다 더 썩어 문드러져 있는 위선의 극치를 정기준은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위선자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기 자신이 비뚤어졌다는 사실 자체를 좀처럼 깨닫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약간 옆으로 새는 이야기지만 '승승장구'에 출연한 가수 임재범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최근 혼자서 많은 생각을 하며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았더니 알게 된 사실이 있답니다. 속으로는 돈과 명예와 인기 등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으면서, 그 동안 겉으로는 아닌 척, 초연한 척하고 살아왔다는 거였습니다. 그렇게 자기 안의 솔직한 욕망을 부인하고 거짓된 모습으로 살았기에 더욱 힘겨웠던 것 같다고, 쉰을 앞둔 중년의 남자는 이제야 소탈하게 털어놓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자신을 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긴 합니다.

그러나 임재범처럼 자기 자신의 인생에만 국한된 경우는 훨씬 낫습니다. 정말 심각한 것은 잘못된 사회를 바로잡아 보겠다고 열정적으로 뛰어든 사람들이 정작 자기 내면의 문제점은 들여다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현실입니다. 정기준은 지금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옳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습니다. 그를 추종하는 밀본 세력도 물론 마찬가지이고, 밀본이 아닌 사대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사대부의 위상이란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신성한 가치이겠으나, 편견의 들보를 걷어내고 다시 생각해 보면 자기들끼리 권력을 독점하고자 하는, 지극히 유치한 이기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강채윤은 이미 세종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도담댁(송옥숙)에게 설득당한 척하고 밀본의 일에 협조하기로 한 것은 정기준을 잡아다가 세종에게 바치기 위한 술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정기준은 강채윤을 설득하여 밀본에 잠정 합류시켰다고 진짜로 믿는 중이지요. 그리고 애제자 강채윤의 이름을 들먹임으로써, 북방에 은둔하고 있던 조선제일검 이방지(우현)를 한양으로 불러내는 데까지 성공합니다.

"채윤이가 진정 밀본이 되었는가? 자네가 정기준임을 아는가? (아직 모른다고 정기준이 대답하자...) 결코 알게 하지 말고 끼어들게 하지 마라. 겉으론 강한 척 독기를 내뿜지만 약하디 약한 아이야. 정치의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되는 아이지.." 저는 지금껏 이방지가 그토록 강채윤을 사랑하는 줄 몰랐는데, 제자를 진심으로 아끼는 그 마음이 참으로 애틋하고 감동적이더군요. 하지만 오히려 강채윤은 그런 스승에게 거리를 두고 자기 속마음을 철저히 숨겼던 듯 합니다. 그 복수의 칼끝이 세종 이도를 향하고 있다는 정기준의 말에 이방지가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을 보면 말이죠.

밀본의 이념과 자기의 신념에 위험한 확신을 갖고 있는 정기준은 이방지를 자극하며 설득해서 끌어들이려 합니다. "재주와 학식을 가지고도 세상을 버리고 너처럼 고고하게 은둔하는 거... 그게 가장 비열한 삶이 아닌가?" 그러나 이방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대답합니다. "네놈이 어떤 조선, 어떤 정치체제를 만든다 해도 누군가는 빼앗고 누군가는 빼앗기지. 누구는 짓밟히고 누구는 짓밟지. 윗것들은 대의를 말하지만 다 그게 그거야. 결국 개헛소리..." 비록 거칠고 단순하기 이를 데 없지만, 제게는 정기준의 유창한 언변보다 이방지의 저 말이 훨씬 더 인상적으로 다가오더군요.  

한 때 정도전의 호위무사였던 이방지가 무슨 계기로 그와 같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태종 이방원이 정도전 일파를 숙청하던 무인정사(戊寅定社)의 그 날 밤, 이방지는 정도전의 곁을 지키지 못했고 결국 정도전은 속절없이 피를 뿌리며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밀본 세력은 와해되었고, 그 후 24년 동안 어둠 속에서 칼을 갈며 기회를 엿보게 되었지요. 이방지가 정도전의 곁을 지켰더라면 아마도 정도전은 죽지 않았을 것이고, 조선의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정기준은 말합니다. 이방지, 네가 조선의 역사를 망쳤다면서 말입니다.

이방지를 정도전의 곁에서 떼어놓은 것은 태종의 심복이었던 조말생(이재용)의 계략이었습니다. 조말생은 이방지가 정도전의 첩실 중 한 명을 사랑하고 있다는 약점을 알아내어, 거사가 있던 날 밤 그녀를 납치함으로써 이방지를 유인했던 것입니다. 이방지는 주군의 곁을 떠나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러 달려갔으나, 그녀는 이방지로 하여금 자기를 버리고 정도전을 구하러 가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 조말생의 칼에 뛰어들어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방지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피의 숙청이 끝난 후였지요.

이런 과거를 볼 때, 이방지가 밀본을 적대시할 이유는 없습니다. 죄책감 때문에라도 더욱 지극정성으로 정도전의 후계자 정기준을 모시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방지는 정기준과 밀본에 대해 날카로운 적대감을 드러내니 아무래도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듯한데, 그 내용은 좀 더 지켜봐야 알 수 있겠군요.  

당시 이방지는 주군을 지키지 못한 죄를 인정하며 정기준 앞에 목을 내놓고 죽여달라 했었답니다. 하지만 정기준은 그를 죽이는 대신 윤평(이수혁)을 가르쳐 살인기로 만들어 달라 제안했다죠. 그래서 이방지는 윤평에게 무예를 가르쳤지만, 강채윤과 달리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윤평에게 무예를 가르친 것은 어디까지나 정기준과의 거래 때문이었으니까요. 그렇게 거래가 성립되었으면 더 이상 이방지를 귀찮게 굴지 말아야 페어플레이라고 할 수 있건만, 정기준은 다시 그를 불러들여 자신의 수하로 만들려 하는 중입니다. 그 인품 참 지저분하고 비열하네요.

노비 서용의 장원급제 사건으로 모든 사대부가 동요했지만, 가장 먼저 반항의 깃발을 들고 용감히 나선 사람은 성균관 유생 박세명이었습니다. 그 아역 배우는 아무래도 정기준의 어린 시절을 연기했던 소년과 동일 인물인 듯한데 확실히는 모르겠네요. 얼굴이 너무 똑같아서 정기준의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인 줄 알았는데, 자막에 다른 이름으로 인물 소개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했습니다..;; 하여튼 밀본의 일원이었던 그 열혈 소년은 거침없이 대형사고를 치고 말았습니다. 물론 정기준의 배후 조종을 받기도 했지만 그보다 앞서 자기의 신념으로 행한 일이었지요.

박세명은 선비의 옷을 입은 채 손에 칼을 들고, 죄수가 되어 탐라로 압송되던 노비 서용을 직접 찔러 죽였습니다. 그리고 동료 유생들과 함께 높다란 누각에 서서, 임금의 한글 창제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선언문을 낭독한 후 뛰어내려 자결하고 맙니다. 박세명은 조선의 유생으로서 도와 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외쳤지만, 스스로 깨닫지 못했을 뿐 그가 지키려던 의(義)는 사실상 이기심의 가면이었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기의 신념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려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목숨까지는 아니더라도 자기의 온 인생과 가족 친지들의 운명까지 그 신념에 모두 바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 중 자기 신념의 정체를 틈틈이 되돌아 보고 성찰하는 사람들은 몇 % 정도나 될까요?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지, 자기가 믿는 것만큼 올바른 일인지를 말입니다. 자칫하면 그 눈먼 신념 때문에 아까운 목숨들이 날아가고 세상이 불행해질 수도 있을 텐데요. 사대부의 모순된 신념과 비뚤어진 분노는 제 마음 속에 참으로 무섭고 섬찟한 공포심을 안겨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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