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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영 드라마 분류/뿌리깊은 나무

'뿌리깊은 나무' 임금의 마음이 지옥이어야 하는 이유

빛무리~ 2011. 11. 20.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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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태평한 태평성대를 보았느냐? 내 마음이 지옥이기에, 그나마 세상이 평온한 것이다!"
세종(한석규)의 이 대사를 듣는 순간, 제 머릿속은 텅 비워지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의 드라마 내용은 그저 건성으로 보아 넘겼을 뿐입니다. 한글을 기습적으로 반포하려던 세종의 계획은 한 발 앞선 밀본의 폭로로 인해 수포로 돌아갔고, 자기 민족의 글자를 갖는 것이 스스로 오랑캐가 되는 길이라 여기던 사대부들은 세종에게 격렬한 저항을 시작했습니다. 설상가상 한글에 관련된 연구 자료들을 몰래 옮기려던 광평대군과 소이(신세경)는 밀본에게 납치까지 당하지만, 모든 집착을 내려놓고 혼자 멀리 떠나려던 강채윤(장혁)이 하필 그 현장을 목격하는 바람에 뜻하지 않은 구원자가 되어 줍니다. 이 일을 계기로 강채윤도 결국 세종의 사람이 되겠군요. 

이렇게 역동적이고 흥미진진한 드라마 전개가 이어졌지만, 제 머릿속에는 끊임없이 세종의 저 대사만 윙윙 맴돌고 있었기 때문에 좀처럼 집중할 수가 없었습니다. "임금이 태평한 태평성대를 보았느냐?"... "임금이 태평한 태평성대를 보았느냐?"... 아, 과연 그렇습니다. 생각해 보니 한 번도 임금이 태평한 태평성대는 없었습니다. 임금이 홀로 즐거우면 세상은 도탄에 빠졌고, 임금의 나날이 고달플수록 세상은 살기 좋아졌습니다. 언제나 그러했습니다. "내 마음이 지옥이기에, 그나마 세상이 평온한 것이다!" 무거운 이 나라를 두 어깨에 짊어지고, 조금이나마 평온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피맺힌 가시밭길을 걸어 온 세종의 외침이 송곳처럼 제 가슴을 찔렀습니다.

어찌 그것이 나라의 일에만 국한될까요? 어찌 임금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일까요? 아무리 작은 단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도자나 책임자가 편하게 늘어져 있는 모임치고 잘 되는 경우는 본 적이 없습니다. 책임자가 자기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탁상공론만 늘어놓고, 그것도 무슨 권력이라고 제멋대로 휘두르며 다른 사람들만 부려먹는 모임치고 오래가는 경우를 본 적이 없습니다. 지도자는 뒤에서 떠미는 것이 아니라, 맨 앞에서 깃발을 들고 "나를 따르라~!" 하면서 사람들을 이끌어야 합니다. 강물에 뛰어들어야 한다면 누구보다 먼저 뛰어들어야 하고, 불길을 헤쳐나가야 한다면 역시 가장 먼저 앞장서서 길을 뚫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든든한 믿음으로 그 뒤를 따라올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치열한 예능 전쟁에서 유재석과 강호동이 오랫동안 2인 체제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습니다. 지금은 잠정은퇴로 쉬고 있지만 '1박2일'의 촬영에서 언제나 가장 많이 망가지며 스스로를 혹사시키던 사람이 바로 강호동이었지요. 얼음장같은 찬물에 입수도 가장 많이 했고, 비 오는 날 진흙탕에 얼굴을 처박고 넘어지는 것도 늘 강호동이었습니다. 지금 그가 빠진 '1박2일'이 여전히 잘 되고 있는 이유 또한, 메인 MC 자리를 이어받은 이승기가 강호동과 똑같은 솔선수범을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머지 멤버들도 모두 열심이긴 하지만, 이승기가 아톰머리 헤어쇼라든가 높이뛰기 셀프 패대기와 같은 장면들을 연출하며 맨 앞에서 망가지지 않고, 가수 활동 한답시고 이미지 관리를 하면서 주춤주춤 물러섰다면, 절대 지금처럼 프로그램이 잘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유재석의 경우는 또 말해 뭣하겠습니까? 명실상부한 1인자이면서도 그는 언제나 가장 힘든 역할을 자청합니다. '무한도전'이나 '런닝맨'을 보다 보면, 유재석의 얼굴에서 뚝뚝 흘러내리는 굵은 땀방울 때문에 수시로 가슴이 짠해지곤 합니다. 상대적으로 다른 멤버들은 너무 편하게 방송에 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일일이 주워섬기기도 어렵지만, 최근 방송된 '런닝맨'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재석은 박예진, 개리와 한 팀이 되어 레이스를 펼쳤는데, 얼핏 보기에도 물을 꽉 채우면 대략 3kg 정도는 될 듯한 무거운 분무기를 동생인 개리에게 맡기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가 메고 다니더군요. 방송 촬영이 한두 시간 걸린 것도 아닐텐데, 그냥 빈 몸으로 뛰어다니기만 해도 지칠 법한데, 그 무거운 최종병기까지 어깨에 둘러메고 다녔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래도 유재석은 힘든 기색 하나 없이 내내 앞장서서 가장 빨리 뛰었습니다.

반면 김원희와 지상렬이 투톱으로 나섰던 '패밀리가 떴다2'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튜디오에서 녹화되는 토크쇼에만 익숙했던 김원희는 리얼 버라이어티에 적응하지 못한 채 티나게 몸을 사렸고, 지상렬도 맏형으로서 그닥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망가지는 것은 오히려 예능 초보인 윤상현을 비롯해 조권과 윤아 등의 아이돌 출연자들이었죠. 앞장서서 팀을 이끌어야 할 베테랑들은 편안히 앉아 있고, 초보 예능인과 어린 친구들만 안스럽게 뒹굴며 망가지고 있는 모습은 볼수록 불편했습니다. 결국 '패떴2'는 오래가지 못하고 막을 내렸지요.

예전에 제가 합창단에서 노래 연습을 할 때 지휘자님이 하셨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노래는 말이다. 부르는 사람이 쉽게 부르면, 듣는 사람은 아주 듣기가 싫어. 조수미같은 사람의 노래를 들으면 굉장히 쉽게 부르는 것 같지? 하지만 사실은 너무 힘들어서 숨이 넘어가기 직전인 거야. 그렇게 온 몸의 힘을 다 짜내어서 힘들게 불러야만, 듣는 사람의 귀에는 천상의 소리로 들리는 거다..." 혼자 즐기는 음악일 때는 상관이 없지만, 남에게 들려주는 음악을 하고 싶다면 결코 편하게 쉽게 노래를 불러서는 안되는 거라고 말씀하셨었지요.

노래하는 자세에 대한 저 이야기가 임금이나 지도자의 역할과는 언뜻 무관한 듯 싶지만, 어느 면에서는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남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기쁘게 해주고,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는, 내가 고통스럽고 힘들어야 한다는 진리입니다. 지금까지는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편하면서 동시에 남도 편하게 해줄 수 있을까? 진지하게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어렵겠더군요. 내가 편하다면, 대신 누군가가 그만큼은 힘들어야 하는 거였습니다.

저는 임금도 아니고 그 어떤 모임의 지도자도 아닙니다만, 아무 힘이나 권력도 없이 그저 이 세상을 홀홀이 지나가고 있는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세종의 송곳같은 대사는 제게도 깊은 깨달음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과연 나는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얼마나 자신을 희생할 수 있을까? 저도 모르게 어려운 질문을 던져 놓고는 착잡한 심정으로 머뭇거리는 못난 자신을 발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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