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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남자' 경혜공주의 편지 - 정종에게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공주의 남자

'공주의 남자' 경혜공주의 편지 - 정종에게

빛무리~ 2011. 9. 29.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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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신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내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세령이와 옷을 바꿔 입고 생전 처음 궐 밖 세상을 구경하던 날, 느닷없이 나의 가마 속으로 뛰어들었던 당신과의 첫 만남을 기억합니다. 장부의 기개를 깊숙이 감춰두고 허랑방탕한 모습으로 저잣거리를 떠도시던 그 때, 저는 당신을 알아보지 못해서 경멸하였더랬지요. 당신과 원치않는 혼례를 올리던 날의 내 심정은 지극히 참담하였으나, 이제 와 돌이켜 보면 그 또한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습니다.

나는 혼례를 올린 후에도 한참이나 마음을 열지 않았고 당신을 남편으로 대접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재촉하지 않고 나를 기다려 주었습니다. 내 아무리 공주라 하여도 부군을 그토록 멸시해서는 안되는 일이었지요. 안되는 줄 알면서도 나는 참 못되게 오랫동안 심통을 부렸더랬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한 번도 화를 내신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속없는 사람처럼 허허 웃는 그 얼굴이 나는 또 못마땅해서 외면했었지만,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오랜 참을성과 기다림이 무엇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이제 나는 알고 있습니다.

꼭 한 번 당신이 나를 호되게 야단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아무에게도 행선지를 밝히지 않고 하루종일 집을 비웠던 날, 돌아가신 모후의 산소를 찾아가려다 강을 건너지 못하고 되돌아오던 그 날이었습니다. 당신은 어리광을 그만 피우라면서 나를 따끔하게 꾸짖었는데, 나는 그런 당신을 보며 부왕이 돌아가신 후 처음으로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린 아우님을 나 혼자서 지켜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당신이 든든한 오라비처럼 함께 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왠지 당신을 믿어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수양은 친동생인 안평 숙부마저 죽여 놓고, 그 잔악한 손의 피가 마르기도 전에 금성 숙부와 당신마저 잡아들였습니다. 그대로 잡혀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나는 저도 모르게 당신의 앞을 막아섰습니다. 이대로 혼자 남겨진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기에, 내 몸을 던져서라도 당신을 잡아가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언제나처럼 허허 웃으며 내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끌려가는 모습을 공주께 보여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안심하십시오. 나는 꼭 살아 돌아와서 공주를 내 품에 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의 말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금성 숙부와 당신의 목숨을 구하려고, 어리신 전하는 수양에게 옥새를 넘겨주시고 말았습니다. 이제 저승에 가서 부왕의 얼굴을 어찌 뵈올까요? 당신이 무사하신 것은 기뻤으나, 아우님을 지켜드리지 못한 것은 천추의 한으로 남았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당신은 사육신과 김승유와 함께 일을 도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양을 죽이고 전하를 다시 옹립하려는 그 계획은 위험천만한 것이라,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수양이 옥좌에 앉아 있는 한, 전하의 목숨은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울 테니까요. 눈엣가시처럼 거슬리는 전하를, 수양은 결국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죽이고 말 테니까요. 아우님을 지키기 위해서는, 다시 원래의 자리에 오르시게 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습니다.

거사를 치르기 전날 밤, 당신은 작별 인사처럼 나를 안았습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당신의 뜨거운 숨결이 나의 숨결과 맞닿았습니다. 부부의 연을 맺었으나 차갑게만 굴었을 뿐 무엇 하나 잘해 준 것도 없는 나를 위해, 당신은 기꺼이 허허 웃으며 죽음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어김없이 새벽은 밝아 왔고, 당신은 내 손등에 입맞추고는 망설임 없이 돌아서 걸어갔습니다. 내 안에서 거세게 요동치는 심장은 슬픔인지 두려움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거사는 실패했습니다. 나는 수양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그를 전하라 부르며, 당신의 목숨만은 살려달라 치욕스레 구걸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사육신과 함께 죽으려는 당신을 살려냈고, 당신은 수치심에 몸을 떨며 나를 원망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추억할 수 있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은 채 보내드릴 수는 없었습니다. 당신을 그대로 허무하게 보내고 나면, 내가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듯 하였습니다. 당신이 죽으면 나도 죽을 것이고, 내가 죽으면 더 이상 아우님을 지켜드릴 사람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두번째 거사를 앞두고 내 마음은 한결 편안합니다. 내 뱃속에 또 하나의 심장이 뛰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떠나시더라도 이 아이는 내 곁에 남아서, 두고두고 우리의 사랑을 추억하게 해 줄 것입니다. 당신은 나를 닮았으면 좋겠다 하셨지만, 이 아이는 당신을 닮을 것입니다. 그 넒은 가슴과 허허로운 웃음까지 모두 꼭 빼닮을 것입니다. 이 아이는 당신처럼 참을성이 많고 사랑이 깊을 것이며, 그렇게 대대손손 당신과 똑같은 아이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서글픈 이별이 우리의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요. 하지만 나는 당신을 만나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우리의 손자들이 살아갈 세상은, 아마도 지금보다는 평화롭겠지요? 그들은 두고두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공주였던 할머니와 부마였던 할아버지가 서로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피바람 속에서도 얼마나 서로를 믿고 아끼며 의지했는지... 옛날 이야기처럼 자기 자식들한테 속삭여 주며 살아갈 것입니다. 내가 꼭 그렇게 만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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