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적도의 남자 (17)
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처음부터 큰 기대는 안 했지만 그래도 초중반의 스토리 전개가 괜찮아서 나름 재미있게 시청하고 있었는데 역시나 결말은 실망스럽다. 요즘 같아서는 수십 년 전의 그 촌스러웠던 '전설의 고향'을 다시 보고 싶어질 지경이다. 너무나 뚜렷해서 소름끼칠 정도였던 '권선징악'의 메시지가 그리워진다는 뜻이다. 언제부턴가 대한민국의 드라마 작가들은 '용서' 또는 '화해'라는 단어에 강박증이 걸려 있는 듯하다. 용서나 화해의 메시지에 대중적 공감을 얻으려면 악역을 적당히 나쁜 놈으로 설정해야 하는데, 문제는 너무 지나치게 악마같은 놈으로 설정해 놓고서 결국은 피해자가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용서하게 만들고, 어쨌든 용서하고 화해하니 모두가 행복해졌다면서 다같이 하하하 웃고 끝나게 만드는 것이다. 참 가소롭기 이를 데 없..
처음부터 1~2회 연속 방송이라는 초강수를 두었을 만큼 '그 겨울, 바람이 분다'에 걸고 있는 방송사의 기대감이 큰 모양입니다. 더구나 같은 날 시작되는 '아이리스2'는 무려 170억의 제작비가 투입된 대작이니만큼 더욱 경계심을 늦출 수 없었겠지요. 다행히 첫 방송 후의 반응은 좋은 편입니다. 이른바 감성멜로 전문 콤비라 불리는 노희경 작가와 김규태 PD의 만남은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더군요. 깔끔한 짜임새와 감각적인 대사를 자랑하는 노희경 작가의 대본은 역시 명불허전이었고 '그들이 사는 세상', '빠담빠담 그와 그녀의 심장박동 소리'에 이어 그녀와 세번째 호흡을 맞추는 김규태 PD의 영상미 또한 여지없이 빛을 발했습니다. 주연부터 조연에 이르기까지 누구 한 사람 삐걱거림 없이 환상의 조화를 이루는 배..
제가 첫 방송을 20분 가량 보다가 관심을 딱 끊어버렸던 프로그램이 '달빛 프린스' 였습니다. '토크클럽 배우들'도 비슷한 케이스지만 그래도 간신히 첫 방송은 끝까지 보았던 것에 비해, '달빛 프린스'는 끝까지 보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았던 거죠. 그런데도 굳이 '강심장'을 외면하고 '달프' 쪽으로 채널을 고정한 것은 요즘 '내 딸 서영이'를 통해 주목하고 있던 여배우 이보영이 게스트로 출연한다고 해서였습니다. 참으로 다작을 하는 배우인데도 이전까지는 별다른 관심이 끌리지 않았었는데, '내 딸 서영이'에서 물 만난 고기처럼 활약하는 모습을 보며 날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그녀의 매력에 감탄을 거듭하는 중이거든요. 게다가 그녀가 소개할 책에도 관심이 끌렸습니다. 지금은 생애 최고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을 ..
2월부터는 글감이 있든 없든 무조건 1일 1포스팅을 해 볼 생각인데, 계획대로 잘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요즘 볼만한 드라마가 별로 없군요. 노희경 작가의 '그 겨울, 바람이 분다'를 기다리는 중인데 시작되려면 아직도 2주 가량이나 남았고, 예능 프로그램 중에도 제 마음을 잡아끄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요 며칠간은 오래 전의 드라마 몇 편을 다운받아 보는 것이 쏠쏠한 재미였어요. 특히 2005년 4월부터 5월까지 MBC 주말극으로 방송되었던 '떨리는 가슴'은 아주 독특한 기획과 구성으로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 드라마를 다시 감상하며 알싸한 떨림과 뿌듯한 따스함을 다시 느낄 수 있었지요. 그래서 2월달에는 가끔씩 최신 프로그램에 대한 글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 '떨리는 가슴' 리뷰를 차례대로 써 볼까 생각중..
방영 전부터 이런저런 문제로 꽤나 시끄러웠던 드라마 '각시탈'의 첫방송이 드디어 전파를 탔습니다. 보조출연자의 석연찮은 죽음과 그 배상문제를 둘러싼 잡음들, 그리고 지나치게 애국심을 내세우는 듯한 자극적인 홍보 마케팅 등으로 인해, 마음 속에는 얼마간의 꺼림칙함이 자리잡고 있었지만, 저는 새로 시작된 수목드라마 전쟁에서 결국 이 작품을 선택하고 말았네요. 물론 저의 성향상, 앞으로의 진행과정이 실망스러울 경우는 중간에 '유령'이나 '아이두아이두' 쪽으로 갈아탈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지만, 일단은 '각시탈'의 분위기가 가장 끌리고 마음에 들더군요. 이 글의 초점에서는 약간 빗나가는 이야기지만 '각시탈' 1회를 보면서 저는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어째서 초반에 제가 그토록 애정하던 드라마 '적도의 남..
치열한 수목드라마 전쟁에서 제가 가장 먼저 선택한 작품은 '적도의 남자'였고, 그 다음으로는 '더킹 투하츠'도 놓치기 아깝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방송되는 드라마 3편을 모두 챙겨보기는 어려울 듯하여 '옥탑방 왕세자'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말았었지요. 조선시대의 왕세자가 느닷없이 현대에 뚝 떨어졌다는 설정도 지나치게 코믹하고 유치할 것만 같아서 별로 끌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주말 재방송을 통해 몇 번 곁눈질을 하면서 의외로 무게감도 있고 재미있는 드라마임을 알게 되었지요. 그 이후로 리뷰는 쓰지 않았지만 틈나는 대로 즐겁게 시청하던 드라마가 '옥세자'였습니다. 지난 번 '적도의 남자' 리뷰에서도 저의 성향을 밝힌 바 있지만, 저는 한 드라마를 선택하여 무조건적으로 충성을 다하는 스타일의 ..
일단 한 드라마를 보기 시작하면, 나중에 실망스런 스토리 전개를 보이거나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어 가더라도 상관없이, 초심을 잃지 않고 꿋꿋한 충성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꽤나 많더군요. 그런데 저는 그게 좀처럼 안 됩니다. 초반에 홀딱 반해서 끝까지 사랑하리라 마음먹었던 드라마도 점점 변질되어가는 것을 보면 쉽게 마음이 식어버리더군요. '드라마 = 인간' 이라고 생각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실망스런 모습을 발견했다 하여 곧바로 차갑게 돌아서는 셈이니 정말 못됐다고 할만 하겠죠. 하지만 드라마는 사람이 아니니까, 좀 그래도 되지 않을까요? 드라마에 대해서도 변함없이 꿋꿋한 사랑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보면, 빛무리가 이제껏 팬의 탈을 쓰고 행세해 왔을 뿐 사실은 '적도의 남자' 안티였다고..
나도 이런 사랑을 원했던 건 아니야. 어려서부터 나는 참 외로웠지. 아무도 엉터리 박수무당의 딸을 사랑해 주지 않았어. 사람들은 아빠와 나를 인간 이하의 존재처럼 취급하며 무시했고, 동네 아이들은 내가 다가가면 귀신이라도 옮겨 붙는 줄 알고 기겁을 하며 도망다녔지. 하지만 꼭 한 명, 김선우만은 나를 피하지 않았어. 항상 남자아이들끼리 어울려 뛰어 노느라고 바빴지만, 그래도 가끔씩은 혼자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그림을 그리는 내 곁에 다가와서 한참이나 그림을 들여다보며 나에게 말을 걸었어. 일부러 선심쓰듯 말을 걸어주는 게 아니라, 내 그림을 정말 관심있게 바라보며 궁금한 것들을 묻곤 했었지. 선우는 한 번도 얼굴에 가면을 쓰지 않는, 진짜 친구였어. 그런데 이장일, 너 때문에 나는 그런 친구를 외면하고..
이장일이 김선우의 뒤통수를 내리치고 벼랑에서 밀어 바다로 떨어뜨리던 그 충격적인 명장면은, 두 명품 아역들이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선물이었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며 정말 소스라치게 놀랐었지요. 임시완의 눈빛이 갑자기 정신나간 것처럼 변해서 몽둥이를 들고 이현우의 뒤를 바짝 쫓아갈 때만 해도 "설마... 설마..." 했는데, 한 번도 모자라 두 번씩이나 선우의 머리를 몽둥이로 있는 힘껏 내리치는 장일의 모습이 너무도 뜻밖이었던 이유는, 첫 회의 프롤로그에 등장했던 선우와 장일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롤로그에서 이장일(이준혁)은 마치 절대악을 응징하려는 정의로운 검사처럼 진노식(김영철) 회장을 찾아가 총구를 겨누었습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면 진노식은 이미 김선우(엄태웅)..
김선우(엄태웅)가 시력을 회복한 후의 모습으로 이장일(이준혁) 앞에 나타나 본격적인 복수의 서막을 알렸으니, 앞으로는 엄태웅의 동공 연기를 더 이상 볼 수 없을 듯합니다. 이장일과 이용배를 불러내서 마치 "내가 돌아왔다!"고 선포라도 하듯이 보여주었던 섬뜩한 그 연기가 마지막이었나봐요. 스토리의 흐름이나 설정으로 봤을 때는 어째서 그와 같은 만남이 필요했는지 썩 납득이 안 가는데, 아마도 시청자들로 하여금 다시 한 번 그 소름돋는 연기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주려 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엄태웅의 맹인 연기는 단지 동공뿐만 아니라 온 몸과 표정에서부터 생생히 전해져 오는, 명품 중의 명품이었습니다. 오래 전, 안재욱의 데뷔작이었던 '눈 먼 새의 노래' 이후 더 이상의 맹인 연기를 볼 수는 없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