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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108부작으로 조기종영이 결정된 이후 '제왕의 딸 수백향'은 박진감 넘치는 전개로 흥미를 더해가고 있다. 애초 예정이던 120회에서 무려 12회가 축소된 만큼 스토리 진행이 빨라지는 것은 당연지사라 하겠으나, 요즘 같아서는 이토록 재미있고 수준 높은 작품을 시청률 때문에 조기종영한다는 사실이 그저 아쉽고 안타까울 뿐이다. 어중간한 밤 9시대의 드라마치고 10%를 넘기는 시청률이면 그리 낮은 편도 아닌 듯한데, 황금 시간대인 10시 타임의 수목드라마들도 현재 10% 내외의 시청률로 고만고만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데, 굳이 '수백향'을 조기종영하면서까지 후속작을 빨리 내보내겠다는 방송사의 고집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진짜 수백향인 언니 설난(서현진)을 대신하여 공주 노릇을 하던 설희(서우)는 결국 정체가 ..
명품 아역들이 활약이 한창이던 드라마 초반, 문근(이민호)의 캐릭터는 그야말로 찌질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계백(이현우)과 의자왕자(노영학)가 저마다의 색다른 매력을 뽐내며 영웅의 어린 시절을 폼나게 연기하고 있을 때, 문근은 그저 못난 술집 종업원으로서 걸핏하면 술이나 약을 바꿔치기하며 손님들에게 어설픈 사기를 치다가 발각되어 경을 치기 일쑤였고, 동네 불량배들이라도 나타나면 대적 한 번 하지 못하고 엎드려 벌벌 떠는 겁쟁이였습니다. 독개(윤다훈) 일당이 외팔이 무진(차인표)을 찾는다는 소리를 듣고 대뜸 그들에게 다가가 "우리 아버지를 왜 찾는데요?" 라고 물었던 녀석도 바로 문근이었습니다. 그에게도 뇌가 있다면, 저 험악하게 생긴 놈들이 자기 아버지를 왜 찾는 걸까 잠시라도 고민해 보아야 마땅하련만..
무력한 임금이란 동정받기보다 지탄받아야 할 대상임을 '계백' 7회에서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주인공 계백의 비극은 악역을 맡은 사택가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마땅히 임금으로서 갖추어야 할 힘을 갖추지 못한 무왕(최종환)에게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무진(차인표)이 목숨 걸고 사택비(오연수)에게서 빼앗아다 바친 살생부는, 역시 예상대로 무왕의 무능한 손아귀에서 조금도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오히려 독이 되고 말았습니다. 막강 실세로서 병권마저 장악하고 있는 사택비는 군사를 동원하여 무력으로 궁궐을 제압하였고, 그나마 윤충 장군의 전갈을 받고 외곽에서 지원하러 오던 적은 수의 군사들마저 사택적덕(김병기)에 의해 길목에서 차단당했습니다. 힘의 열세를 지혜로 극복하지도 못한 무왕은 속절없이 폐위될 위기에 처..
어린 단종은 누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경혜공주(홍수현)의 사가를 찾아가고, 오누이는 서로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냅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부마 정종(이민우)은 친구 신면(송종호)에게 이렇게 말하는군요. "언제나 오늘처럼만 평온했으면 좋겠네. 전하께서도 공주마마께서도 아무 걱정 없이 환히 웃으실 수 있게..." 하지만 신숙주의 아들 신면은 이 평온한 시간이 결코 길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정종의 사람좋은 미소에 화답하지 못합니다. 임금이 궁궐을 비운 그날 밤, 수양대군(김영철)은 네 명의 교자꾼과 한 명의 시종만을 거느린 채 김종서(이순재)의 집을 찾아갑니다. 김종서와 단둘이 마주앉은 수양이 긴히 의논할 것이 있다며 꺼낸 말은, 바로 자신의 장녀 세령(문채원)과 김종서의 막내아들 김승유(..
사택가문의 사람들이 백제의 권력을 움켜쥐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명석한 두뇌를 지녔고, 권력의 속성에 밝으며, 사람을 보는 눈이 뛰어나고, 무엇보다 더없이 비정한 성품을 지녔습니다. 무왕(최종환) 역시 뛰어난 지략으로 신라와의 수차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영웅이었지만, 손에 넣은 살생부를 어떻게 이용할지 고민하는 무왕의 머릿속은 사택비(오연수)에게 훤히 읽히고 있었습니다. 무왕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미리 예측하여 모든 대비를 해 놓는 상황이니 이래서는 속수무책, 이길 방도가 없습니다. 심지어 사택비는 자부심과 기개 면에서도 무왕을 압도하고 있었습니다. 사택가문의 사람답게 비정하기 짝이 없는 대좌평 사택적덕(김병기)은 살생부를 무왕에게 넘기지 않기 위해 자기 딸 사택비를 희생시키려 ..
선화황후(신은정)의 죽음을 목격하고 구사일생 살아남아 궁으로 귀환한 뒤, 의자 왕자(노영학)는 허랑방탕한 바보 흉내를 내며 아버지인 무왕(최종환)에게조차 십수년간이나 속마음을 감추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던 그가 드디어 5회에서 본색을 드러냈군요. 극적으로 재회한 무진 장군(차인표)을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일 뿐인데, 왜 살아있는 제가 그 참담한 기억을 안고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의자는 생모 선화황후의 제를 모시지 않겠다고, 위패는 그저 나무쪼가리일 뿐 사람이 아니라고, 자기가 효와 예를 다해 모실 분은 오직 사택황후(오연수) 뿐이라고 외치는데, 이복동생 교기(서영주)는 차갑게 비웃으며 "그 말이 진심이라면 저 나무쪼가리를 불태워 버리시라"고 말합니다.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
'계백'을 2회까지 시청한 후 깨닫게 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철저히 주인공 '계백'을 살리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악역 '미실'이 주인공을 제치고 드라마의 상징이 되어 버렸던 '선덕여왕'과 결정적으로 차별화되는 부분입니다. 사실 김근홍 PD는 전작 '선덕여왕'에서 한국 드라마 사상 가장 매력적인 여성 악역을 탄생시키는 영광을 맛보았지만, 한편으로는 주인공의 존재감이 악역에게 밀리는 바람에 적잖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을 것입니다. 드라마의 기본 원칙은 주인공을 중심으로 해서 모든 상황이 돌아가야 하는 것인데, 주인공보다 악역이 부각되면 스토리를 끌고 나가기도 힘들어질 뿐 아니라 작품의 완성도에도 좋은 영향을 끼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김근홍 PD는 이번 작품에서 전작의 실..
첫 느낌이 상당히 좋습니다. '계백'은 '선덕여왕' 이후로 주춤했던 사극의 화려한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지 않을까 싶군요. 삼국통일 후 승자에 의해 기록된 역사는 한때 찬란했던 백제의 영광을 무참히 짓밟았고, 삼천궁녀의 낭설 등으로 갖가지 흠집내기의 표적이 된 의자왕은 우리나라 역대 망국 군주 중에서도 최악의 임금으로 알려졌지만, 숨겨졌던 진실이 조금씩 드러나면서 백제의 역사는 최근 재조명을 받고 있는데, 과연 그 시절의 이야기를 얼마나 흥미롭고 공정하게 풀어낼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퓨전사극 '다모'를 집필하여 드라마 폐인 시대를 이끌었던 정형수 작가와 '주몽', '선덕여왕'을 연출하며 삼국시대 사극의 새 장을 열었던 김근홍 PD가 '계백'에서 손을 잡았습니다. 김근홍 PD의 드라마 배경은 고구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