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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일' 한강이 지현에게 보내는 편지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49일

'49일' 한강이 지현에게 보내는 편지

빛무리~ 2011. 5. 6.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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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현, 처음 볼 때부터 너와 나는 닮은 곳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너는 밝지만 나는 어둡고, 너는 착하지만 나는 못됐고, 너는 긍정적이지만 나는 배배 꼬였다. 너는 사이좋은 부모님에게서 한껏 사랑받으며 자랐지만, 내 아버지는 먼 곳으로 떠나버렸고 내 어머니는 어린 나를 방치해 두었다. 내가 못 가진 것을 모두 가진 너라서, 우리의 첫 만남이 그렇게 강렬하지만 않았다면 난 너를 진짜 미워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들어올 수 없을 만큼 단단하고 두껍다고 생각했던 내 방어벽을 너는 삽시간에 무너뜨렸다. 엄마 곁에 있기 싫어서 아빠가 계신 미국으로 도망치려고, 엄마 돈을 훔쳐 사 두었던 비행기 티켓이, 너를 만난지 1분도 채 되지 않아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던 거다. 평소 남을 잘 도와주는 성격도 아니었으면서, 나는 왜 자전거를 함께 끌어올려 달라는 네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을까? 얼떨결에 너를 감싸안고 비탈길을 굴러떨어지면서, 나는 왜 하늘로 둥둥 떠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을까? 눈을 떴을 때, 닿을 듯 가까운 곳에서 나를 걱정스레 내려다보던 너의 커다란 눈망울.

갑작스레 무엇엔가 취한 것처럼 몽롱했다. 낑낑대며 일어선 후에야 발목을 삐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별로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다. 걷지 못할 만큼 다친 것도 아니었고, 그 정도 상처 때문에 미국에 가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티켓을 찢어버리고 가지 않은 건, 그저 가기가 싫어졌기 때문일 뿐이다. 신지현, 너 때문에.


17살의 나는 엄마를 끔찍하게 싫어했다. 어린 나를 방치해 둔 채 밤마다 와인바에서 남자들과 술잔을 기울이던 엄마... 결국 아빠를 배신하고 이혼해 버린 엄마... 그래 놓고는 이제 와서 내가 엄마 곁에 있어야만 한다며 내 손을 끌고 진안으로 내려와 버린 엄마... 어렸을 때는 잘 챙겨주지도 않던 생일인데, 다 커버린 이제 와서 미역국을 끓여 들고 학교까지 찾아 온 엄마가 나는 밉기만 했다. 그래서 못된 성질 부리느라 보온병 채로 바닥에 팽개치고 돌아섰는데, 마음이 편치 않아서 또 엄마가 미워졌다.

그런데 신지현, 네가 마술로 나를 속여서 엄마의 미역국을 먹게 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나는 너 때문에, 살아있는 엄마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끓여 준 미역국을 먹을 수 있게 되었던 거다. 하루하루가 몹시도 괴로웠던 그 반항의 날들에 지현아, 너만이 나의 웃음이고 기쁨이었다. 내가 짖궂게 놀리고 장난칠 때마다, 한순간 파르르 하다가도 금방 새새거리며 웃어 버리는 너를 보면 기분이 말할 수 없이 좋아졌다. 때로는 너를 따라 웃고 싶은 것을 참고 무뚝뚝한 표정을 짓느라 무척이나 애를 먹기도 했다.


벚꽃 이파리가 눈처럼 날리는데, 그 아름다운 그림 속에서 나는 왜 너에게 화를 냈을까? 타로점을 보러 온 그 아이들에게 너는 거짓말을 했다. 영원한 이별이라고 나온 점괘를 반대로 해석해서 운명의 연인이라고 좋게 말해 준 것이다. 속은 줄도 모르고 행복하게 웃으며 가는 그 아이들을 보니 화가 치밀었다. 나는 엄마를 용서하고 싶어서 몇 번이나 아빠와의 이별에 대해 물었지만, 엄마는 한 번도 솔직하게 대답해 주지 않았다. 말하지 않고 숨기거나 거짓말을 했다. 지현아, 그 순간엔 엄마가 미운 만큼 네가 미웠다. 아니, 엄마를 사랑한 만큼 너를 사랑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배신한 사람은 엄마가 아니라 아빠였다는 걸, 미국에 와서야 알았다. 아빠의 집에는 벌써 열 살이나 된 동생이 있었던 거다. 그런데도 엄마는 나를 미국에 보내 놓고, 병의 고통에 새카맣게 타들어가며 혼자 죽을 때까지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엄마의 죽음을 1년 후에야 알았다. 강이한테는 가능한 한 늦게 알리라는 것이 엄마의 유언이었다고 아빠는 말했다. 어이없지만 그것이 나를 사랑한 엄마의 하얀 거짓말이었다.

마지막 헤어지는 순간에조차 엄마에게 웃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던 나는, 후회하지 않으려 죽을 힘을 다했지만 수시로 밀려드는 후회를 막지 못했다. 그리고 후회가 밀려들 때마다 신지현, 네가 생각났다. 벚꽃 휘날리던 길에서 나는 너에게 화를 내며 밀쳐서 넘어뜨렸고, 너는 울면서 나에게 가라고 소리쳤고, 나는 그대로 돌아서서 가 버렸다. 그것이 내가 본 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되돌아갔을 때 너는 이미 거기에 없었고, 나는 네가 떨어뜨린 팔찌만 주워든 채,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전하지 못하고 이 먼 곳으로 떠나왔던 거다.


이제 엄마에게는 할 수 없게 된 말들이지만, 너에게는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미안하다고... 정말 미워서 그런 게 아니었다고... 사실은 참 많이 좋아했다고. 너에게조차 말하지 못하면 평생 후회에 시달릴 것 같았다. 10년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건, 다시 너를 찾아 그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너는 생각지도 않은 강민호의 약혼녀가 되어 있었다. 네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너에게 화가 났다. 숨길 수 없을 만큼 화가 나는데 이유를 말할 수 없어서 나는 거짓말을 했다. 처음부터 네가 싫었다고, 한 번 재수없으면 평생 재수없다고 너에게 또 화를 냈다.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닌데, 못난 내 모습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너는 사고를 당했고, 그렇게 긴 잠 속에 빠졌다.

지현아, 참 이상한 일이다. 네가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고통스럽게 헤매고 있는데, 내 마음은 점점 더 행복해지고 있으니 말이다. 비록 송이경의 몸 안에 숨어 있지만 나는 너를 알아볼 수 있고, 너는 그런 내 마음을 알고 있는 이 순간이 내게는 더없이 행복하다.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읽을 수 있고, 솔직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서로를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 이런 관계가 어떻게 가능한 걸까? 왜 예전에는 이렇지 못하고, 오해하고 오해받으며 지내야만 했을까?


너무 늦은 것이 아니기를 바라며, 나는 너에게 조금씩 다가선다. 나는 네 목걸이에 담긴 눈물이 나의 것임을 알려주었고, 내가 다 도와주고 해결해 줄테니 더 이상 강민호를 만나지 말라며 질투심을 드러냈다. 나의 이런 행동들은 사랑 고백과 다를 바 없었다. 네 얼굴을 보면서는 하지 못했던 말들을, 송이경의 얼굴을 보며 하고 있다니 참 우스운 일이다. 왜 좀 더 빨리 솔직해지지 못했을까?

하지만 너는 내 손을 잡아 주었고,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고 말해 주었다. 얼굴 볼 날도 며칠 남지 않았으니 함께 있는 시간이 많을수록 좋다고... 살고 싶다고 너는 말했다.
"신지현, 그 친구 꼭 다시 깨어나면 좋겠다."
살고 싶다는 말을... 살아서 오랫동안 내 곁에 있고 싶다는 말을 너는 그렇게 하고 있었다.
담담하게, 하지만 가슴 미어지게.



지현아, 대답을 해라. 너에게 몸을 빌려주었던 송이경은 갑자기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의지할 곳 없어진 너는 지금 어디를 헤매고 있는지, 애타게 부르는 내 목소리에 대답을 해라. 귀에는 들리지 않아도 신지현, 너의 마음이라면 나는 꼭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영원히 엇갈릴 뻔했던 우리가 이렇게 다시 만나서 마음을 확인한 것도 운명이라면, 지금의 숨막힐 듯한 고통도 결코 영원하지는 않을 테니 지현아, 정신 차리고 기운을 내야만 한다. 네가 어떻게 되더라도, 나는 항상 너와 함께 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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