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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인' 살인마 최재환, 박신양보다 빛난 이유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싸인

'싸인' 살인마 최재환, 박신양보다 빛난 이유

빛무리~ 2011. 1. 21.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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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양은 원래 연기를 참 잘 하는 배우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신인 시절부터 그랬던 것 같아요. 1996년작 드라마 '사과꽃 향기'에서 저는 그를 처음 보았습니다. 무려 15년 전이군요. 김혜수와 김승우가 주연을 맡았고, 김혜수의 예전 남자친구 역할은 배우 윤동환이었습니다. 그럼 박신양은 뭐였냐구요? 마치 동성 친구처럼 김혜수를 이해하고 아껴주는, 아주 성격 좋은 베스트프렌드 역할이었지요. 메인 러브스토리는 오히려 좀 어둡고 칙칙하게 느껴졌는데, 이 친구만 등장하면 갑자기 분위기가 확 밝아졌습니다. 밝고 명랑하고 사려깊은 친구 역할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표현해냈는지, 연기가 아닌 실제처럼 보일 정도였어요. 그 후에도 박신양은 다양한 스펙트럼의 연기를 보여주며 배우로서의 탄탄한 입지를 쌓아갔습니다. 

그랬는데 언젠가부터 저는 박신양의 연기에 조금씩 질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최근 몇 년 동안 박신양은 거의 비슷한 성격의 캐릭터를 맡아 온 것 같아요. 속마음은 따뜻하지만 겉으로는 까칠하고 무뚝뚝한 남자, 툭하면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는 다혈질의 남자, 어떤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강한 남자... 뭐 이런 정도라고나 할까요? '파리의 연인' 한기주, '쩐의 전쟁' 금나라, '바람의 화원' 김홍도... 그리고 이제 '싸인'의 윤지훈까지 거의 비슷비슷합니다. 특히 버럭질하는 박신양의 모습은 아주 많이 식상하게 느껴지네요.



아마도 최근 몇 년간 그런 스타일의 남성 캐릭터가 큰 인기를 얻고 있기 때문에, 수많은 드라마에서 그런 유형의 남자 주인공이 대량 생산된 탓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박신양은 이제 좀 다른 스타일의 남성 캐릭터에 도전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군요. 이를테면 '맨발의 기봉이' 처럼 아주 순박하고 착한 시골 청년이라든가, 언제나 남들 앞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지내는 소심한 샐러리맨이라든가... 찾아 본다면 많이 있겠지요. 좋은 연기자는 뭐니뭐니 해도 연기 변신에 성공했을 때 가장 빛나는 법입니다. 이렇게 비슷한 캐릭터를 수년간 고수한다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아요. 


하여튼 윤지훈의 캐릭터는 상당히 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만, 드라마'싸인'은 점점 더 흥미로워지고 있습니다. 요즘의 내용은 드라마판 '살인의 추억'이라고 말할 수 있겠군요. 수많은 인터넷 기사에는 "드라마에서라도 꼭 범인이 잡히기를 바란다"는 간절한 댓글들이 달렸습니다. 그런데 어제 방송된 6회에서 드디어 범인의 정체가 드러났군요. 법의관 윤지훈과 형사 최이한(정겨운)이 각자의 방식대로 범인의 행적을 추적해나가는 과정은 스릴 그 자체였습니다. 특히 피해자 유현주의 어머니가 보여 주는 졸업 앨범에서 안수현(최재환)의 얼굴을 발견하는 장면에서는 가슴이 쿵 내려앉더군요. 


최이한 형사는 안수현을 연쇄 방화 용의자로 체포하여 조사를 의뢰했지만, 여검사 정우진(엄지원)은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합니다. 약간 옆으로 새는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이 드라마에서 가장 거슬리는 부분은 바로 엄지원의 목소리입니다. 이제껏 그녀가 출연한 드라마나 영화를 꽤 많이 보았지만, 목소리가 이렇게 전형적인 멜랑콜리인 줄은 이번에 처음 깨달았네요. 지금까지는 거의 멜로의 여주인공만 했기 때문에 그 결점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너무나 가느다랗고 하이톤에 비음까지 섞인 그녀의 음색은, 카리스마 넘치고 강한 여성 캐릭터에 무척이나 안 어울립니다. 부하직원들에게 명령을 내릴 때조차도 마치 교태를 부리는 것 같더군요. 엄지원의 연기 변신에는 아무래도 그 목소리가 큰 걸림돌이 될 것 같습니다.

지난 회에서 안수현의 트럭에 붙어 있는 엠블램을 보고 최이한이 다그치자, 안수현은 그 특유의 순박한 얼굴에 잔뜩 겁을 먹은 채 허겁지겁 해명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붙여놓은 것을 보고 그냥 멋있어서 따라 했을 뿐이라고 말이지요. 그 눈빛이 어찌나 순진해 보이던지 최이한도 경계심을 풀고 맙니다. 게다가 범죄 현장에서 발견된 이정범의 차량에 모든 사고의 흔적이 남아 있었으니 안수현은 상대적으로 의심에서 더 쉽게 벗어날 수 있었지요. 그러나 진짜 연쇄살인범은 이정범이 아니라 그의 숨겨진 아들 안수현이었습니다.


최이한의 소개를 받고 안수현과 얼굴을 트게 된 고다경(김아중)은 남부 분원으로 복귀하는 중에 자연스럽게 안수현의 차를 얻어 타게 됩니다. 그것을 결국 납치로 이어졌지요. 그녀가 아직 안수현의 차 안에 있을 때, 윤지훈은 안수현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녀에게 전화를 합니다. "놀라지 말고 들어. 네 옆에서 운전하고 있는 그 남자가 범인이야!" 아무리 강심장을 가진 여자라도 혼비백산하여 놀랄 수밖에 없는 말을 하면서, 놀라지 말라고 하면 무슨 소용입니까? 그 때 윤지훈은 정말 바보 같았어요.

"아무것도 묻지 말고 조용히 내 말만 잘 들어. 화장실에 가고 싶다든가, 뭐든지 적당한 핑계를 대고 차에서 내려. 이상한 내색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최대한 차에서 멀리 떨어져 사람들 많은 곳으로 가." 뭐 이런 식으로 말해야 더 현명한 거 아니겠어요? 다짜고짜 "네 옆에 있는 놈이 살인자야!" 라는 소리를 들은 고다경은 티나게 벌벌 떨면서 안수현을 돌아보았고, 자기 정체가 발각됐음을 직감한 안수현은 그 순박한 얼굴에 회심의 미소를 짓습니다. 너무 리얼해서 온 몸에 소름이 쫙 끼쳤습니다.


최재환이라는 연기자는 순박한 얼굴과 출중한 연기력을 지녔습니다. 단역을 맡았을 때조차 그 캐릭터와 완벽히 일치해 있다는 느낌을 주곤 하지요. 요즘 '글로리아'에서 이천희의 꼬봉(?) 박동철로 출연하며 매회마다 이천희에게 뒤통수를 얻어맞는 중인데, 실제처럼 자연스런 그의 연기는 주연급의 이천희, 서지석보다 훨씬 우위에 있습니다. 거의 중견연기자와 비등한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글로리아'는 일종의 복수극이라서 전체적으로 좀 어두운 편인데, 최재환의 맛갈스런 감초 연기는 분위기가 침체되지 않는 데 큰 역할을 해 줍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최재환이 그토록 연기를 잘 하는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타고난 재능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자기 캐릭터에 대한 애정과 연기에 대한 열정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영화 '국가대표'에서 '마재복' 역할로 출연했던 최재환은, 시나리오를 받아 보고 즉시 '마재복'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심층 분석에 들어갔답니다. 출생부터 성장과정이며, 어떤 일을 겪었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시나리오에 나와 있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까지 상상을 하면서, 무려 A4용지 10장에 달하는 내용을 손으로 썼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읽어 본 제작진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서까지 세심하게 분석하며 노력하는 최재환의 열의에 감탄했다 합니다.


그리고 최재환은 원래 스노우보드 매니아였다지요. 차라리 백지상태라면 스키를 배우기가 더 쉬웠을 텐데, 스키와 보드는 중심 이동 방식이 달라서 오히려 더 고생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최재환은 극한의 의지력으로 거의 무주에 살다시피 하며 연습을 거듭하여, 막상 촬영이 시작되었을 무렵에는 거의 스키선수 수준의 실력을 보여주었다는군요. 그리고 이번 작품 '싸인'을 맞이해서도 최재환은 1톤 트럭을 운전해야 하는 안수현의 캐릭터를 더욱 실감나게 살리기 위해, 작년 11월에 일부러 1종 운전면허를 새롭게 취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트럭을 운전하는 장면은 단 1회 분량에 지나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정말 본받을만한 프로정신입니다. 화려한 타이틀롤을 맡지 못했음에도, 자칫하면 주연들의 존재감에 묻혀버릴 수 있는 작은 역할을 주로 맡는데도 불구하고, 매번 이 정도의 열정을 불태우는 것은 천생 배우가 아니라면 불가능할 것 같아요. 그야말로 '진짜 배우'라는 명칭에 가장 잘 어울리는 연기자가 아닐까 싶군요.

만날 얻어맞고 구박받는 순박한 청년 역할을 주로 하던 최재환은, 드라마 '싸인'을 통해서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로 완벽히 거듭났습니다. 그 순진한 얼굴에 씨익 떠오르던 잔인한 미소가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군요. 안수현이라는 캐릭터가 그토록 섬뜩한 반전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90% 이상 최재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본의 설정 자체는 그닥 특별할 것이 없었어요. 그런데 순박함과 잔인함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최재환의 표정 연기 덕분에 보는 사람들은 모두 그 상황에 완전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싸인' 6회의 주인공은 최재환이었습니다. 그의 미친 존재감은 주인공 박신양의 존재감을 훌쩍 뛰어넘었어요. 그것은 연기 변신에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연기자마다 철학이 다를 수는 있지요. 이를테면 차태현의 경우는 무리한 연기 변신을 시도하기보다,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캐릭터 위주로 계속 활동하여, 앞으로도 코믹 연기의 대명사로 불리고 싶다는 뉘앙스의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생각도 나쁘다고는 할 수 없는데, 제 생각엔 그래도 팔색조처럼 변신하는 연기자가 더 좋은 것 같아요.

익숙한 연기를 하는 것보다는 낯선 연기에 도전하는 것이 훨씬 더 힘들고 고달프겠지요. 하지만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끝없는 열정으로 험한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언제나 멋지고 아름답습니다. 그들의 성공은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지켜보는 우리들에게도 기쁨의 카타르시스를 전해 주거든요. 아직 서른이 되지 않은 젊은 배우 최재환, 그는 앞으로도 수많은 작품에서 수많은 모습으로 우리를 즐겁게 해 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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