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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 대길의 마지막 편지 - 송태하에게 [추노 편지7] 본문

종영 드라마 리뷰 /추노

'추노' 대길의 마지막 편지 - 송태하에게 [추노 편지7]

빛무리~ 2010.03.27 06:20






어이, 노비양반, 망설일 것 없어. 뒤돌아보지 말고 뛰어 가. 이 모든 일은 다 내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미안하다는 쓸데없는 생각 따윈 하지도 말고, 자네는 그냥 잘 살면 되는 거야.

노비양반, 처음엔 나도 몰랐어. 내가 왜 그렇게 언년이를 찾아다녔는지를 말야. 하지만 그애 얼굴을 다시 보는 순간 알겠더라구. 눈에 안 보이니까 더 걱정되고, 하루하루 걱정이 쌓여 가면서 내가 미친놈이 되었던 거야. 하지만 노비양반,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돼. 단지 걱정이 되어서 그런 거였어. 그것 뿐이야.


그애 오라비도 죽어가면서 나에게 당부하더라구. 우리 언년이 평안히 살게 해달라고 말이야. 이제 내가 자네한테 하는 말, 오라비의 당부라 생각하고 잘 들어. 난 차마 언년이한테 말할 수가 없었어. 너의 유일한 핏줄인 오라비가 죽었노라고, 내 앞에서 자결했노라고 말할 수가 없었어. 그저... 내 마음과 똑같은 그의 마음을 전해주었을 뿐이야. "네가 잘 살아야 한다" 하고 네 오라비가 말하더라... 하고 내 마음을 전하는 게 고작이었지. 

어디까지 알아들었을까? 언년이는 똑똑한 여자야. 내가 조그만 빈틈이라도 보였다면, 거짓말을 금새 들켰을 거야. "네가 그리워서 찾아다닌 것이 아니라, 그저 도망 노비를 쫓아다녔을 뿐이라고" 내가 말했을 때, 그애는 두말없이 알고 있었다고 대답하더군. 나는 흠칫 했지. "알고 있었어요." 라고 하는 그애의 목소리가 내 귀에는, "이제 더이상 애쓰지 마세요. 제가 그 마음 다 알아요" 하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거든.


대의는 무슨 대의... 나한테 그런 건 없어.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졌다 해도, 어차피 죽을 자리에서는 다 놓고 가야 하는 것 아니겠나? 사람은 말이야, 사내든 계집이든 마찬가지야. 자기가 정말 갖고 싶은 거, 그거 하나 갖기 위해서 온갖 서러움을 다 참아가며 삶을 견디지. 하지만 대부분은 그것을 갖지 못해. 그래서 원래 사는 건 슬픈 거야.

그래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원망하지.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게 만드는 세상을 말이야. 그거 참 죽을 맛이지. 세상이 너무나 미운데 그 세상을 바꿀 힘은 없고, 그렇다고 죽을 용기는 더구나 없고... 하루 하루 죽지 못해서 살아가는 건, 그야말로 죽는 것보다 서러운 일이야.


노비양반, 내가 말했지? 세상에 매여 있는 자... 누구나 노비라고 말이야. 자네는 노비가 아니라고 생각하나? 틀렸어. 아직도 자네는 노비야. 양반일 때에도 노비였고 지금도 노비일 뿐이야. 하지만 이제 곧 세상의 얽매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군. 그럴 가능성이 보여서 내가 자네를 믿는 거야.

김혜원이라는 이름의 양반집 규수만 알고 노비 출신의 언년이는 모른다고 박박 우길 때, 난 그저 우스웠지. 자네같은 부류를 잘 알거든. 한때는 나도 그들과 어울렸던 양반이었는 걸. 하지만 역시 가소로웠을 뿐이야. 왜인 줄 아나? 그때도 나는 언년이를 사랑했으니까, 그 사랑 때문에 나는 이 엿같은 세상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었던 거야.


아무리 다 지난 일이라지만, 자기 마누라가 한때나마 좋아했던 남자를 인정한다는 거... 쉽지 않은 일이지. 하지만 자네는 그걸 해냈어. 그렇지, 사랑은 그런 거야. 그 사람이 가진 모든 아픔을 진심으로 얼싸안을 수 있어야만, 비로소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 자네가 스스로 양반의 껍질을 깨고 나와, 언년이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나는 믿을 수 있었어.


나는 언년이에게 아픔일 뿐이야. 왜냐하면... 나를 사랑했을 때, 그 아이는 노비였으니까... 언제나 빨갛게 얼어터진 손을 호호 불면서도 물동이를 날라야 했던 노비였으니까... 주인집 도령인 나를 사랑했다는 이유로 죽기 직전까지 매를 맞고 광에 갇혀 며칠동안 굶주려야 했던 노비였으니까... 오라비의 손에 이끌려 도망치면서도 불길 속의 나를 자꾸만 돌아보던 언년이의 눈빛을 생생히 기억하네. 나는 그 아이에게 아픔일 뿐이야.


차라리 잘 됐어. 자네도 그리 못난 인물은 아니야. 자기 껍질을 깨뜨릴 수 있을 만큼 누군가를 사랑하는 남자라면 믿을 수 있지. 그러니까 끝까지 그 손 놓지 말고, 자네는 언년이랑 잘 살면 되는 거야.


이 배를 타고 떠날 때, 나의 선물이라 하지 말고 이 꽃신을 전해주게. 세상에 얽매인 노비가 되지 않으려면, 죽어라고 사랑하는 수밖에 없어. 그래서 나는 한 번도 노비였던 적이 없다네. 정말 고마운 일이지. 이 꽃신은 그 고마움에 대한 보답일 뿐이야. 알겠나, 노비양반? 욕심 따위는 버리고, 그냥 죽어라 사랑하며 사는거야. 그러면 우리는 진정 자유로울 수 있다네.


관련글 : '추노' 대길이의 편지 - 언년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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