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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출동 SOS 24' 구조된 노예청년이 더욱 염려되는 이유 본문

예능과 다큐멘터리

'긴급출동 SOS 24' 구조된 노예청년이 더욱 염려되는 이유

빛무리~ 2009. 11. 24.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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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즐겨 보는 프로그램은 아니지만 어제는 우연히 '긴급출동 SOS 24'를 보았습니다. 언제나 이 방송에서는 차마 인간이라고 하기 어려운 악인들과, 그에 의한 피해자로서 차마 인간의 삶이라고 하기 어려운 처참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어제의 방송에서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주인공의 이름이 방송중에 밝혀졌지만 저는 굳이 인용하고 싶지 않으니 그저 '청년'이라고만 칭하겠습니다.

청년은 원래 지방에서 가족들과 함께 생활했었으나 18세 되던 해에 서울로 올라오면서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와 누나와 헤어져 혼자 남게 됩니다. 생활고 때문이었던 것 같기는 한데, 청년은 좀처럼 자세한 설명을 하지 못했습니다. 어쩌다가 문제의 그 돼지농장 주인을 만나게 되었고, 어린 청년은 대책없이 그를 따라와 농장일을 시작합니다.


그 후로 13년이 흘렀습니다. 소년은 어느새 31세의 청년이 되었습니다. 처음 일을 시작할 당시만 해도 "월급은 얼마나 주실 건가요?" 하고 농장주에게 또랑또랑하게 물어볼 줄도 알았던 청년은 그 동안 완전히 얼빠진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하루종일 2천마리의 돼지를 사육하며 분뇨를 치우는 일을 혼자 맡아 하면서도 단 한 번의 임금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의 잠자리는 주인집에 붙어 있는 창고 비슷한 허름한 방이었으며, 한 달에 한 번 정도 외출할 때에도 주인부부와 함께 해야 했습니다.

청년의 가혹한 삶을 보다못한 이웃 사람들의 신고로 SOS팀이 출동했습니다. 그러나 청년은 도움의 손길을 거절했습니다. "사장님한테 들키면 안돼요. 찾아오지 마세요" 어눌한 말투였지만 사람을 피하는 태도는 그지없이 단호했습니다. 심지어 사장 내외가 외출하고 없는 사이에도 그는 쉬임없이 혼자 일만 했습니다.

나중엔 취재팀에게 아주 약간 마음을 열었지만 "어딜 가나 마찬가지예요. 사는 게 이런 거죠 뭐" 하고는 젊은이답지 않게 세상의 모든 희망을 놓아버린 듯 맥없는 말만 했습니다. 그간의 삶이 얼마나 혹독했던지 얼굴에는 표정이 전혀 없었고, 한쪽 다리는 절고 있었으며, 치아는 앞니마저 군데군데 빠지고 썩어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가끔 때렸는데 이제는 안 때려요" 마치 그것만 해도 다행이라는 듯 청년은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변호사를 섭외하여 사장 내외의 범법 행위를 추궁하며 SOS 제작팀은 청년을 그 지옥에서 구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미성년자인 상태에서 사장을 만났던 소년은 그 동안 한 번도 신분증을 발급받아 본 적도 없이 유령처럼 생활해 왔던 것이었습니다. 건강검진 결과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는 치아는 고작 5개에 불과했으며, 폭력으로 인해 골절된 후 오래 치료받지 못해 한쪽 발목은 경미한 수준의 장애가 남았으며, 심각한 수준의 하지정맥류는 당장 수술이 필요한 지경이었습니다. 지난 13년 동안 단 한 번도 병원에 가본 적 없이 그저 매일매일 돼지목장에서 일만 했던 청년이었습니다.

SOS 제작팀은 청년의 아버지와 누나를 찾아내어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치매에 걸렸고, 작은누나는 정신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20세나 위인 큰누나는 오랜만에 만난 막내 남동생을 얼싸안고 반가움의 눈물을 흘렸으며, 가족과의 상봉은 그의 마음에 큰 위안이 되어 주었습니다. 심각한 대인기피증을 치료하기 위해 정신과 치료는 물론이고 그와 비슷한 처지에서 구출된 사람들의 새 출발을 도와주는 센터에도 들어가 나름 활기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청년은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회복을 시작했습니다. 어린아이 수준으로 퇴화되어 버린 정신으로 아무와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넋놓은 표정으로 지내던 그가, 이제는 활짝 웃으며 솔직한 말들을 하고, 의욕적인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는 여러 사람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센터에서 만난 한 여성을 가리키며 "제가 이분을 좋아해요" 라고 거침없이 말하기도 했습니다.

무척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청년의 앞으로의 삶이 저는 더욱 염려되었습니다.

청년이 만난 사람들은 너무 극과 극이었습니다. 너무 나쁜 사람들(농장 주인 부부), 그리고 너무 좋은 사람들(SOS 제작팀 및 센터 사람들), 이렇게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만이 청년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희망에 가득차 있을 것입니다. 자기는 그 동안 나쁜 사람들에게 얽매여 있다가 좋은 사람들에게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좋은 사람들은 그를 위해 비싼 임플란트 치료까지 그냥 받게 해주었습니다. 온갖 병원치료는 물론이며, 그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헤어졌던 가족들도 다시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신분증도 만들어 주었고, 좋은 옷도 사주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너무나 좋은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좋아하는 여자까지 생겼습니다. 그는 지금 너무나 행복합니다.


그러나 그 행복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에게 향한 도움의 손길은 절반 이상이 '방송' 때문이었음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순전히 100% 인간에 대한 연민 때문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습니다. 이제 방송이 끝났으니 그는 머지않아 홀로서기를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센터의 신세도 언제까지 한없이 질 수는 없습니다. 치매에 걸린 늙은 아버지와 정신병을 앓는 작은 누나를 가난한 큰누나가 홀로 돌보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앞에 놓인 삶이 그리 평탄하지만은 않을 것을 짐작합니다.

그는 마땅한 기술을 가진 것도 없습니다. 몸도 성치 않습니다. 지금 당장은 세상이 착한 사람들로 가득해 보이고 따뜻해 보여서, 자신감과 희망에 가득차 있겠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세상은 그렇게 따뜻한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냉혹한 곳입니다. 그가 지금까지 받아왔던 것처럼 학대를 받을 일이야 없겠지만, 오로지 자기의 능력으로 똑바로 서지 않으면 누구에게서나 외면받을 수밖에 없는 곳이 세상입니다.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 급작스럽게 한 여인을 가리키며 "내가 이 여자를 좋아한다" 고 불쑥 말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저의 근심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그의 행동에서 지나칠 만큼 무모한 자신감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모든 정상적인 욕구는 그 동안 심하게 억눌려 왔습니다. 이제 그것이 걷잡을 수 없이 분출되기 시작합니다. 지금이야 모두들 생기를 차려가는 그의 모습을 대견하게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런 변화조차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줍니다. 하지만 그런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언제까지 그의 그런 행동을 웃으며 받아줄지는 의문입니다.

마땅히 세상을 배워야 할 시기에 세상을 배우지 못했던 그에게, 너무 급작스레 변화가 닥쳐왔습니다. 이제까지와는 정반대의 상황에 처한 그는, 단순한 만큼 현재의 상황을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완전 흡수해 버린 듯 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이제는 자기 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 아님을 잘 알고 있는 저는 그의 앞날이 염려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선 그를 지옥에서 구해내는 것이 급선무이긴 했지만, 좀 더 천천히 변화를 시도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손가락 하나만큼의 도움을 준 것도 없으면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부끄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가 마주했던 브라운관 속의 가엾은 청년이 저는 자꾸만 생각나고 걱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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