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청춘시대' 냉엄하고 고결한 한예리의 매력 본문
셰어하우스 '벨 에포크'에는 다섯 명의 청춘 여성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생활고와 동생의 병원비 때문에 아르바이트와 휴학을 반복하느라 28세가 되도록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윤진명(한예리), 첫사랑이자 현재의 남자친구인 고두영(지일주)에게 헌신을 바치지만 그 대가로 헌신짝 취급을 받고 있는 22세의 순정파 여대생 정예은(한승연), 유부남을 포함해서 돈 많은 세 명의 애인 사이를 오가며 한 달에 800만원 가량을 물쓰듯 사용하는 24세의 꽃뱀(?) 강이나(류화영), 예쁘고 똑똑하고 성격 좋지만 당최 남자가 붙질 않아 모태솔로임을 한탄하는 22세 여대생 송지원(박은빈), 그리고 갓 스무 살의 신입생으로 아직은 모든 것이 낯설고 수줍은 유은재(박혜수).
'청춘시대'는 제각각 다른 개성을 지닌 이 여성들의 캐릭터를 순차적으로 소개하며 시작된다. 현재 4회까지 방송되었는데 1회의 주인공은 '벨 에포크'에 새로 입주한 유은재였고, 2회의 주인공은 못된 남친 때문에 생고생 중인 정예은이었고, 3회의 주인공은 한 번 잘못 들여놓은 발걸음을 되돌리지 못해 스스로를 혐오하며 살아가는 강이나였고, 4회의 주인공은 가난의 덫에 걸려 사랑도 자존심도 포기한 채 벅찬 인생을 견뎌가고 있는 윤진명이었다. 다음 주 5회의 주인공은 아마도 털털한 성격에 귀신 보는 능력을 지닌 송지원이 될 것이고, 수많은 개성을 지닌 시청자들은 저마다 그녀들 중 자기와 가장 비슷한 캐릭터에 감정을 이입하며 드라마를 보게 될 것이다.
나와 비슷하다고 하기엔 좀 무리가 있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 가장 공감이 가는 캐릭터는 윤진명이었다. 정예은, 송지원, 유은재는 제각각 어려움 속에서도 20대 초반의 여대생답게 발랄함과 풋풋함을 자아내는데, 그에 비해 윤진명은 매우 조용하고 차분하며 깊이 가라앉아 있다. 그녀와 이유는 달랐지만, 나 역시 그녀와 비슷한 느낌의 20대를 보냈기에 동질감을 느끼는 것 같다. 윤진명이 풍기는 분위기를 나쁘게 표현하자면 칙칙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 냉정함과 엄숙함이 무척이나 친밀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정예은이나 유은재처럼 평범해지고 싶어하지만, 어쩌면 그녀의 청춘은 평범하지 않기에 더욱 특별하게 빛나는 건지도 모른다.
윤진명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인생관과 삶의 방식에서 그녀와 대척점에 놓여 있는 강이나의 이야기를 먼저 해봐야 할 것 같다. 윤진명이 인생을 어렵게 사는 것과 달리 강이나는 아주 쉽게 산다. 가난하고 불쌍한 청춘인 것은 매한가지인데 뼈빠지게 고생 안 하고도 편안하고 호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면, 그까짓 몸뚱아리 몇 번 굴리는 것이 뭐 어려운 일이겠냐고 강이나는 생각한다. 매력적인 육체를 지닌 것은 젊음과 더불어 자신의 유일한 특권인데, 자기가 가진 것을 팔아서 호화롭게 사는 것이 왜 나쁘냐고 생각한다. 어차피 늙으면 죽고 썩어 없어질 몸인데, 쉰내 나도록 아끼고 또 아껴봤자 좋을 것이 뭐겠냐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 그렇게 생각해도, 쉴 새 없는 노동에 바쁘고 초라한 윤진명 앞에서 강이나는 스스로 기가 죽는다. 진명의 찢어진 운동화 앞에서 자신의 명품 구두가 빛을 잃는다. 단돈 만원도 안 되는 진명의 낡은 티셔츠 앞에서 자신의 수백만원 짜리 블라우스가 못 견디게 부끄러워진다. 자기는 잘못한 게 없는데, 그저 가진 것을 이용해서 좀 쉽게 살고 있을 뿐인데, 바보처럼 힘들게 살아가는 진명 앞에서 왜 자꾸만 움츠러드는 건지 알 수 없어 이나는 화가 난다. 홧김에 부자 애인과 함께 진명이 알바생으로 근무하는 레스토랑에 손님으로 찾아가 모욕을 주기도 하지만, 상관 없다는 듯 무덤덤한 진명의 표정에는 더욱 화가 치솟을 뿐이다.
"언니는 왜 그러고 살아요? 엄청 힘들어 보이는데." 이나의 말에 진명은 대답한다. "엄청 힘들어." 이나가 말한다. "쉽게 사는 방법도 있어. 남자 하나 소개시켜 줄까요?" 진명이 대답한다. "됐어." 구차한 설명도 이유도 없다. 그냥 "됐어" 한 마디뿐이다. 숨겨왔던 삶의 방식이 들통난 후 노골적으로 자기를 멸시하고 배척하는 예은의 모습보다도, 그렇게 차갑고 건조한 진명의 태도가 이나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다. 어쩌면 강이나는 다섯 명 중 가장 안타깝고 불쌍한 캐릭터다. 일시적인 안락함과 호화로움의 대가로 인간다운 존엄성과 자긍심을 포기해버린 삶의 종착역에는 환멸과 허무 외에 남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척박한 인생이지만 윤진명도 분명 여자이고 청춘이기에, 그녀에게도 유혹의 손길이 다가왔다. 하나는 건전한 사랑의 유혹이고, 또 하나는 직장 내에서의 우월한 위치를 이용한 갑질의 유혹이었다. 레스토랑의 젊은 셰프 박재완(윤박)은 어느 날부터 진명을 눈여겨 보았고,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다가섰다. 그런 재완의 다정함에 진명의 마음도 저절로 설레며 끌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까칠한 홀 담당 매니저(민성욱) 역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심하게 다쳐서 밴드를 감은 손가락으로 서빙을 하던 진명은 접시를 손님 테이블에 놓다가 덜컥 떨어뜨리는 실수를 저질렀고, 그런 진명을 호되게 야단친 매니저는 퇴근 후 그녀를 따로 불렀다.
야단칠 때와 달리 친절한 말투로 진명을 위로하며, 자기 역시 가난한 청춘을 보냈기에 너의 힘겨움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매니저는 언뜻 호인으로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식사 후 데려다 주는 차 안에서 슬쩍 그녀의 허벅지에 손을 올려 주무르며 "손가락 다 나을 때까지는 서빙하지 말고 카운터에서 일해." 라고 말하는 순간 음흉한 속내가 여지없이 드러났다.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선심을 베풀며, 그것을 빌미로 힘없는 여자를 희롱하는 그 남자는 오갈 데 없는 파렴치한이었다. 진명은 미동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감사합니다" 하고 말했다. 비록 아르바이트일 망정 그녀는 직장을 잃을 수 없었고, 핏물이 배어나오는 손으로 음식을 서빙하기는 어려운 현실이었다.
하지만 윤진명은 그 순간 매니저의 손길을 단호히 뿌리치지 못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녀의 냉엄한 성품에, 더러운 손길을 내치지 않고 묵인한 자신의 행동은 죄악이었다. 며칠 후 한밤중에 술에 취한 강이나가 습관처럼 '벨 에포크'를 찾아와 잠들었을 때,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윤진명은 생각했다. "그 동안 나는 너를 경멸했어. 너보다 내가 잘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아니었어. 나에겐 그저 너만큼의 유혹이 없었던 것뿐이야." 그 순간 윤진명이라는 캐릭터의 진정한 매력이 폭발했다. 그녀는 냉정하고 엄숙할 뿐만 아니라 지극히 겸손했다. 겸손이라는 마지막 퍼즐이 채워지면서, 그녀가 얼마나 고결한 사람인지가 증명되었다.
직장을 잃을지 모른다는 절박함 때문에, 허벅지에 손을 올리는 스킨십을 즉시 뿌리치지 못했다고 해서 윤진명과 강이나가 똑같은 사람일 수는 없다. 앞으로의 전개를 보아야 알겠지만, 매니저가 또 다시 파렴치한 손길을 뻗어 오거나 더 깊은 관계를 요구한다면, 진명은 반드시 그 제안을 단호히 거절할 것이다. 설령 일자리를 잃게 되더라도, 목숨줄과 같은 자긍심을 잃는 것보다는 훨씬 낫기 때문이다. 수많은 남자들과 잠자리를 함께 하는 대가로 수백만원씩의 화대를 받아 챙기며 살아가는 강이나와 어찌 같겠는가? 그런데도 진명은 한 순간 유혹에 흔들린 자신을 보며, 스스로 오만함을 내려놓고 타인에게 마음을 열었다. 절로 탄복이 우러나는 마음가짐이었다.
누구보다 자신에게 엄격한 진명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은 가족에 대한 죄책감이다. 6년째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는 남동생이, 이제는 그만 숨을 거두어 주기를 그녀는 바라고 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멈출 수도 없는 병원비 쏟아붓기를 이제는 그만하고 싶다. 사실은 원망스럽다. 누워있는 동생이 원망스럽고, 그런 동생을 감당할 능력은 못 되면서 포기하지도 못한 채 붙들고 있는 엄마가 원망스럽다. 하지만 누나로서 동생이 죽기를 바라다니,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그녀는 가장 끔찍하다. 그래서 진명은 아무리 가혹하게 일해도 결코 자신에게 용서받을 수 없는 천하의 죄인이다.
윤진명은 박재완의 사랑을 간절히 원하면서도 그를 밀어낸다. "나 좋아하지 마요. 누가 날 좋아한다고 생각하면, 약해져요. 여기서 약해지면, 정말 끝장이에요." 한 번 기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릴 것을 알기에, 그녀는 처음부터 기대지 않고 제 힘으로 꼿꼿이 버티려 한다. 어차피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의 짐은 홀로 감당할 수밖에 없음을 알기에, 무턱대고 의지하기에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알기에, 헛된 희망에 부풀어 오르려는 마음을 애써 다독이며 서러운 사랑을 밀어낸다. 진명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박재완의 몫이다. 그의 사랑이 진실하다면, 여기서 이대로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다.
냉엄하면서도 고결한 윤진명의 캐릭터를 배우 한예리는 더할 수 없이 생생하고 명료하게 그려낸다. 한예리가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윤진명을 이만큼 살려내지는 못했을 것 같다. 윤진명과 혼연일체의 호흡을 자랑하는 한예리의 열연에 찬사를 보내며, 부디 진명의 안타까운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빌어 본다. 비록 그것이 현실적이든 아니든, 설령 환상에 가까울지라도, 이 시대의 힘겨운 청춘을 작게나마 위로할 수 있도록,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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