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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화' 옥녀(진세연)라는 여주인공이 특별한 이유 본문

드라마를 보다

'옥중화' 옥녀(진세연)라는 여주인공이 특별한 이유

빛무리~ 2016. 5. 7.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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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화'의 옥녀(진세연, 아역 정다빈)는 매우 특별하다. 필자의 개인적 체험으로는 이제껏 그 어떤 드라마에서도 본 적 없는 여주인공이다. 특히 '대장금'을 비롯한 이병훈 감독의 전작들에 어떤 여성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는지를 돌이켜 보면 더욱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새롭고도 흥미진진한 실험이다. 사실 '옥녀'와 같은 캐릭터는 착하고 올곧은 여주인공의 대척점에서 끈질기게 괴롭히는 악녀의 포지션에 훨씬 적합하기 때문이다. '옥중화' 1~2회를 시청한 후 옥녀에게서 떠오른 이미지는 장금(이영애)이 아니라 금영(홍리나) 또는 최상궁(견미리)이었다. 



고작 열 다섯 살의 어린 소녀임에도 옥녀는 매우 영악스럽고 정치적인 기질을 지녔다. 그녀는 절대 속마음을 겉으로 내뱉지 않고, 상대방의 귀에 꿀처럼 달게 느껴질 소리만을 골라서 한다. 대놓고 티나게 아첨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진심을 가장하여 말하기 때문에, 어지간한 사람은 모두 헤벌쭉 미소를 지으며 넘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남의 환심을 사는 데는 옥녀를 따라올 자가 없다. 똑똑하고 부지런하고 말솜씨 좋고 상냥한 데다가 예쁜 얼굴에 항상 웃음까지 띠고 다니는데 누가 그녀를 좋아하지 않으랴? 그렇게 열 다섯 살 옥녀는 전옥서의 모든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었다. 


고금의 사회를 통틀어 주변에 사람이 많다는 것, 자기 편이 많다는 것은 엄청난 힘과 권력을 의미한다. 사실 감옥에서 태어나 곧바로 어미를 잃고 천애고아가 되어버린 여자아이라니, 조선 사회에 그보다 더 천하고 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가 있었으랴? 하지만 옥녀는 더 이상 밑바닥으로 내려갈 수조차 없는 그 위치에서, 오직 자신의 재능으로 힘을 얻고 권력을 움켜쥐고 기댈 곳을 마련했다. 정말 놀랍고도 무서운 능력이다. 그런데 능력 외에도 옥녀에게는 또 한 가지 중요한 특성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가치관'이다. 기존 드라마의 여주인공들과 달리 옥녀에게 있어 '양심'이나 '정의' 따위는 별로 중요치 않다. 



옥녀에게 최우선의 가치는 오직 '생존'과 '이익'이다. 똑똑하고 호기심 많은 옥녀는 무엇이든 배우기를 즐긴다. 도둑질하다가 잡혀 온 죄수에게서 전대치기(소매치기) 수법도 배우고, 옥에 갇힌 토정 이지함(주진모)으로부터 사주풀이 및 관상학까지 배운다. 그렇게 배우고 익힌 것들을 알맞은 때와 장소에 적절히 이용하여 생존과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 배움의 내용이나 실천의 수법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심지어 필요하다면 살인까지도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저지르는 그녀다. 양심의 가책? 뭐 그런 거 없다. 자기 자신을 지키고, 또 친한 사람들을 지킬 수만 있다면 옥녀는 아무것도 못할 일이 없다. 


살인조차도 그럴진대 거짓말 따위가 무슨 대수랴?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남의 환심을 살 수 있는 거짓말의 재능은 옥녀의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한 무기이며 자산이다. 아련한 눈망울에서 순진함이 뚝뚝 떨어질 듯한 소녀의 혓바닥에 사시사철 앙큼한 거짓말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누가 짐작이나 하겠는가? 윤원형(정준호)의 관상에서 옥녀가 읽어낸 진짜 미래는 형살(형벌로 죽음을 당함)과 멸문지화였다. 하지만 옥녀는 진지한 얼굴로 온갖 지식과 고서(古書)를 들먹이며 듣기 좋은 거짓말을 해 준다. "나으리의 벼슬은 영의정에 이를 것이며 그 부귀영화는 대대손손 이어질 것이옵니다!"



 

과연 크게 흡족한 윤원형은 옥녀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다음날 옥녀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 일의 전후 사정을 이지함에게 털어놓으니, 이지함은 못 당하겠다는 듯 껄껄 웃으며 외친다. "크하하하, 요망한 것! 그래, 잘했다, 잘했어!" 한편 윤원형으로부터 신통한 소녀의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이 생긴 정난정(박주미)은 옥녀를 불러들여 자신의 관상을 보게 하는데, 옥녀의 소름돋는 말재주는 또 한 번 빛을 발한다. "어제 나으리의 관상을 뵈올 때 나무와 불의 기운이 다소 부족해 보였는데, 오늘 이렇게 마님의 관상을 뵈오니 현재의 부귀영화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겠나이다. 나으리에게 부족한 기운을 마님께서 채워주고 계시는군요!" 


그 때 윤원형과 정난정의 외동딸 윤신혜(노정의)가 들어오는데, 옥녀와 비슷한 또래의 신혜는 보자마자 노골적으로 옥녀를 천대하며 무시한다. "어머니는 이런 천한 계집애의 말을 무엇하러 듣고 계세요? 저는 사주나 관상같은 것 믿지 않아요!" 하지만 옥녀는 도리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가씨의 말씀이 무척 옳습니다. 옛말에도 사주보다는 관상이요 관상보다는 심상이라 하였으니, 어떤 마음을 지녔는지가 가장 중요하겠지요. 그럼에도 제가 감히 아가씨의 관상을 본다면 천하의 귀상이라,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은 부귀영화를 평생토록 누리실 것이옵니다!" 결국 신혜의 오만한 입가에도 살풋 미소가 떠오르니, 옥녀의 처세술은 가히 요물이라 할만하다. 



하지만 옥녀의 요망함을 탓할 수도 없는 것이, 전옥서에서 태어나 죄수들 틈바구니에서 혈혈단신으로 살아남아야 했던 어린 소녀에게 또 무슨 기회와 선택지가 있었겠는가? 매일 해가 뜨면 그 날 하루를 무사히 살아남는 것만이 그녀의 과제였을 것이다. 언제 그 누구에게 맞아 죽거나 짓밟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팔자였다. 전옥서의 말단 서리인 지천득(정은표)이 양아버지라고는 하지만, 측은지심에 잠시 거두었을 뿐 핏줄처럼 진한 정을 품었을 리는 만무했다. 당장 죽어도 눈물 한 방울 흘려줄 사람 없는 외톨이 소녀가 혼자 살아남는 방법이란, 있는 힘을 다해 남들의 환심을 사는 것밖에 더 있었으랴! 


어느 덧 전옥서의 모든 관리와 친분을 쌓은 옥녀는 자기 뜻대로 죄수들의 청탁을 들어줄 수 있는 힘과 권력을 쥐게 되는데, 남주인공 윤태원(고수)과의 인연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방을 옮겨 달라는 윤태원의 청탁을 들어주는 대신, 옥녀는 깜찍한 얼굴로 차도살인을 의뢰한다. 양부 지천득에게 돈을 빌려주고는 그것을 빌미삼아 협박을 일삼는 왈패 강만보를 쥐도새도 모르게 죽여달라는 것이었다. 흔쾌히 응낙한 윤태원은 한밤중에 눈부신 솜씨로 강만보를 처리하고, 며칠 후 석방되며 옥녀에게 말한다. "삼계나루에 올 일 있으면 나를 찾아!" 서로 후일을 기약하며 마주보고 웃는 두 사람의 얼굴은 그저 해맑기만 하다. (둘이 공모해서 사람 죽인 애들 맞아? 물론 강만보가 악인이긴 했지만..;;)



옥녀와 윤태원의 캐릭터는 주인공이 선하고 정의로워야 한다는 무언의 공식을 여지없이 깨부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현재의 시청자가 간절히 원하는 '사이다 드라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 동안 착하고 정의로운 주인공들이 영악하고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악역들에게 속절없이 당하는 스토리를 지켜보며 우리의 가슴이 얼마나 문드러졌던가? 이제 악역보다도 한층 더 영악하고 깔끔 잔혹한 수단을 자랑하는 남녀 주인공이 50부작의 항해 준비를 마쳤다. 특별히 착하지는 않아도 그들은 언제나 약한 민초들의 편에서 시대의 권력자들과 맞설 것이니, 일상의 답답함에 지친 흙수저들에게는 더욱 속시원한 힐링 드라마가 되어줄 듯하다. 시청률 63.5%의 신화를 이루었던 1999년 '허준'에 이어, 최완규 작가와 이병훈 PD의 힘찬 재도약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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