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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치' 신하경(김아중)의 원칙과 고집이 불편했던 진짜 이유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펀치

'펀치' 신하경(김아중)의 원칙과 고집이 불편했던 진짜 이유

빛무리~ 2015. 1. 14.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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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수 작가의 '펀치'를 보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나 자신이 예전과는 참 많이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예전 같으면 당연히 정의로운 여주인공 신하경(김아중)을 가장 멋진 캐릭터로 여기고 응원했을 것이며, 이태준(조재현)을 비롯한 악역들의 파렴치함에 솟구치는 분노로 몸을 떨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자신의 힘이 부족한 줄을 뻔히 알면서도 고집스레 정의와 원칙을 지키려는 신하경의 모습을 보며, 내 마음속에는 칭찬과 응원이 아니라 답답함과 안타까움이 가득 차오른다. 반면 이태준과 윤지숙(최명길) 등의 힘센 악역을 볼 때는 뜨거운 분노보다 앞서 차가운 두려움이 솟구친다. 어쩌면 대다수의 연약한 인간들에게 있어, 세상과 현실을 조금씩 더 많이 알게 된다는 것은 이처럼 조금씩 더 겁쟁이가 되어간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스스로의 이런 모습을 차마 인정하기도 감당하기도 벅차서 혼란스러워하던 중 '신하경이 불편하다고? 펀치, 비상식에 날리는 한 방' 이라는 인터넷 기사를 발견했다. 핵심만 요약하자면, 글쓴이는 현재 많은 시청자들이 '신하경' 캐릭터를 긍정적 시선보다 불편한 시선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밝힌 후, 그 이유는 '우리 사회가 언제부턴지 '비상식의 사회'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비상식이 당연시되는 사회 속에서 홀로 상식과 원칙을 지키려는 사람은 '이질적인 존재'로 겉돌게 된다. 비상식의 사회에서 원리와 원칙은 오직 '방해'로 여겨질 뿐이기에, 그것을 고집하는 사람은 불편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도 있겠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신하경을 불편하게 여기는 이유는 과연 나의 머릿속 사상과 가슴속 양심이 어느 사이엔가 상식과 원칙을 저버리고 비상식에 길들여졌기 때문일까? 물론 나이가 들어갈수록 어릴 때만큼 순수하지 않다는 것쯤은 느끼고 있지만, 예전만은 못해도 나는 여전히 고집스런 원칙주의자이며, 아직도 종종 대학 시절처럼 지나치게 단호한 어조로 정의와 불의를 논함으로써 온화한 타인들을 당황시키곤 한다. 무조건 '아닌 것은 아닌 것'이라고 외치며 잘못한 사람을 여지없이 비난하는 내 모습은 (설령 그것이 드라마 캐릭터에 불과할지언정) 꽤 많은 독자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이런 내가 신하경을 불편하게 느끼는 이유가 정말 비상식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일까? 



잠시 생각해 보니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신하경에게서 느껴지는 불편함의 원인은 상식과 원칙의 이질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녀의 무능력과 무모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깨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뻔히 아는데, 힘도 없으면서 바윗돌을 향해 무모한 박치기를 해대려는 그 모습이 답답하고 안타까운 것이었다. 더욱이 그녀에게는 어린 딸 예린이(김지영)까지 있는데! 악성 뇌종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박정환(김래원)은 삶의 마지막 나날을 치열하게 불태우며 오직 사랑하는 하경과 예린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건만, 그 와중에 신하경은 박정환을 돕기는 커녕 앞장서서 그를 방해만 했다. 


야심찬 포부와 의욕에 걸맞는 실질적 능력이 없다는 것은 신하경의 치명적 약점이다. 정의로운 사회,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그녀의 포부는 더없이 굳건하고 훌륭하지만, 순진해선지 눈치가 없어선지 종종 악역에게 휘둘리거나 이용당하곤 한다. 물론 신하경은 올곧은 신념에 따라 행동했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한 번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오히려 이태준의 올가미에 걸려 누명을 쓰거나 바보처럼 윤지숙의 꼭두각시 노릇을 했을 뿐이다. 힘을 갖추지 못한 자의 신념과 용기는 종종 이렇듯 독화살이 되어 자신에게로 다시 날아온다. 이런 상황에서는 신념을 고집하면 할수록 멋있는 게 아니라 답답해 보일 수밖에 없다.



 

신하경이 누명을 쓰고 위기에 처하자, 박정환은 뇌종양의 고통을 무릅쓰고 사방팔방 동분서주해서 그녀를 구해 주었다. 하지만 신하경은 고마워하기는 커녕 정의와 원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박정환을 날카롭게 비난한다. 정말 속터지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이 험한 세상 속에서 안간힘을 다해 자기를 지켜주고 자기 편을 들어주는 사람한테 그토록 모질게 대하다니! 정의고 원칙이고 상식이고를 떠나서, 박정환을 매섭게 몰아붙이는 신하경의 모습은 인간적으로도 정말이지 매력 꽝이었다. 원래 박경수 작가가 여성 캐릭터를 섬세하게 그려내지 못하는 편이긴 하지만, 특히 신하경 캐릭터는 뭐랄까 사이보그 같은 느낌이 든다. "정의로 뭉친 주먹 로보트 태권~♬"처럼 '정의를 위해 태어난 로봇'같을 뿐 인간다운 감정이라고는 아예 메마른 것처럼 보인다. 


"하경아, 세상은 안 바뀌어. 내 인생 잘 풀리면 정의로운 세상이고, 내 인생 꼬이면 더러운 세상이야. 하경이 너나 잘 살아. 눈 감아 귀 막고, 예린이만 봐!" 절대 흥분하지 않는 박정환의 담담한 목소리가 피 맺힌 절규처럼 들려온다. (아직도 어린애처럼 세상 물정 모르는 하경이를 이제 딸 예린이와 단둘이 남겨두고 가야 하는데, 과연 이 더럽고 험한 세상 속에서 하경이 혼자 예린이를 지켜낼 수 있을까?) 그저 무모한 용기만 있을 뿐, 위선자의 가면 뒤 검은 얼굴을 알아채지도 못하고 제 몸 하나 지킬 줄도 모르면서, 밤낮 순진하게 원리 원칙만 고집하는 신하경을 보며 답답하게 뭉그러지는 박정환의 가슴속 고통이 그대로 전해온다. 



세상의 더러운 권력에 영합하여 살아온 박정환의 지난 삶이 결코 옳았던 것은 아니다. 더러운 세상에 아무리 절망했어도 그렇게 변절하여 반대 방향으로 뛰어가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이 아무리 부질없음을 느꼈다 해도 적극적으로 더욱 심하게 더럽혀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제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짜내어 세상의 더러운 권력과 맞서 싸우는 박정환의 모습에는 절절한 공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 싸움을 통해 지키려는 것이 거창한 사회 정의가 아니라 사랑하는 여인과 딸이라서 더욱 공감이 된다. 


사회 전체에 팽배한 '가족 이기주의'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최근 높아지고 있음을 안다. 모두들 자기 자신과 가족들만 챙길 뿐, 사회 전반에 대한 관심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심은 점점 옅어지고 있음을 우려하는 것이다. 물론 그와 같은 시선에도 타당한 부분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제 가족을 외면하고 사회적 문제에만 골몰한다면 그것이 과연 정의이며 상식일까? 가족은 인간이 타인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최소 단위이며, 가정을 이룬 사람들이 최우선적으로 사랑하고 지켜야 할 존재는 당연히 가족일 수밖에 없다. 또 그래야 한다. 가족 외의 사람들은 가족 다음 순서가 되는 것이다. 이 순서가 바뀌어서 가족보다 그 외의 사람들을 더 많이 사랑하면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불교나 천주교의 성직자처럼 홀몸이라면 몰라도, 가정 있는 사람들이 제 가족의 안위를 나몰라라 한 채 사회 정의를 지키는 일에만 몰두한다면 그것이 과연 올바른 삶일까? 애 엄마가 누명을 쓰고 유치장에 붙들려 갔는데, 어린 딸이 날마다 엄마를 찾으며 울부짖는데, 그 상황에서도 정의와 원칙을 지켜야 하니까 악의 세력을 먼저 응징해야겠다고, 애 엄마를 구하는 일보다 이태준을 공격하는 일을 우선순위로 선택했다면 과연 박정환의 인간다운 매력이 살아났을까? 예린이 아빠 박정환에게는 그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예린이 엄마 신하경을 구해내는 일이 가장 먼저였을 수밖에 없다. 로봇이 아닌 인간이니까, 사랑이라는 감정을 아는 인간이니까. 


다행히 박정환의 시한부를 알고 난 후 신하경은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현실을 직시한다. 그토록 믿어왔던 윤지숙이 얼마나 위선적인 인간인지를, 자신이 누구와 힘을 합쳐야 하는지를 깨닫는다. 이제부터는 배수진을 친 박정환과 신하경이 절대 권력자인 이태준과 윤지숙을 상대로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할 것이다. 신하경 혼자의 싸움은 응원할 수 없었으나, 박정환과 함께 하는 싸움은 얼마든지 응원할 수 있다. 무능한 신하경의 무모한 용기는 그녀 자신과 가족에게 상처를 입힐 것이었지만, 노련한 박정환의 마지막 사랑과 용기는 끝내 가족을 지켜낼 것이기 때문이다. 신하경 캐릭터가 조금만 더 유능하고 현명하게 그려졌다면, 이 비상식의 사회에서 원칙과 상식을 지키려 한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사람의 불편한 시선을 받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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