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STORY 2014 우수블로그
TISTORY 2012 우수블로그
TISTORY 2011 우수블로그
TISTORY 2010 우수블로그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관리 메뉴

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안재욱, 다시 찬란한 삶을 노래하라 본문

예능과 다큐멘터리

안재욱, 다시 찬란한 삶을 노래하라

빛무리~ 2009. 9. 3. 11:48
반응형


1994년 데뷔작 '눈먼 새의 노래'에서 보여준 안재욱의 존재감은 충격적이었다. 드라마 자체가 워낙 좋기도 했거니와 전혀 신인답지 않은 안재욱의 연기력은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내 친구의 어머님을 비롯하여 몇몇 어르신들은 진짜 맹인이 드라마에 나온 줄 아셨다고 한다.

나는 '눈먼 새의 노래'를 운 좋게 녹화할 수가 있었는데, 보고 또 보고, 친구를 집에 데려와서 같이 또 보고, 안재욱의 연기를 보며 친구와 함께 감탄했다. "이름이 뭐라고? 안재욱? 오호.. 마음에 드는 걸~" 친구의 말에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동의했다.


그때부터 몇년간 나는 안재욱의 팬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특히 일요 아침드라마 '짝'을 보는 재미에 휴일의 기쁨은 배가되곤 했다. 남들이 그 당시 잘 나가던 연예인의 이름을 대며 좋다고 말하면 나는 혼자 불쑥 "나는 안재욱이 제일 좋더라~♡" 하고 말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보통 잠시 생각하다가 "안재욱이 누구더라?" 하고 물었다. 그런 연예인이 있다는 걸 알긴 아는데 언뜻 생각이 안 나는 거였다. "일요일 아침에 '짝'에서 김혜수의 조카로 나오는 사람 있잖아." 하면 그제서야 끄덕거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마치 안재욱의 유일한 팬이기라도 한 양, 만족감에 어깨를 으쓱했다.

1997년 '별은 내 가슴에'로 안재욱이 그야말로 톱스타가 되어버리자 솔직히 나의 그런 소소한 만족감은 사라져버렸다. 누구나 다 그의 이름만 들으면 환호성을 내지르는 마당에 내가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특별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별은 내 가슴에' 이전까지는 왠지 소년과 청년의 중간 지점에 서 있는 듯한 풋풋함이 느껴졌었는데, 그런 이미지는 급속도로 사그라들었다. 갑자기 원숙한 남자가 되어버린 듯한 안재욱의 모습이 내게는 좀 낯설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나는 안재욱의 팬이라고 말하고 다니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훌륭한 연기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가 작품을 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손꼽아 시청을 기다리곤 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그의 작품은 '선녀와 사기꾼'이었다. 미워할 수 없는 천재 사기꾼 정재경 역할은 그야말로 안재욱이 아니었다면 소화해낼 수 없었을 배역이라고까지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이어서 '오!필승 봉순영'과 '미스터 굿바이'까지도 나는 변함없이 그의 작품을 기다렸다가 본방사수하는 열혈시청자였다.

그런데 2008년, 그 문제의 작품 '사랑해'의 경우는 초반에 4회 정도 시청하고는 그냥 포기하고 말았다. 도저히 더 볼 수가 없었다. 왜 그랬을까?

'사랑해'에서 안재욱이 맡았던 석철수라는 캐릭터는 너무 현실적인 인물이었다. 드라마의 등장인물은 보통 그렇게 현실적이지 않다. 보통은 약간이라도 환상이 가미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석철수는 바로 옆집에 사는 사람이라고 해도 신기할 게 없을 만큼 현실적으로 그려졌기에 꽤나 독특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석철수가 드라마 초반에 결코 호감형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무명 만화가이면서 자기가 굉장히 잘난 줄 아는 자뻑 캐릭터에다가, 어떻게든 어린 여자를 살살 꼬드겨서 하룻밤 깃발이나 꽂아볼까 고민하고, 정작 일을 저질러 놓고는 여자가 임신했다고 하니까 결혼은 죽어도 못하겠다고 도망이나 다니는, 정말 최악의 놈팽이가 석철수였다. 현실에 존재할 법한 인물이기 때문에 더 보기가 싫었다. 게다가 언제나 감탄해 왔던 안재욱의 자연스러운 연기는 석철수를 더욱 한심한 캐릭터로 리얼하게 탄생시켰다. 그래서 더 보기가 싫었다. 언제나 안재욱을 좋아해왔던 나는 그의 그런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시청률이 좀 안 나올 수도 있지 뭐... 나는 그가 그렇게 힘들어한 줄을 여태 모르고 있었다. 자기는 정말 너무 고통스러운데 남들이 보기에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음을 안재욱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나는 그런 마음을 알고 있다.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겪는 이 정도의 고통은 어디 가서 힘들다고 말할만한 것도 못되지. 그래, 내가 생각해도 별 일 아니야." ... 나는 계속 너무나 힘든데, 스스로 남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있음을 명확히 깨닫고 있는 이런 상황은 고통을 몇 배로 가중시킨다.

무릎팍도사에 출연하여 초기 한류스타로서 겪었던 여러가지 어려움들과 '사랑해' 종방 이후 겪었던 슬럼프와 우울증... 그런 힘든 이야기들을 안재욱은 아주 담담한 어조로 털어놓았다. 서울예대 재학시절의 즐거웠던 이야기를 할 때나 최근의 힘들었던 이야기를 할 때나 그의 어조는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우리 삶에는 몇 개의 문턱이 있고, 그 문턱을 넘으려면 고통을 겪어야 한다. 그리고 문턱을 넘고 나면 우리는 조금씩 성장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제 막 삶의 한 문턱을 넘은 안재욱의 모습은 훌쩍 성장한 듯 보였고 어딘가 달관한 듯도 했다.


브라운관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줄곧 그를 아끼며 지켜보아 온 팬으로서, 나는 이제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그 동안 모르고 있어서 미안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눈먼 새의 노래'는 젊은 그에게 날개를 달아 주었고, 이제 그가 다시 부르는 노래는 그의 앞에 새로이 펼쳐질 찬란한 삶의 노래가 될 거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반응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