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안재욱, 다시 찬란한 삶을 노래하라 본문
1994년 데뷔작 '눈먼 새의 노래'에서 보여준 안재욱의 존재감은 충격적이었다. 드라마 자체가 워낙 좋기도 했거니와 전혀 신인답지 않은 안재욱의 연기력은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내 친구의 어머님을 비롯하여 몇몇 어르신들은 진짜 맹인이 드라마에 나온 줄 아셨다고 한다.
나는 '눈먼 새의 노래'를 운 좋게 녹화할 수가 있었는데, 보고 또 보고, 친구를 집에 데려와서 같이 또 보고, 안재욱의 연기를 보며 친구와 함께 감탄했다. "이름이 뭐라고? 안재욱? 오호.. 마음에 드는 걸~" 친구의 말에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동의했다.
그때부터 몇년간 나는 안재욱의 팬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특히 일요 아침드라마 '짝'을 보는 재미에 휴일의 기쁨은 배가되곤 했다. 남들이 그 당시 잘 나가던 연예인의 이름을 대며 좋다고 말하면 나는 혼자 불쑥 "나는 안재욱이 제일 좋더라~♡" 하고 말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보통 잠시 생각하다가 "안재욱이 누구더라?" 하고 물었다. 그런 연예인이 있다는 걸 알긴 아는데 언뜻 생각이 안 나는 거였다. "일요일 아침에 '짝'에서 김혜수의 조카로 나오는 사람 있잖아." 하면 그제서야 끄덕거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마치 안재욱의 유일한 팬이기라도 한 양, 만족감에 어깨를 으쓱했다.
1997년 '별은 내 가슴에'로 안재욱이 그야말로 톱스타가 되어버리자 솔직히 나의 그런 소소한 만족감은 사라져버렸다. 누구나 다 그의 이름만 들으면 환호성을 내지르는 마당에 내가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특별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별은 내 가슴에' 이전까지는 왠지 소년과 청년의 중간 지점에 서 있는 듯한 풋풋함이 느껴졌었는데, 그런 이미지는 급속도로 사그라들었다. 갑자기 원숙한 남자가 되어버린 듯한 안재욱의 모습이 내게는 좀 낯설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나는 안재욱의 팬이라고 말하고 다니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훌륭한 연기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가 작품을 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손꼽아 시청을 기다리곤 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그의 작품은 '선녀와 사기꾼'이었다. 미워할 수 없는 천재 사기꾼 정재경 역할은 그야말로 안재욱이 아니었다면 소화해낼 수 없었을 배역이라고까지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이어서 '오!필승 봉순영'과 '미스터 굿바이'까지도 나는 변함없이 그의 작품을 기다렸다가 본방사수하는 열혈시청자였다.
그런데 2008년, 그 문제의 작품 '사랑해'의 경우는 초반에 4회 정도 시청하고는 그냥 포기하고 말았다. 도저히 더 볼 수가 없었다. 왜 그랬을까?
'사랑해'에서 안재욱이 맡았던 석철수라는 캐릭터는 너무 현실적인 인물이었다. 드라마의 등장인물은 보통 그렇게 현실적이지 않다. 보통은 약간이라도 환상이 가미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석철수는 바로 옆집에 사는 사람이라고 해도 신기할 게 없을 만큼 현실적으로 그려졌기에 꽤나 독특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석철수가 드라마 초반에 결코 호감형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무명 만화가이면서 자기가 굉장히 잘난 줄 아는 자뻑 캐릭터에다가, 어떻게든 어린 여자를 살살 꼬드겨서 하룻밤 깃발이나 꽂아볼까 고민하고, 정작 일을 저질러 놓고는 여자가 임신했다고 하니까 결혼은 죽어도 못하겠다고 도망이나 다니는, 정말 최악의 놈팽이가 석철수였다. 현실에 존재할 법한 인물이기 때문에 더 보기가 싫었다. 게다가 언제나 감탄해 왔던 안재욱의 자연스러운 연기는 석철수를 더욱 한심한 캐릭터로 리얼하게 탄생시켰다. 그래서 더 보기가 싫었다. 언제나 안재욱을 좋아해왔던 나는 그의 그런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시청률이 좀 안 나올 수도 있지 뭐... 나는 그가 그렇게 힘들어한 줄을 여태 모르고 있었다. 자기는 정말 너무 고통스러운데 남들이 보기에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음을 안재욱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나는 그런 마음을 알고 있다.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겪는 이 정도의 고통은 어디 가서 힘들다고 말할만한 것도 못되지. 그래, 내가 생각해도 별 일 아니야." ... 나는 계속 너무나 힘든데, 스스로 남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있음을 명확히 깨닫고 있는 이런 상황은 고통을 몇 배로 가중시킨다.
무릎팍도사에 출연하여 초기 한류스타로서 겪었던 여러가지 어려움들과 '사랑해' 종방 이후 겪었던 슬럼프와 우울증... 그런 힘든 이야기들을 안재욱은 아주 담담한 어조로 털어놓았다. 서울예대 재학시절의 즐거웠던 이야기를 할 때나 최근의 힘들었던 이야기를 할 때나 그의 어조는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우리 삶에는 몇 개의 문턱이 있고, 그 문턱을 넘으려면 고통을 겪어야 한다. 그리고 문턱을 넘고 나면 우리는 조금씩 성장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제 막 삶의 한 문턱을 넘은 안재욱의 모습은 훌쩍 성장한 듯 보였고 어딘가 달관한 듯도 했다.
브라운관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줄곧 그를 아끼며 지켜보아 온 팬으로서, 나는 이제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그 동안 모르고 있어서 미안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눈먼 새의 노래'는 젊은 그에게 날개를 달아 주었고, 이제 그가 다시 부르는 노래는 그의 앞에 새로이 펼쳐질 찬란한 삶의 노래가 될 거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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