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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목소리가 들려' 민준국을 용서해야만 해피엔딩일까?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너의 목소리가 들려

'너의 목소리가 들려' 민준국을 용서해야만 해피엔딩일까?

빛무리~ 2013. 7. 28.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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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살이가 점점 각박하고 힘겨워지면서, 요즘 사람들은 점점 더 '힐링'이라는 코드에 주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타인과 세상을 바꾸고 싶어도 그건 뜻대로 할 수 없으니, 차라리 자기 자신이 바뀌어 보려는 거죠. 부부 사이에도 서로 상대방을 자기에게 맞춰서 변화시키려 하면 끝없는 다툼이 이어지지만, 서로 자기 자신이 변화되어 상대에게 맞추려 하면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하는 것처럼요. 외부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서 문제점을 찾고 자신을 변화시키려 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자기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입니다. 그런 면에서 '용서'는 힐링을 위한 필수 과정이겠군요. 증오심을 품고 살면 누구보다 자기가 불행하니까, 용서해야 자기 마음이 편하고 행복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이것은 기본적으로 대단히 옳고 바람직한 생각입니다. 하지만 무엇이든 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이 있듯이, 용서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요즘 보면 마치 '용서'에 대한 강박증이라도 걸린 것처럼 '지나치게' 용서하려는 사람들이 있고, 심지어 그 '지나친 용서'를 타인에게 강요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는 지난 번 '여왕의 교실' 리뷰에도 '용서의 강요'가 무척이나 불편했다는 내용의 글을 쓴 적이 있었죠. 책이나 영화도 그렇지만, 잘 만들어진 드라마는 시청자들의 가슴 속에 그 주제를 각인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작품에 올바른 주제를 담아야 할 작가의 책임은 대단히 무겁다 하지 않을 수 없겠네요. 그런데 제 생각에 '지나친 용서'는 결코 올바른 주제가 아니기에, 그런 주제를 담고 있는 드라마를 보면 속이 메슥거릴 정도로 대단히 거북합니다.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용서'는 그리 단순한 개념이 아닙니다. 소극적 용서와 적극적 용서, 자발적 용서와 마지못해 하는 용서 등 따지고 보면 아주 다양한 종류의 용서가 있을 수 있지요. 이 중에 '소극적 용서'를 제가 나름대로 정의해 본다면 '상대를 더 이상 증오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겠는데요. 이것은 자기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그 어떤 경우에나,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부분입니다. '너목들' 7회에서 사이코패스 민준국(정웅인)의 손에 처참히 살해당한 어춘심(김해숙) 아줌마는 숨을 거두기 직전, 사랑하는 딸 장혜성(이보영)에게 "다른 사람 미워하면서 네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죠. 제 판단에 저것은 '소극적 용서'를 의미합니다. 미워하면 할수록 네 인생만 고통스러워지니까 모두 훌훌 털어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것은 딸을 위하는 엄마의 마음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였어요.

 

장혜성이 엄마의 유언을 받들어 '소극적 용서'를 하고 민준국에 대한 증오심을 품지 않는 것에는 저도 대찬성입니다. 하지만 '용서'라는 개념에 지나치게 몰입하여 '적극적 용서'의 차원으로 접어들면 좀 문제가 달라지죠. 민준국은 실수가 아니라 명백한 살인 의지를 품고 가장 악랄한 방법으로 장혜성의 엄마 어춘심을 살해했습니다. 그런데 변호사 장혜성이 마치 흰 옷 입은 성녀처럼 "너의 죄를 용서하노라" 하고 폼을 잡으며, 제 엄마를 죽인 그 놈의 편에 서서 그 놈의 입장을 두둔하며 최후 변론을 맡는다면 저는... 저는 장혜성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이렇게 말해 주겠습니다. "너 같은 것도 딸년이냐?"...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장혜성은 더 이상 짱다르크도 무엇도 아닌 후레자식에 불과합니다. 어춘심도 그렇게까지 하라는 뜻은 아니었을 거예요.

 

만일 박혜련 작가가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민준국에 대한 용서를 최후의 전제로 삼았다면, 그 놈을 이렇게까지 나쁜 놈으로 그리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 놈은 벌써 세상에 둘도 없는 악마가 되어 버렸는데, 아무 죄 없는 남녀 주인공의 인생은 그 놈 때문에 돌이킬 수 없이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는데, 이제 와서 그 놈을 무조건 용서하는 것이 이 작품의 엔딩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저는 오히려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는 이 드라마의 시청자들이 그 메시지를 받아들여 '과도한 용서'가 정말 좋은 거라고 생각하게 될까봐 염려스럽습니다. 저는 '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16회까지 시청하는 동안 제 인생 최고의 드라마가 될 거라 여기며 설레어 왔는데, 만약 그런 결말이 나온다면 실망의 차원을 넘어 '최악의 끔찍한 드라마' 리스트에 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면 황달중(김병옥)이 자기 인생 26년을 빼앗아 버린 서대석(정동환)을 용서한 것도 '소극적인' 차원에 그쳤을 뿐입니다. 더 이상 그를 미워하지 않겠다는 의미였을 뿐, 그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서 무슨 행동을 하겠다는 건 아니었죠. 그거면 충분하고 또 충분합니다. '소극적 용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줍니다. '여왕의 교실'에서 고나리(이영유)에게 왕따를 당했던 심하나(김향기)도 '소극적 용서'에 그쳤다면 전혀 거부감이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가해자인 고나리는 한 마디 사과도 하지 않는데 피해자인 심하나가 먼저 찾아가 손을 내밀고, 반 아이들을 설득해서 고나리가 다시 학교로 돌아올 수 있도록 환영식(?)까지 마련해 주는 모습은 정말 짜증나도록 심히 거북했습니다.

 

누구의 인생에나 상처는 있게 마련이니까,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는 인생의 피해자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똑같은 피해를 입는 것도 아니고,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경중(輕重) 역시 사람마다 다른 법이죠. 그런데 우습게도 현재 우리 사회는 훨씬 많이 잘못한 사람에게 아주 조금 잘못한 사람이 먼저 사과하거나 화해를 청해야 한다는 식의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큰 죄인은 뉘우치지도 사과하지도 않는데, 작은 죄인은 자발적로 깊이 뉘우치며 큰 죄인을 용서해야 한다는 식이죠. 가해자를 꾸짖거나 선도하기 보다는 오히려 피해자에게 '네가 먼저 무조건 용서' 하라고, 그게 너 자신을 위한 길이라고 설득하며 강요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젠 심지어 드라마에서까지 그토록 모순된 논리의 용서를 강요하고 있는 거예요.

 

박수하(이종석)의 아버지 박주혁 기자는 물론 죄를 지었습니다. 기자로서의 양심을 저버리고 허위 광고성의 거짓 기사를 썼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이 어린 자식 앞에서 쇠파이프에 맞아 피를 철철 쏟으며 죽어야 할 만큼 큰 죄는 아니었습니다. 민준국은 박주혁이 세 치 혀를 놀려서 자기 아내를 죽였다고 했지만, 그건 누가 봐도 억지 아닌가요? 완치율 100%라는 말도 안 되는 뻥튀기 광고성 기사를 곧이 곧대로 믿고 수술 받다가 죽었으면, 그 기자가 죽인 겁니까? 민준국 아내의 죽음에 박주혁의 책임은 아무리 크게 봐야 20% 정도나 될까요?

 

 

민준국도 박수하도 피해자이지만, 저울추에 놓고 본다면 박수하의 피해가 천배 만배 정도는 더 심각합니다. 박주혁이 민준국에게 입힌 피해는 의도치 않은 결과였지만, 민준국은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박주혁을 살해함으로써 박수하를 고아로 만들었죠. 그런데 박수하가 민준국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고, 자기 아버지의 잘못을 대신 사과함으로써 훈훈한 용서와 화해의 장으로 마무리 되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눈에 띄더군요. 하지만 죄 지은 박주혁은 이미 죽은지 오래고, 박수하는 민준국에게 아무 잘못도 한 게 없습니다. 민준국은 스스로 박주혁을 살해하는 순간 이미 사과받을 기회와 자격을 잃었고, 이젠 박수하가 그에게 받아야 할 사과만 남아있는 거죠. 도대체 박수하가 왜 자기 아버지를 죽인 놈에게 오히려 사과를 해야 하는 걸까요?

 

몇몇 시청자들로부터 용서뿐만 아니라 변호까지 강요받고 있는 장혜성의 입장은 더욱 기막힙니다. 장혜성과 어춘심 모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죄도 없거든요. 법정에서 자기가 목격한 사실을 그대로 증언한 소녀의 행동이 죄인가요? 오히려 가상한 용기로서 칭찬받을 일이죠. 민준국은 자기 인생이 망가지고 늙은 치매 어머니와 어린 아들이 굶어 죽은 이유가 그 증언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씨알도 안 먹힐 억지입니다. 그건 모두 자기가 저지른 악행의 결과일 뿐, 장혜성의 증언 때문이 아니었어요.

 

 

장혜성으로서는 그 놈의 뼈를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지경인데, 증오심을 털어내고 잊어주는 것만도 엄청난 용서입니다. 민준국 앞에서 다정한 눈빛으로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고, 그의 편을 들어 죄를 변호하며 형량을 감소시켜 주기까지 한다면, 그건 용서라기보다 오히려 역겨운 폼잡기에 가깝다고 생각되는군요. 물론 민준국의 이야기에도 누군가 귀를 기울여 주긴 해야겠지만, 피해 당사자인 장혜성과 박수하에게 그 역할을 맡도록 강요해선 안됩니다. 아무리 드라마 속 이야기라 해도, 누구도 그럴 권리는 없어요.

 

피해자가 지나친 오지랖이나 성급함으로 '적극적인 용서'를 했을 경우, 그 부작용이 얼마나 심각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표현한 영화가 있습니다. 이정향 감독, 송혜교 주연의 '오늘'이라는 작품인데요. 지금 이 순간에도 '과도한 용서'를 강요받으며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꼭 추천하고 싶은 영화입니다. 
 

 

 

제 생각엔 말이죠. 분노해야 마땅할 일에 분노하는 것은 죄가 아니고, 충분히 증오할만한 상황이면 증오하는 것도 죄가 아닙니다. 상대는 한 마디 사과도 없는데, 용서하지 못하는 자기 마음만 괜시리 옹졸하다 자책하며 괴로워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선량한 피해자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군요. 장혜성과 박수하는 민준국을 용서해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굳이 용서하겠다면 '소극적인 용서'에 그쳐야 합니다. 더 이상 오버하며 '적극적인 용서'로 진행된다면, 그건 아름다운 게 아니라 역겹도록 작위적인 해피엔딩 아닐까요? 그보다는 차라리 남녀 주인공이 함께 죽음을 맞는 새드엔딩이 훨씬 나을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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