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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리는 가슴-제6화' 행복은 못나면 못난 대로 보듬고 사는 것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떨리는 가슴

'떨리는 가슴-제6화' 행복은 못나면 못난 대로 보듬고 사는 것

빛무리~ 2013. 2. 8.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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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작 드라마 '떨리는 가슴'의 6가지 에피소드 중 엔딩을 장식하는 11~12회의 소제목은 '행복'입니다. 인정옥 작가 특유의 섬세하면서도 적나라한 대사들이 정말 일품이죠. 다른 에피들도 거의 그렇지만 특히 제6화는 독립된 단편의 느낌이 강해서 애초부터 2회로 만들어진 단막극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제까지 5명 작가들에 의해 구축되어 온 하나하나의 캐릭터가 모두 생생히 살아 숨쉬며 비로소 완성에 이른 듯한 느낌도 받게 됩니다. 아무리 봐도 명작 중의 명작이에요. '떨리는 가슴' 시리즈 중에서도 특히 '제6화-행복'을 저는 대략 5~6번쯤 반복해서 보았던 것 같습니다. "꽃이라도 달고 가지..." 중얼거리며 흐느껴 우는 배종옥의 모습에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면 저도 모르게 먹먹해지는 가슴을 억누를 수 없어 눈물이 치솟곤 했습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먹먹함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이 에피소드의 제목이 왜 '행복'인가를 생각하면 언제나 답을 찾지 못하고 안개 속을 헤매는 느낌이었어요. 이상하게도 반복해서 보면 볼수록 주제의식이 명료해지기는 커녕 아리송함만 더해 갔지요. 마지막 에피소드에 가서야 배종옥과 배두나 자매의 엄마 역할로 김애심(김수미)이 등장했는데 그 캐릭터는 정말 독특했습니다. 그녀의 천박하고 상스럽고 염치없는 언행들을 볼 때마다, 지난 번 엔딩 무렵에 느꼈던 찡한 마음은 멀리 날아가고 오히려 진저리가 쳐지더군요. 그러다 보니 좀처럼 또렷한 주제의 가닥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김애심은 아주 오래 전, 치매에 걸린 남편과 아직 어린 두 자매를 내팽개치고 동네 외간남자와 함께 도망쳤던 여자입니다. 엄마에게 버림받던 그 때 작은 딸 배두나는 너무 어려서 엄마가 있었다는 것조차 기억 못하며 자랐고, 두나보다 열 살 위인 큰 딸 종옥도 겨우 사춘기 소녀에 불과했습니다. 무책임한 엄마 덕분에 온갖 고생을 혼자 떠안고 살아 온 배종옥의 가슴 속에는 깊은 한이 맺혔지요. 혼자 몸 하나 간수하기도 벅찬 나이에 어린 동생까지 건사하느라 종옥의 삶은 피폐해졌고, 청춘을 바쳐 사랑했던 사람도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수십년 동안 소식 한 번 없던 김애심이 갑자기 낡은 가방 하나를 끌고 "내가 너희들 엄마" 라면서 자매를 찾아옵니다. 엄마에 대한 나쁜 기억이 없고 성격도 순한 배두나는 반가워하며 애심을 맞이하지만, 엄마에게 서리서리 한이 맺힌 배종옥은 더없이 심한 말로 애심을 문전박대하며 내쫓아 버리는군요. 급기야 엄마를 "너"라고 부르는 패륜조차 서슴지 않는 배종옥의 눈빛은 더없이 차갑고 견고합니다. 여기까지만 볼 때는, 아무리 그래도 배종옥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지요. 그런데 계속되는 김애심의 언행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을 만큼, 시청자의 건조한 눈으로 보기에도 김애심의 캐릭터는 엄청난 비호감입니다.

 

 

배두나가 자기 딸인 줄을 모르고 봤을 때, 김애심은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아유, 생긴 건 붕어빵 같아 가지고 눈탱이만 크고 뼈만 앙상해 갖고, 복도 지지리 없게 생겼다!" 아무 이유도 없이 스쳐 지나가는 아가씨를 보며 악담을 퍼붓는 김애심은 그런 노파입니다. 잠시 후, 그 지지리 복 없게 생긴 년이 자기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왜 이렇게 비쩍 말랐냐면서 초면에 등짝을 퍽퍽 때리는군요. 배두나는 죽은 줄만 알았던 엄마를 만났다고 너무너무 좋아하는데, 애심은 왜 자꾸 히죽대느냐며 두나에게 "너 우리 동네 미친년하고 똑같다"는 농담을 합니다. 핏덩이 때 버렸던 딸자식에게 미안함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철면피스런 농담을 합니다. 

 

종옥이 그렇게 싫다는데도 애심은 꾸역꾸역 큰 딸의 집에 가방을 풀고 주저앉습니다. 맘 좋은 사위 김창완이 애써 종옥의 표독스러움을 막아주고 있는데, 애심은 그런 사위에게 몰래 "자네 돈 좀 있나? 기천만원..." 하고 묻다가 종옥에게 들키고 마는군요. "그거였구나, 돈? 결국 그거였어? 돈 때문에? 돈 때문에?" 벌벌 떨면서 묻는 종옥에게 애심은 덤덤한 얼굴로 대답합니다. "그래... 나 돈 좀 다우, 종옥아!"

 

 

이쯤 되면 시청자는 배종옥의 심정에 100% 몰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와 함께 치를 떨며 이를 악물게 되는 거죠. 배종옥은 염치없는 엄마 김애심에게 말합니다. "돈 줄게. 빚을 져서라도 내가 돈 줄테니까, 김애심씨... 인간이 어디까지 비굴해질 수 있는지 그거 나한테 제대로 보여줘 봐. 그럼 나도 미련없어. 김애심씨한테 다시는 흔들릴 마음 없어. 차라리 잘 됐다. 잠깐 흔들렸잖아. 혹시 엄마려나 하고..." 마치 종옥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기라도 하듯, 애심은 그 날 이후로 가면 갈수록 더욱 진상을 떨기 시작합니다.

 

창완의 생일을 맞아 시골에서 올라온 종옥의 시집 식구들에게도 애심의 진상 행각은 어김없이 펼쳐집니다. 제2화의 주인공이었던 김혜정(하리수, 김창완의 트랜스젠더 동생)이 어머니(정혜선)를 모시고 집에 왔는데, 종옥이 혜정에게 수차례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은 애심은 꼬치꼬치 캐묻다가 혜정으로부터 수술 사실을 듣게 되지요. 호들갑스럽게 놀라면서 혜정을 원숭이 보듯 위아래로 훑는 애심의 시선...

 

 

그 광경을 목격한 창완의 어머니는 불같이 화를 내는데, 곱게 받아넘기지 못한 애심은 사돈의 머리채를 잡아 흔들며 진흙탕 싸움을 거는군요. 그렇게 온 집안을 풍비박산으로 만들어 놓고도 불편한 기색 하나 없이 식구들 밥상에 떡하니 자리잡고 앉은 애심은 볼이 미어터지게 밥을 밀어넣다 말고 옆에 있는 배두나에게 말합니다. "두나야, 넌 어쩌면 남자보다 못생겼냐?" 기막혀 쳐다보는 사돈의 눈빛 덕분에 심심하진 않은 모양입니다.
 
 

보다 못한 배종옥은 김애심을 비 오는 놀이터로 불러내 돈봉투를 던지고 돌아섭니다. 뿌리치는 종옥의 손을 부여잡으며 애심은 말하는군요. "미안하다, 종옥아... 너하고 두나한테는 정말 미안하다. 하지만 네 아빠한테는 하나도 안 미안해. 환장할 인간이 치매까지 걸려서 더는 못 봐주지. 병 나기 전까지는 다 봐줬어. 허구헌날 얻어터지면서 노름빚 갚아주면서 다 봐줬어. 별 개같은 짓도 다 참았는데, 그 꼴은 못 참겠더라. 다리 힘 빠지고 보들보들해지니까, 때려 죽이고 싶었어. 계속 같이 살았으면 그거 내가 죽였을지도 몰라."

 

 

"나 좋을대로도 한 번 살아보고 싶었어. 그 인간한테서 너희들 지키느라 못했던 거 다 해보고 싶었어. 종옥아, 넌 알잖아? 너하고 나하고 그 인간한테 죽도록 맞았던 거 알잖아? 나쁜 놈, 누가 뭐래도 나쁜 놈... 죽이고 싶은 얼굴로 병수발은 못 들겠더라. 그래서 너희들 고모한테 맡기고 나 훌훌 털었어. 나 혼자 좋자고 나 훌훌 털었어." 하지만 아이들의 고모는 불과 6개월 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남은 아버지와 동생 두나는 오직 배종옥의 짐으로 남겨졌습니다. 채 어른이 되기도 전에 돈벌이의 설움부터 겪었던 배종옥은 그렇게 꿈도 없이 돈에 매달려 살 수밖에 없었죠. 엄마가 떠나는 날, 도시락에 담아 준 반찬은 장조림이었습니다. 그 이후 배종옥은 지금까지도 장조림만 보면 토한다고 했습니다.

 

"남자 좋아서 갔으면 그 남자한테 호강이나 제대로 받든가, 뭘 해도 참 구질구질 산다..." 경멸하듯 내려다보는 종옥의 눈앞에 쭈그리고 앉은 애심은 말합니다. "미안하다. 치매걸려 죽은 그놈만 빼고, 너하고 두나한텐 정말 미안하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지금 이렇게 구차하게 살아도 그 남자 때문이라면 하수구의 오물을 퍼먹어도 맛있다..."

 

 

결국 딸에게서 돈을 받아낸 김애심은 새벽녘에 다시 짐을 챙겨 떠납니다. 마침 그 날은 어버이날이었나봐요. 초라하게 떠나는 할머니가 안됐는지, 손녀 보미(고아성)가 달려나와 카네이션을 달아 줍니다. 그런데 애심은 손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는군요. "보미야, 넌 엄마 닮지 마. 이모도 닮지 마. 둘 다 내 딸들이라서 나 닮을까봐 그래. 엄마 이모 말고 아빠 쪽, 그 쪽 닮아. 알았지?" 그리고는 보미가 달아준 카네이션을 되돌려주고 빈 손으로 돌아섭니다.

 

애심이 돌아온 집에는 그녀의 남자, 백일섭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든 원망과 욕설과 손가락질에 아랑곳 없이, 두 사람은 지난 이십여년 동안 의좋은 부부로 단둘이 의지하며 살아왔던 거죠. 한 때는 남자가 열심히 일해서 돈도 많이 벌었지만, 수년 전 암에 걸리면서 그 엄청난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어 지금은 월세마저 밀리는 상태입니다. 애심은 며칠만에 보는 남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합니다.

 

 

"여보, 내가 치매걸린 남편 귀찮다고 당신따라 떠난 더러운 년인 거 알지? 근데 늙으막에 이렇게 당신 병수발 하면서도 왜 이렇게 좋지? 나 당신 너무 좋아, 어떤 연놈들이 뭐라고 해도 난 당신 너무 좋아. 당신 돈 잘 벌 때 나 성형외과 데려가서 주름 펴 줬잖아. 힘들게 살아서 예쁜 얼굴 망가졌다고... 당신 아프고 나서 내가 일하겠다고 했더니 당신이 말렸잖아. 평생 죽도록 일했으니까 이제 가만히 있으라고... 우리 아직 돈 있어. 당신이 사준 반지, 하루 밥값은 될 거야. 안 되면 아끼고 아껴서 한 달 먹지. 안 되면 더 아껴서 일년 먹고..^^"

 

딸 종옥에게서 수천만원이나 받아왔을 텐데, 왜 반지를 팔아서 하루 먹을 생각을 할까요? 배종옥은 벽장 속에서 애심이 고스란히 두고 간 돈봉투와 담배 한 개비와 카네이션을 발견합니다. 꽃과 담배, 그리고 장조림... 이 세 가지를 식탁에 올려놓고 멍하니 바라보는 종옥... 그렇게 싫어하던 엄마가 떠났으니 홀가분할 법도 한데, 종옥은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는군요. "꽃이라도 달고 가지, 꽃이라도 달고 가지..." 한편 백일섭은 애심이 좋아하는 백합꽃을 한 다발이나 사들고 돌아오는 길에, 거짓말처럼 숨이 멎어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한없이 혼자 기다리는 애심... 딸자식의 애끓는 울음소리가 잦아들기도 전에, 딸을 버리면서까지 애심이 붙잡으려 했던 마지막 사랑은 하얀 백합처럼 스러져갔네요. 그렇게 엔딩.

 

 

이 서글프고도 신산한 에피소드의 제목이 왜 '행복'일까요? 설마 이것이 '부모의 사랑'을 말하기 위해 쓰여졌다면 이건 완전한 실패작입니다. 애심은 20년 전에도 지금도, 딸들이 아니라 남자를 선택했거든요. 물론 최후의 양심은 있어서 돈봉투를 두고 떠났지만, 이 염치없는 엄마가 딸들 앞에 다시 나타났던 애초의 이유는 돈을 받기 위해서였거든요. 남자를 따라가려고 어린 딸들을 버렸던 엄마가 이제 그 남자의 치료비를 내놓으라고 딸들 앞에 나타났다가, 슬쩍 얼굴만 보여주고는 다시 그 남자에게로 훌훌 떠나갔습니다. 순둥이 배두나는 물론 독한 배종옥까지도 결국은 엄마를 향한 그리움에 목이 메고 말았지만, 제3자의 눈으로 볼 때 김애심의 캐릭터는 별로 엄마같지 않았어요.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사랑에 빠진 여자였을 뿐이죠.

 

어쩌면 인정옥 작가는 "아무리 못난 부모라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지만, 저는 '부모'라는 명제를 떠나 좀 더 넓은 범위에서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저 사람이니까, 아무리 못나고 상스럽고 천박하고 염치 없어도...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그냥 덮어 주면서... 서로 아껴주고 이해하면서, 멍든 곳은 문질러 주고 푹 패인 곳은 채워 주면서... 그렇게 서로 기대고 어울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라고 작가는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솔직히 너무나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제가 언제쯤 이것을 깊이 깨닫고 실천할 수 있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를 볼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져 오는 것을 보면, 무의식 속에서는 "이게 맞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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