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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동 앨리스' 된장녀들의 완벽한 환타지 드라마로 종영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청담동 앨리스

'청담동 앨리스' 된장녀들의 완벽한 환타지 드라마로 종영

빛무리~ 2013. 1. 28.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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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제껏 시청했던 모든 드라마 중 최악의 작품을 꼽는다면 지금부터는 망설임 없이 '청담동 앨리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한참 비뚤어진 주제의식을 아주 교묘한 방식으로 합리화시킨 대본이 문제였죠. 배우들의 연기는 괜찮았고, 연출도 그만하면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작가들의 썩 훌륭한 글솜씨는 오히려 독이 되었습니다. 분명히 말이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는 건데도 어찌나 교활하게 표현하는지, 얼핏 생각하면 그들의 논리가 맞는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이 작품의 전체적인 내용은 '된장녀의 하소연'이라 하면 적절하겠고, 결말은 '된장녀의 완벽한 환타지 실현'이라 하면 꼭 맞겠네요. 하지만 당최 주제는 뭔지, 작가들이 이 드라마를 쓰면서 궁극적으로 하고 싶었던 말이 뭔지, 이 사회에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뭔지는 아직도 전혀 모르겠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봐야 스스로의 힘으로는 가난을 극복할 수 없으니까, 이 답답한 현실을 똑바로 인식하자는 걸까요? 그건 그렇다고 칩시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건가요? 성실하게 노력하고 발버둥쳐 봤자 절대 안 될 테니까 괜한 헛수고하지 말고, 일찌감치 신데렐라(또는 바보온달)가 될 꿈이나 꾸는 게 현명하다, 뭐 이런 건가요? 우리도 앨리스의 언니처럼 눈을 반쯤만 뜨고 허황된 꿈에 빠져 살아보자, 다시 눈을 뜨면 모든 게 현실로 돌아올 줄을 알지만 그래도 반쯤은 꿈을 꾸면서 살자, 어쨌든 된장스러운 꿈이라도 꾸는 편이 살기가 좀 나으니까, 아무 희망 없는 세상에 그런 꿈이라도 꾸지 않으면 숨막혀 살 수 없으니까, 그런 꿈을 꾸는 된장녀들을 욕하지 말고 이해해 줘라... 뭐 이런 것이 이 드라마의 주제인가요?

 

국민 호감 여배우, 국민 여동생 문근영이 왜 하필 이 드라마를 선택했는지 모르겠으나, '청담동 앨리스'는 그녀의 귀엽고 순수하고 깨끗한 이미지에 커다란 타격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너무 귀엽고 순수해 보이기 때문에, 이 드라마에서는 가증스러움이 한층 더했거든요..;; 여주인공 한세경(문근영)의 비호감이 절정에 이른 부분은 막판에 모든 비밀이 탄로난 후의 태도였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거짓말을 미안해하고 죄스러워하는 기색이 약간 비치는가 싶더니만, 나중에는 오히려 기세등등하게 차승조를 타이르고 가르치려 들더군요. 그 태도는 마치 "아직도 순수한 사랑을 믿는 당신은 나약한 어린애고, 현실(?)을 정확히 알고 행동하는 내가 훨씬 어른이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과연, 정말 그런 걸까요?

 

 

자신을 향한 세경의 순수한 사랑을 믿었던 차승조(박시후)가 그 사랑 속에 켜켜이 숨어 있던 불순한 의도를 알게 되었을 때, 충격받은 마음에 머리를 식히러 잠시 여행을 떠난다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한세경은 공항까지 쫓아가서 그를 붙잡아 세우더니 선생님이 학생 가르치듯 엄한 어조로 도망치지 말라고, 당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 들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자기를 똑바로 보라고 거만하게 야단을 치더군요. 하지만 저는 그녀의 모든 말이 궤변으로 느껴질 뿐이었죠. 도망치지 않고 현실을, 한세경의 모습을 똑바로 본다는 건 대체 어떻게 하는 걸까 궁금했지만, 기껏 붙잡혀 준 차승조에게 그녀가 보여준 모습은 새로울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차승조가 아르테미스 회장 장 띠엘샤인 것을 알고 그를 유혹하기 위해 명백히 거짓말을 했음에도 한세경은 꽤나 당당합니다. 그녀가 면죄부를 받고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차승조가 김비서로 위장하고 있었을 때부터, 그의 정체를 몰랐을 때부터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때문이었죠. 이거 하나만 내세웠더라면, 흔하긴 해도 단순해서 귀여운 신데렐라 이야기 정도로 마무리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한세경은 아주 고집스럽게 억지 논리를 전개합니다. "사랑하는 것과 이용하는 것, 나는 구분 안 돼요!" 와... 정말 깜찍하다 못해 끔찍한 궤변이군요. 어떻게 사랑하는 것과 이용하는 것이 구분되지 않는단 말입니까? 처음에는 이용할 목적으로 접근했더라도 대충 얼버무려 살다 보면 사랑하게 될 수도 있는 거니까 결국은 똑같은 거다 이 말인가요?

 

더욱 기막힌 것은 "구분 안 된다"는 한세경의 이 대사를 엔딩 부분에서 차승조가 따라 함으로써 작품 전체의 주제처럼 부각시켰다는 점입니다. "연기 안 해도 돼. 진심, 이용, 구분 못 한다면서? 예전의 한세경, 변한 한세경, 구분할 수 있어요? 나도 구분이 안 돼. 내가 좋아하는 게 캔디 한세경인지 변한 한세경인지... 그리고 이제 상관없어. 난 그냥 지금 내 눈앞에 있는 한세경을 좋아해요!" 글쎄 뭐, 젊고 잘 생기고 능력있고 무지하게 돈 많은 남자가 이렇게 말해 준다면야 세상 모든 된장녀의 완벽한 환타지가 될 수는 있겠지만, 아무리 드라마가 대중친화적인 예술이라 해도 주제의식 자체가 이렇게 허접스러워서야 너무 창피한 일 아닌가요?

 

 

생뚱맞게 윈스턴 처칠의 말까지 갖다 붙이면서, 작가가 무지하게 애쓴 흔적이 엿보이긴 합니다. "미숙한 사랑은 당신이 필요해서 당신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성숙한 사랑은 당신을 사랑하니까 당신이 필요하다고 한다." 글쎄, 처칠이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필요해서 사랑하는 것과 사랑해서 필요한 것이 뒤섞여 버려서) "이젠 나도 구분이 안 돼요" 라는 차승조의 해석은 정말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도대체 왜 구분이 안 됩니까? 사랑해서 필요하다는 말은 진짜 사랑이지만, 필요해서 사랑한다는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런 논리라면, 예를 들어 아주 손발이 잘 맞는 사업상 파트너는 꼭 필요한 사람이니까 남편이나 아내와 똑같이 사랑해야겠네요..;; '필요'는 아무리 가면을 써도 '필요'일 뿐, 본질적으로 '사랑'과는 다른 것입니다. 어째서, 뭐가 구분이 안 되죠? 세상에 이런 궤변이 어디 있습니까?
 
 

이 드라마에 전체적으로 흐르는 또 하나의 메시지는 "가난은 무치(無恥)"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힘겨운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데, 그까짓 거짓말 좀 하고 살살 사기 좀 쳤다 한들 그게 뭐 부끄러운 일이냐, 우리같은 사람들에게는 염치조차도 사치일 뿐이다." 아마도 작가는 이런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이에요. 차승조와 결혼하고 싶어서 그의 호감을 얻으려는 것은 자기나 신인화(김유리)나 똑같은데, 어째서 가난한 자기의 노력은 추한 것이고 돈 많은 신인화의 노력은 당연한 것이냐고, 여주인공 한세경은 진지하게 역설했죠.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사랑을 얻기 위한 노력 자체는 가난한 자에게나 부유한 자에게나 추한 것이 아닌데, 다만 그 노력에 '거짓'이 들어가면 추해지는 거죠. 아무리 신인화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청담동 앨리스'는 시종일관 '부자'와 '가난한 자'의 사이에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을 세워놓고 있습니다. '가난'은 본인의 어떤 노력으로도 탈출할 수 없는 절대감옥인데, 유일한 희망이라면 차승조 같은 부자 시계토끼를 만나는 것뿐이죠. 그러나 엔딩 무렵 서윤주(소이현)에게 말하는 타미홍(김지석)의 대사처럼, 가난한 자들에겐 지금 꾸는 행복한 꿈조차도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유리알 같은 것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해피엔딩을 믿어요? 아무리 뜨거운 키스로 영화가 끝나도 현실에서는 언제나 그 다음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는 걸..."

 

 

물론 차승조가 자기 노력만으로 성공했다 여긴 것은 착각이었습니다. 행운이란 그런 식으로 '원래부터 정해져 있는 사람에게' 간다는 것도 사실이죠. 무명작가였던 차승조의 그림을 3만 유로라는 거액에 사들인 사람은 예상대로 그의 아버지 차일남 회장(한진희)이었으니까요. 부자 아버지의 은밀한 푸쉬가 없었다면 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다 해도 맨 땅에 헤딩으로는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 어려웠을 테니까요. 하지만 저는 아예 불가능했을 거라고까지는 생각 안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아직까지 '노력'의 효과를 믿고 있으며, 어느 정도는 '행운'의 가능성도 믿고 있는 사람이거든요. 제가 정말... 틀렸나요?

 

은인의 정체가 아버지일 거란 쉬운 추측을 꿈에도 못 했던 차승조의 순진함(?)은 좀 황당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노력의 효과'를 믿고 '순수한 사랑'을 믿었던 차승조의 생각이 틀렸고 철딱서니 없는 거였나요? 그럼 아무 노력도 소용없고, 우리 인생에 행운 따위는 없다는 한세경의 생각이 가장 맞는 거고 어른스럽게 철든 건가요? 정말 기가 차서 웃음밖에 안 나옵니다. ㅎㅎ 저는 작가에게 다시 한 번 묻고 싶습니다. 그래서 당최 뭘 어쩌자는 거냐고? 하지만 골백번을 다시 생각해 봐도 그냥 이 드라마는 '된장녀의 환타지 충족과 자기 위안'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결론밖에 안 나오더군요. "아무리 정직하게 노력해봤자 전혀 소용없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말하는데, 그 와중에 무슨 건설적인 주제가 있겠습니까?

 

한세경은 어쨌든 차승조를 사랑한다고 설정되어 있으니까, 그 남자의 순진함이 틀렸다는 식으로 반박은 하지만 증오하거나 폄하하지는 않습니다. "승조씨는 행운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타고난 운을 이어간 거겠죠.." 한숨 푹푹 쉬면서 이 정도 말로 끝냅니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어떨까요? 저는 분명히 읽었습니다. 이 드라마의 시청자 중 한 사람이 "노력만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너희들은 진짜 가난이 뭔지도 모르는 주제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행운에 익숙하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다" 라고 써 놓은 감상문을 읽었습니다. 정말... 섬뜩하고 무서웠습니다. 그 말에서는 '가진 자들을 향한 증오의 화살'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결코 이 드라마를 한심하다고 생각하거나 얕잡아 보지 않습니다. 시청자의 머릿속에 비뚤어진 가치관을 교묘한 방식으로 주입시키는 이러한 대중예술은 그 무엇보다도 위험하고 극악한 것이죠. 설마 작가들이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청담동 앨리스'는 그들이 숨쉬며 살아가는 이 사회에 별다른 도움을 주기는 커녕, 일종의 바이러스처럼 크나큰 해악만 끼치는 망작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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