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STORY 2014 우수블로그
TISTORY 2012 우수블로그
TISTORY 2011 우수블로그
TISTORY 2010 우수블로그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관리 메뉴

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차칸남자' 제목이 마음에 걸리는 진짜 이유 본문

드라마를 보다

'차칸남자' 제목이 마음에 걸리는 진짜 이유

빛무리~ 2012. 9. 13. 09:30
반응형

 

 

'각시탈' 후속으로 시작된 KBS 수목드라마 '차칸남자'의 제목에 대해 논란이 끊이질 않네요. 나날이 확산되는 속어와 인터넷 용어들로 인해 국어 파괴 현상이 심각해지고 있는 이 때, 바른 말 고운 말 쓰기에 앞장서도 모자랄 공영방송에서 드라마 제목에 굳이 틀린 맞춤법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비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심지어 한글 학회와 국립 국어원 등에서는 KBS에 제목 수정을 요청하는 항의 공문을 보내기까지 했다더군요. 하지만 결국 이경희 작가를 비롯한 '차칸남자' 제작진은 극의 흐름을 반영한 창의적 표현이니 이해 바란다는 입장을 밝히며 제목 수정 없이 첫 방송을 내보냈습니다.

 

 

거센 비난에 맞서는 제작진의 갖가지 해명들은 구차스러울 지경이네요. 기억을 잃고 뇌손상을 입게 된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을 보며 자신의 일기장에 '차칸남자'라고 맞춤법을 잘못 기재한 에피소드에서 발생한 제목이라거나, 원래는 착한 남자이지만 사랑을 위해 또 다른 사랑을 이용하는 나쁜 남자이기도 한 주인공 캐릭터에 대한 중의적 표현이라거나, 영화 제목 '말아톤' 역시 외국어 한글 표기법에 어긋나지만 상징적 의미가 있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문제될 게 없다는 등의 내용이었죠. 그리고 "잘못 표기된 맞춤법을 볼 때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그런 글씨를 쓴 사람의 과거나 삶의 지향을 느끼게 된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드라마도 엄연한 (대중)예술의 일종이죠. 그렇다면 시어(詩語)에서 창의적 표현이나 리듬감을 위해 맞춤법과 띄어쓰기 등을 일부러 틀리게 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처럼, 드라마 제목 또한 예술적 표현의 차원에서 허용할 수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착한 남자'라고 정확히 표현했을 때와, 맞춤법 띄어쓰기를 완전 무시한 채 '차칸남자'라고 표현했을 때와는 그 전달되는 느낌에서 큰 차이가 있는 게 사실이니까요. 저는 국어국문학과 출신이며, 평소 인터넷 용어나 속어 등의 창궐로 국어가 파괴되어 가는 현상을 가슴아프게 여기는 사람이지만, 이건 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제작진의 해명 중에서도 "잘못 표기된 맞춤법을 볼 때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그런 글씨를 쓴 사람의 과거나 삶의 지향을 느끼게 된다"는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 있어 보이는군요.

 

 

그러나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비난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니, 약간은 의도적 논란의 희생양이 된 듯한 느낌도 적지 않습니다. 물론 국립 국어원 측의 주장대로 "한류의 핵심인 한국어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전파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약간 우려가 되기도 하지만, 그건 수출할 때 제목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곁들이고 ("이 제목은 창의적 표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올바른 맞춤법은 '착한 남자'임"... 이런 정도?) 방송할 때마다 첫 화면에 명시해 줄 것을 요청하면 될 것 같은데요. 좀 귀찮은 일이긴 하지만, 예술적 표현의 자유를 맞춤법이라는 규격 안에 꽁꽁 가두어 놓는 것보다는 약간의 번거로움을 감수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차칸남자'라는 제목이 마음에 걸리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첫 방송을 보고 나서 제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서머셋 모옴의 소설 '인간의 굴레'였어요. 주인공 필립 케어리는 별로 착한 남자도 아니었습니다. 적당히 성실하고 적당히 나약하고 적당히 이기적인,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죠. 그런데 밀드레드라는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서부터 필립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로 변신합니다. 오직 그녀 한 사람에게만은요. 하지만 불행히도 그가 사랑하게 된 밀드레드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나쁜 여자' 였습니다.  

 

  

제가 그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은 중학생 때였는데, 밀드레드에게 수없이 배신당하고 온갖 불행을 겪으면서도 그녀를 외면하지 못하고, 그녀의 뻔한 속셈을 다 알면서도 계속 이용당해 주는 이 착한 남자의 바보같은 사랑을 보며, 어린 나이에도 책을 읽는 동안 얼마나 분통이 터졌던지 기억이 생생합니다. 필립에게서 받은 돈으로 그의 친구와 여행을 즐기고 돌아와서는 다 들키고도 미안해하지 않던 밀드레드와, 그녀의 뻔뻔함에 깊이 상처받았지만 사랑 때문에 제대로 화도 못 내고 꾹꾹 눌러참던 필립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답답하네요. 그런데 그 속터지는 심정을 어쩌면 이 드라마에서 다시 체험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듭니다.

 

주인공 강마루(송중기)는 척 보기에도 전형적인 '착한 남자'는 아닙니다. 오히려 상당히 냉랭하고 시크한 차도남에 가깝죠. 하지만 사랑하는 여자 한재희(박시연)에게만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더군요. 6년 전, 촉망받는 의대생으로서 탄탄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던 스물 네 살의 청년 강마루는, 한재희가 자기를 겁탈하려던 남자를 무의식중에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자 기꺼이 그녀를 대신해서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말았습니다. 한재희 본인이 자수하면 정당방위로 인정되고 집행유예를 받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어렵게 키워 온 앵커의 꿈을 포기해야 한다고 울부짖는 그녀를 차마 볼 수가 없었던 거죠. 의사가 되겠다던 자기의 꿈 따위는 한 순간에 헌신짝처럼 내팽개칠 수 있을 만큼, 강마루는 그렇게 한재희를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모든 것은 한재희의 계략이었습니다. 뒷일은 자신에게 맡기고 어서 자리를 피하라는 강마루에게 한재희는 애절한 목소리로 "이 빚, 잊지 않을게. 내 평생을 걸고 반드시 갚을게!" 라는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떠났죠.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태산그룹 회장 서정규(김영철)를 찾아가 두툼한 서류봉투를 내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십니까? 회장님을 지키기 위해서... 제 목숨 만큼이나 소중한 남자한테, 제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왔는지 아세요?" 그리고는 아버지 뻘이나 되는 서회장 품에 안겨 악어의 눈물을 흘립니다. 한재희가 살해한 남자는 아마도 서회장의 약점을 잡고 협박하던 인물이었겠죠. 이로써 한재희는 목표했던 대로 태산그룹 회장의 은인이 되고 사랑받는 여자가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비록 무서운 범죄를 저질렀지만, 강마루의 사랑을 이용해 아무 뒤탈 없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겁니다.

 

강마루는 무려 5년의 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몸이 아픈 여동생 초코를 혼자 두고 감옥에 가야 한다는 사실은 가슴아팠지만, 사랑하는 재희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죠. 하지만 그 날 이후 한재희는 소식을 끊었습니다. 강마루가 자기의 꿈과 인생을 기꺼이 던져버린 것은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였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꿈과 인생과 그녀를 한꺼번에 잃고 말았던 거예요. 6년 후, 서른 살의 강마루는 차갑고 무기력하고 나쁜 남자가 되어 있습니다. 일말의 동정심이나 죄책감도 없이 여자들의 몸과 마음을 희롱하며, 하루 하루를 무감하게 살아가는 동안, 그의 유일한 목표는 사라져버린 한재희를 찾는 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태산그룹의 안주인이 되어 있는 한재희와 운명처럼 다시 마주치게 됩니다. 그녀는 네 살 아들 서은석의 엄마이면서, 동시에 스물아홉 살 서은기(문채원)의 엄마이기도 합니다. 자기보다 고작 6살밖에 어리지 않은 서회장의 딸 은기를 한재희는 꼬박꼬박 "내 딸"이라고 부르는군요. 정작 서은기는 자기 엄마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재희를 벌레보듯 하며 인간 취급도 안 하는데 말입니다. 심지어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 이복동생 은석에게까지 못되게 구는 것을 보면, 서은기도 마음이 따뜻한 여자는 결코 아니네요. 하지만 이제 강마루를 만나면서, 얼음공주 서은기도 어쩔 수 없는 운명의 장난에 휩쓸리고 말았습니다.

 

새엄마의 과거 연인이었던 남자를 사랑하게 되어버린 여자, 새엄마와 의붓딸 사이에 놓이게 된 남자, 이건 참으로 막장스런 설정이기도 한데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차칸남자'라는 제목은 막장보다 더욱 불안하기만 합니다. 차라리 강마루가 서은기와의 새로운 인연을 받아들이고 그녀의 사랑을 통해 새로운 인생과 행복을 찾아간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왠지 제목과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죠? 맞춤법이 틀린 나머지 '차칸남자'는 더욱 바보스럽고 맹목적인 남자의 사랑을 연상시킵니다. 상상초월할 못된 배신을 당해 깊은 상처를 받고 인생이 망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복수할 생각으로 그녀를 찾아다녔음에도 불구하고, 한재희와 다시 마주치는 순간... 강마루의 가슴 속에서는 여전히 꺼지지 않고 있던 사랑의 불씨가 되살아나지 않았을까 싶어요.

 

 

앞으로도 한재희는 위기에 처할 때마다 강마루를 이용하려 들 것이고, 강마루는 그녀의 속셈을 다 알면서도 끊을 수 없는 사랑 때문에 계속 이용당해 주겠죠. 강마루를 사랑하는 서은기는 그런 모습을 보며 또 깊은 상처를 받게 될 것이고, 어쩌면 강마루는 한재희를 위해 서은기의 사랑을 이용하는 파렴치한 행위를 저지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부터 그는 사랑하는 재희를 위해서라면 못할 짓이 없는 남자였으니까요. 오직 재희라는 한 여자에게만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차칸남자'였으니까요.

 

만약 드라마가 저의 예상대로 이렇게 흘러간다면, 세상에 속터져서 그걸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이 드라마의 제목이 마음에 걸리는 진짜 이유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깊은 사랑이 그것을 받을 자격조차 없는 나쁜 여자에게로 향할 듯한 안타까운 예감 때문입니다.


반응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