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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최종회, 사랑과 기억의 상관관계에 질문을 던지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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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최종회, 사랑과 기억의 상관관계에 질문을 던지다

빛무리~ 2012. 7. 26. 10:05

 

 

그렇죠, 뭐... 제가 보기에도 드라마 자체는 형편없었습니다. 홍자매의 로맨틱 코미디도 이제는 한계에 달했나보다는 생각을 처음부터 끝까지 떨칠 수가 없었죠. 아주 좋게 봐준다면 일시적인 슬럼프라든가 한 번쯤의 커다란 실수라고 퉁쳐줄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전체적인 설정도 너무나 허술하고 캐릭터에도 공을 들이지 않은 티가 많이 나니 그 정도의 변명도 쉽지는 않네요. 하지만 종영 이후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살벌한 악평들을 바라보며 제 마음은 왜 살짝 불편해졌을까요? 물론 어처구니 없을 만큼 성의없고 황당한 결말이긴 했지만, 그래도 홍자매가 말하고 싶었던 건 이게 아닌데 싶어서... 가장 소중한 것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아서 조금은 서운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넘어가려고 했었는데, 생뚱맞게도 김은희 작가의 수목드라마 '유령' 17회 초반부를 보다가 마음이 변했습니다. '빅'의 결말에 관해서, 비록 허술하게 표현되었지만 그 작품을 통해서 작가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에 대해, 한 번쯤은 언급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전혀 다른 드라마에 전혀 다른 내용이었지만 '유령'의 조현민(엄기준)이 한 대사가 제 마음에 깊이 꽂히면서 '빅'의 주제를 다시 떠올리게 했던 겁니다. "사람의 정체를 결정짓는 건 뭘까요? 이름? 얼굴? 신분증? ...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결정짓는 것은 '기억'입니다. 김우현의 기억을 갖고 있지 않은 한, 당신은 김우현이 될 수 없어요!"

 

 

예전에 썼던 리뷰 '빅, 영혼 체인지의 이유에 대한 한 가지 상상'에서 저는 길다란(이민정)의 진짜 인연은 아마도 서윤재(공유)가 아니라 강경준(신원호)일 거라고 예측했었습니다. 두 사람의 영혼이 체인지된 이유는 서윤재가 강경준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서일 거라고 말이죠. 강경준은 태어나면서부터 수차례나 서윤재의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서윤재는 강경준이 애먼 곳에서 헤매지 않고 진짜 인연을 빨리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아닐까... 두 사람 모두 스스로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형제는 처음부터 그렇게 서로를 구하도록 운명지어져 있었던 게 아닐까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대충 맞아떨어진 셈이긴 하네요.

 

물론 서윤재의 몸 속에 있는 강경준의 영혼을 사랑하게 된 길다란의 처지에 몰입하기는 힘들었습니다. 설령 그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후 기억을 잃지 않는다 해도, 서로 사랑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뽀송한 얼굴과 여리한 몸을 지닌 스무살 소년이 눈앞에 나타난다면 길다란의 마음은 똑같이 유지될 수 있을까? 사랑의 본질이 아무리 영혼에 있다 해도, 육체의 모든 것을 부인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기 힘든, 아주 어려운 문제였어요.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빅' 최종회의 화두로 떠오른 단어는 바로 '기억'이었습니다. '사람'의 정체를 결정짓는 것이 기억이라고 '유령'의 조현민이 말했듯이, '빅'의 길다란은 '사랑'의 실체 또한 기억에서 비롯된다 말하고 있었죠. "(네가 기억을 잃어도) 내가 기억하고 있을거야. 걱정하지 마! ... 매일매일 너를 생각하면서, 열심히, 절대 너를 놓을 수 없을 만큼 내 마음이 커질 거야!" 서로 사랑했던 기억은 가짜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 기억이 존재하는 한, 길다란의 사랑은 끝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기억을 잃고 다른 모습으로 깨어날 강경준에게 그 사랑은 아예 '없었던 일'이 될지도 모르니, 따지고 보면 이보다 고통스럽고 허무한 사랑이 있을까요?

 

다시 체인지 되기도 전부터 온갖 오버를 떨며, 가족들에게 자기가 KKJ와 바람이 나서 서윤재와 헤어졌다고 말하는 등 길다란의 행동은 유치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서른이 다 된 나이에 고작 열 여덟 살의 어린 소년을 진짜로 좋아하게 되어버린 여교사의 미친 사랑을 생각하면 그런대로 이해할 수도 있었습니다. 길거리에서 뽀로로 노래를 부르고 뿌잉뿌잉을 하는 그 민망한 모습까지도 '미친 사랑'이라는 한 마디면 정리될 수 있었죠. 길다란 스스로도 몇 번이고 "나 미쳤다"고 말했지만, 누가 보더라도 미친 게 맞았으니까요. 하지만 어이없어하며 보던 중, 문득 가슴이 짠해지는 순간도 없지는 않았더랍니다. 나이차야 그렇다 치더라도, 한 때 약혼자이며 남편이었던 사람의 친동생인데다가, 이제 상대방은 모든 사랑의 기억조차 잃어버리고 말텐데, 다 알면서도 저렇게 포기할 수 없는 미친 사랑이란 도대체 어떤 걸까 싶었죠.

 

 

생각을 떠올리니 '기억'을 소재로 한 사랑의 이야기는 각종 예술 분야에서 적잖이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는 젊은 여성의 사랑을 그린 영화 '내 머릿속의 지우개' 였죠. 최근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천일의 약속'에서도 같은 소재가 등장했었고요. 하지만 정작 그 영화들을 볼 때는 '기억'보다 '삶'에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치매라는 병 자체가 오랜 수명을 보장할 수 없는 치명적인 병이다보니, 기억을 잃는 것보다 목숨을 잃어간다는 사실이 훨씬 더 심각하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뿐만 아니라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할 수 없게 만드는 그 병의 진행과정이 너무나 무섭다 보니, 그에 비하면 기억을 잃는 것쯤은 별 일 아니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죠. 하지만 사랑한 기억을 모두 간직한 채 곁에서 바라보는 사람의 입장은 아주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빅'의 최종회를 본 후에야 비로소 들었습니다.

 

에밀 아자르의 소설 '자기 앞의 생'에서도 비슷한 일화가 담담하게 그려졌었지요. 젊은 날 깊이 사랑했던 여인 '자밀라'에게 너를 평생 잊지 않고 기억하겠노라 맹세했다던 '하밀' 할아버지는, 인생의 황혼에 이른 지금까지도 자기가 그녀의 이름을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더없이 뿌듯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젊었을 때야 그 새털처럼 많은 날들 중에 혹시 그녀의 이름을 잊게 될까봐 두렵기도 했었지. 하지만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은 걱정 없어. 나는 죽을 때까지 자밀라를 잊지 않을 거야!" 그러나 생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면서, 안타깝게도 하밀 할아버지의 기억은 삭제되어 버렸습니다. 그럼 이제 평생토록 간직해 왔던 그 기억 속의 사랑도 사라지게 된 걸까요?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것은 '부활' 김태원의 명곡 '네버앤딩 스토리' 입니다.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되는~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뤄져 가기를~ 힘겨워한 날에 너를 지킬 수 없었던~ 아름다운 시절 속에 머문 그대이기에~" 그렇죠. 사랑한 기억이 있어야 그리워할 수도 있고, 영화처럼 다시 만나게 되는 일도 기대할 수 있겠지요. 기억이 살아있다면, 아름다운 시절 속에 머물렀던 사람이 다시 현실 속으로 걸어들어오지 말란 법도 없겠지요. 하지만 기억이 없다면... 기억이 없어도 사랑은 지속될까요? 이 질문에 그 누구도 정답은 제시할 수 없겠지만, 홍자매는 일단 어설픈 열린 결말을 통해 긍정적 해답을 제시했습니다.

 

마지막까지 제 모습으로 돌아온 강경준의 실체는 보여주지도 않으면서, 그토록 어색하고 작위적인 엔딩을 끌어내면서까지 애써 긍정하고 싶었던 이유는 뭘까요? 엉뚱하지만 저는 어쩌면 홍자매 중 한 사람이 길다란과 비슷한 처지의 사랑에 빠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단지 상상으로 그려냈다기에 최종회의 느낌은 이상할 만큼 애절했고, 이제까지의 작품들에 비해 드라마 자체의 퀄리티가 지나치게 떨어지는 것도 생각할수록 너무 이상했거든요. 그래서 혹시 작품에 올인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을 뒤흔드는 고통이 있었던 건 아닐까? 문득 저 혼자 그런 생각을 해 보았던 거죠..;;

 

 

한 쪽이 기억을 잃어도 다른 한 쪽에서 기억하고 있다면 사랑은 끝난 게 아니라고 홍자매는 외칩니다. 심지어 기억하는 쪽의 사랑이 잃어버린 쪽의 사랑마저 다시 되살릴 수 있을 거라고 강변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양쪽 다 기억을 잃었다면? 그렇다면 과거의 사랑은 소멸되어 버리는 걸까요? 사랑과 기억의 상관관계는 깊이 되새길수록 묘하게 가슴을 파고들며 애잔함을 느끼게 하는군요. 어쩌면 홍자매는 드라마 '빅'을 통해 틀에 박힌 주제를 제시하기보다, 한 번쯤은 이 정답 없는 질문을 그냥 던져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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