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적도의 남자' 이장일에게 보내는 최수미의 편지 본문
나도 이런 사랑을 원했던 건 아니야. 어려서부터 나는 참 외로웠지. 아무도 엉터리 박수무당의 딸을 사랑해 주지 않았어. 사람들은 아빠와 나를 인간 이하의 존재처럼 취급하며 무시했고, 동네 아이들은 내가 다가가면 귀신이라도 옮겨 붙는 줄 알고 기겁을 하며 도망다녔지. 하지만 꼭 한 명, 김선우만은 나를 피하지 않았어. 항상 남자아이들끼리 어울려 뛰어 노느라고 바빴지만, 그래도 가끔씩은 혼자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그림을 그리는 내 곁에 다가와서 한참이나 그림을 들여다보며 나에게 말을 걸었어. 일부러 선심쓰듯 말을 걸어주는 게 아니라, 내 그림을 정말 관심있게 바라보며 궁금한 것들을 묻곤 했었지. 선우는 한 번도 얼굴에 가면을 쓰지 않는, 진짜 친구였어. 그런데 이장일, 너 때문에 나는 그런 친구를 외면하고 말았던 거야.
나도 처음부터 이런 사랑을 하고 싶지는 않았어. 나도 여자인데, 언젠가는 나를 진심으로 아끼고 위해주는 사람 만나 흠뻑 사랑받으며 살고 싶었지. 너 같은 놈한테 벌레만도 못한 취급 받아가면서 구차하게 매달리는 사랑 따윈 하기 싫었어. 그런데 너를 처음 보는 순간부터 빠져버린 내 마음은 그 늪에서 한 번도 벗어나지 못했으니... 훗, 역시 무당 딸이라서 팔자가 드센 걸까?
내가 부경화학 사장 딸인 줄 알고 접근했다는 거, 알고 있었지만 나는 좋았어. 너와 함께 해미리에 가서 같은 햇살과 같은 바람을 맞이한다는 생각에 잠도 이룰 수 없었지. 하지만 너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 내 아버지가 부경화학 사장은 커녕 사람대접도 못 받는 박수무당이라는 사실을 너무 일찍 알아 버렸던 거지. 아무리 그래도 한 뼘쯤은 나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을 것만 같아서, 너의 인정사정 없는 차가움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는 계속 네 뒤를 따라다녔어. 그러다가... 운명의 그 날, 그 사건을 보게 되고 말았던 거야.
너에게 머리를 얻어맞고 바다에 던져진 선우가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는 동안, 나도 사람인데 죄책감이 없었을까? 간신히 숨만 붙어있는 선우의 창백한 얼굴을 볼 때마다 나는 생각했어. "최수미, 이 못된 년, 너는 죽어도 곱게 죽지 못할 거야. 산 채로 불길에 올려져서 온 몸이 불타는 고통을 사흘쯤은 견뎌야만 죽을 수 있겠지. 하지만... 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거야!" ... 이장일, 내가 왜 그랬을 것 같니?
2년 후에 선우는 정신을 차렸지만 시력을 잃고 말았지. 두 눈은 빛나고 몸놀림은 표범처럼 날렵하던 그 애가 뒤집어진 눈동자를 휘번덕거리며 더듬더듬 벽을 짚고 한 걸음씩 옮겨놓을 때,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하루에도 수십번씩 되뇌었어. "최수미... 이 맞아 죽어도 모자랄 년, 너는 다음 세상에도 행복할 수 없을거야. 사람은 커녕 소, 돼지나 벌레로 태어나서 잡아먹히거나 밟혀죽겠지. 그래도... 난 말하지 않을 거야!"
이장일, 너는 선우를 네 손으로 그렇게 만들어 놓고, 그 아이의 눈 앞에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연기를 했지. 그런데 나는 왜, 네 모습이 가증스럽지 않고... 오히려 선우보다 더 불쌍해 보였을까?
장일아... 나는 항상 너를 감싸안고 위로해 주고 싶었어. 내가 혼자인 것처럼 너도 그랬으니까... 그 끝간 데 없는 외로움이 어떤 건지를 나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 날의 사건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이유도 사실은 네 말이 맞았어. 협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네 옆에 있고 싶어서였지. 그렇게 해서라도 너를 지키고 싶었던 건, 우리가 거울을 보듯 똑같은 쌍둥이였기 때문이야. 하지만 너는 끝내 마음을 열지 않는구나.
너... 후회하겠다고 했지? 그래, 넌 후회하게 될 거야. 나를 사랑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될 거야. 가슴을 치며 통곡해도 너무 늦었을걸? 하지만 그 때는 네 곁에 내 자리가 있겠지. 너는 친구를 죽이려 한 나쁜 놈... 나는 그걸 보고도 15년이나 모른체한 나쁜 년... 이렇게 꼭 닮은 우리는 비로소 같은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겠지. 13년만에 돌아온 선우를 위해서, 또 너를 위해서, 이제는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알 것 같아. 조금만 기다려 줘. 나는 두렵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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