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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비' 서준(장근석), 홀로 쓸쓸히 중얼거리다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사랑비

'사랑비' 서준(장근석), 홀로 쓸쓸히 중얼거리다

빛무리~ 2012. 5. 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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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아버지의 곁에 있는 낯선 여인의 모습이 아니라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환자복을 입고 목에 기브스를 한 상태였지만, 아버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생기가 넘쳐 보였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던 그 모습은 나의 어머니 백혜정의 남편도 아니고 나 서준의 아버지도 아니었다. 어쩌면 서인하라는 한 남자는 원래 저런 눈빛으로 말을 하고, 저렇게 미소짓는 사람이었던 걸까? 오랫동안 잃었던 본연의 모습을 이제야 비로소 되찾은 걸까?

 

아버지가 진료실로 불려들어가고 홀로 남은 여인을 바라보며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듯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 앞에 내 어머니가 나타났다. 몇 마디 말을 나누는가 싶더니 어머니는 그 여인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뺨을 맞은 여인이 미안하다고 말하자 어머니는 다시 파르르 떨며 손을 치켜올렸지만 내가 급히 달려가 붙잡았다. 기품있고 연약해 보이는 그 여인 앞에서 더 이상 어머니가 망가지는 것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악을 써 봐야 어머니의 사랑에 희망은 없었다. 이제 아버지는 간신히 걸쳐져 있던 껍데기마저 남김없이 거두어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다른 곳으로 옮겨가 버렸다.

 

 

언제나 영혼을 잃어버린 듯 허허로워 보이던 아버지가 그 낯선 여인의 곁에서 전혀 다른 사람처럼 미소짓는 모습을 보는 순간부터, 갑자기 외로워진 나는 미치도록 하나가 보고 싶었다. 깊은 밤, 그녀가 있는 수목원을 향해 차를 달리며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몇 차례나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토록 미워했던 아버지를 사실은 내가 얼마나 많이 닮았는지,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깨닫게 되다니... 지난 수십 년 동안, 아버지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머리와 가슴을 온통 채워버린 그녀의 존재를 어떻게 해도 떨쳐버릴 수가 없었던 걸까?

 

술과 약에 취한 어머니는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졌다. 남자 간호사들에게 양 팔을 붙잡힌 채 미친듯이 울부짖는 어머니를 보며 나는 결심했다. 사랑으로 낳지도 않았고 키우면서 마음을 주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피를 이어받은 자식의 이름으로 아버지를 붙잡아 보기로 한 것이다. 나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도하는 구차스런 애원이었다. "죄송해요, 아버지. 제가 다 잘못했어요. 그 동안 아버지께 너무 못되게 굴었어요. 머리로는 아버지를 이해했지만, 마음으로는 그게 안 됐어요. 늘 아버지만 바라보는 엄마가 불쌍했어요."

 

"아버지. 한 번만 더 엄마를 봐 주세요. 엄마가 저렇게 망가지게 둘 수는 없어요. 그냥, 그냥, 아버지가 한 번 더 포기해 주세요. 어머니를 위해서, 그리고 저를 위해서요!"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내 귀에도 공허하게 들렸다. 이미 돌이킬 수 없음을 나는 직감하고 있었다. 정하나, 그 아이를 만나면서부터, 어머니와 내가 그토록 지긋지긋하게 원망했던 아버지의 첫사랑... 평생토록 아버지의 마음을 옭아매고 우리 가정을 불행하게 만든 그 첫사랑이라는 것의 실체를 나는 이제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마음을 그대로 간직한 채 30년의 세월이 흐른다면, 그 때의 내 모습은 지금의 아버지와 다를 거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

 

"포기할 수 있었다면, 이미 오래 전에 포기했을 거다. 정말이야... 그게 안 됐어. 모든 게 내 탓이다. 미안하다, 준아!" 아버지는 그 짧은 몇 마디의 말로 나의 말문을 막아 버렸다. 예상했던 대답이었고,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예전의 나였다면, 폐인이 되어가는 어머니를 외면하고 자식인 내 가슴에 못을 박으면서까지 첫사랑을 되찾겠다는 아버지를 향해 냉소를 날리며 돌아섰겠지만, 이제는 그럴 수도 없었다. 답답한 심정으로 병원 문을 나서는데, 생각지도 않은 장면이 내 가슴을 세차게 후려쳤다.

 

 

저만치서 아버지의 첫사랑이 누군가에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그 손길이 향한 곳에서 누군가가 "엄마!" 하고 부르며 반갑게 달려오는데... 그녀였다! 천하의 까칠대마왕 서준을 불과 며칠만에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킨 정하나, 바로 그녀였다. 내가 넋 나간 눈으로 지켜보는 사이에 모녀는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고, 잠시 후에는 내 아버지 서인하가 활기찬 걸음으로 다가와 합류했다. 마치 다정한 딸처럼 내 아버지의 손목을 잡고 다친 곳의 안부를 묻는 하나의 모습... 나는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

 

못 마시는 술을 아무리 퍼마셔도 정신은 말짱했다. 괜히 취한 척 남에게 싸움을 걸어 두들겨 맞으며 몸을 학대해 보아도 가슴 속의 쓰라림은 멈추지 않았다. 육신의 고통이 마음의 고통을 대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신창이가 되어 스튜디오로 돌아오자, 나와 함께 먹으려고 하나가 차려 놓았던 앙증맞은 저녁상이 보였다. 나를 기다리다 지쳐 웅크리고 잠든 모습은 철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애잔했다.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조용히 곁에 누워 그녀의 고른 숨소리에 호흡을 맞추니, 가슴의 통증이 차츰 사라지면서 온 몸이 따스한 물 속에 잠긴 듯 편안해져 왔다... Fade out.

 

 

하나야... 그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을 수만 있었다면, 너도 나처럼 행복했을까? 오늘 아침, 너의 곁에서 눈을 뜨고 제일 먼저 너의 얼굴을 보았을 때, 차라리 현실이 아니기를 내가 얼마나 바랐는지 너는 알 수 있을까? 아무것도 모른 채 웃고만 있는 네 모습이 그토록 아름다운 것도... 다시 숨막히게 저려오는 이 가슴의 통증도 모두 현실이 아니기를 나는 간절히 바랐지만 헛된 일이었다. 

 

엄마가 첫사랑과 재회하여 다시 시작하는 것을 매우 기뻐하고 있는 너에게 나는 물었다. "엄마의 행복이 너한테 그렇게 중요한 거니?... 너의 행복보다도?"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너의 성격상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이기적인 대답을 해준다면, 나는 비겁하게 그 대답을 핑계삼아 네 손목을 잡고 도망치려 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는 망설이지도 않고 "네!" 라고 대답했다. "거짓말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래요. 지금까지 엄마는 쭉 내 행복만 생각했었으니까..."

 

 

나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너의 행복보다 엄마의 행복을 더 바라는 너는, 행여 내 손을 잡고 도망친다 해도 행복할 수 없겠지. 차라리 늘 기다리게만 하고 애태우게만 했을 뿐 한 번도 무언가를 제대로 해준 적 없던 이 몹쓸 남자와 헤어지는 편이 낫다고... 차마 인정하기 싫지만, 너의 상처를 최소화할 수 있는 길은 그것뿐이라고 판단한 나는... 너에게 말했다. "우리 이제 그만... 여기서 끝내자!"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 바람둥이 서준... 마음먹고 3초만 눈을 지그시 들여다 보면 어떤 여자라도 유혹할 수 있었던 나 서준에게, 그것은 매우 익숙한 말이었다. 이제껏 만났던 수많은 여자들... 매번 내 쪽에서 먼저 결별을 고했으니까. 그런데 하나야... 지금 두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하얗게 질리는 네 얼굴을 보니, 나는 가슴이 막혀 기절할 것만 같다. 하지만 이대로 헤어져서 돌아가는 길에 쓰러져 죽는다 해도 네 앞에서는 버틸 것이다. 가장 나쁜 남자의 얼굴로 너의 미련을 끊어주는 것만이, 지금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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