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디어 마이 프렌즈' 고현정의 각성이 불러 올 새로운 인생 본문
'디어 마이 프렌즈' 한 회 한 회 등장인물들의 모습과 대사들을 가슴에 새기듯 깊은 마음으로 시청하면서도 의외로 할 말이 많지 않은 이유는 내가 너무 어려서일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스스로 꽤 나이 많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 드라마를 보면서 느낀 것은 아직도 내가 까마득한 어린애라는 점이었다. 평균 연령 70대의 '디마프'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세상을 내가 어찌 감히 이해한다거나 공감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마치 그랜드캐년과 같은 거대한 협곡을 마주한 것처럼,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깊이에 압도되어 숙연함과 경외심만 느낄 뿐이었다.
오히려 37세의 청춘(?) 박완(고현정)의 입장에 훨씬 공감과 몰입이 잘 되는 걸 보면, 역시 나는 아직 어린 모양이다. 물론 박완의 모든 선택과 행동에 공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그녀가 왜 그러는지 정도는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완이는 누구보다 엄마 장난희(고두심)를 사랑하고 순종해 왔으며, 어떤 경우에도 늘 엄마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착한 딸이었다. 겉으로는 툴툴거리며 반항하는 것 같아도 결국은 항상 엄마 뜻에 따랐고 한 번도 거역하는 법이 없었다. 늙은 엄마 동창회에 일일이 쫓아다니며 피 한 방울 안 섞인 엄마 친구들한테 자식처럼 살갑게 굴고 온갖 시중까지 들어주는 딸이 현실적으로 몇이나 있겠는가?
그래서 엄마 친구들 역시 박완을 자식처럼 여긴다. 미혼인 박완이 유부남 한동진(신성우)과 입맞추는 장면을 목격한 오충남(윤여정)은 그 사실을 장난희에게 전하며 "더 늦기 전에 말려라" 하는데, 천금같은 딸의 탈선을 믿을 수 없는 장난희는 불같이 화를 낸다. "내 딸을 뭘로 보고~ 한 번만 더 이상한 소리 하면 언니랑 내 사이는 그 날로 끝이야!" 하지만 오충남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는다. "너랑 내 사이가 끝나는 건 별 문제도 아니야. 내 딸 같은 네 딸 완이가 인생 조지게 생겼는데!" 누구나 친구보다는 자식이 먼저일 수밖에 없듯이, 완이를 정말 친자식처렴 생각하는 충남의 진심이 드러난 장면이었다.
사실 박완과 한동진의 사이는 별로 심각한 것이 아니었지만, 심각한 것으로 오해할 수밖에 없었던 오충남과 이영원(박원숙)의 개입은 문제를 일파만파 커지게 만들었다. 사실 나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박완의 캐릭터를 제법 이해하면서도, 이제껏 두 남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모습에는 공감하지 못했었다. 서연하(조인성)를 그렇게 목숨처럼 사랑했고 지금도 변함없이 사랑하면서, 단지 그가 사고를 당해 장애인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헤어진 (아무리 엄마 때문이었다지만) 박완의 선택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서연하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슬픔을 유부남 한동진에게서 위로받으려는 모습은 안타깝다 못해 처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입맞춤은 실수였을 뿐, 박완과 한동진의 사이는 더 이상 진전되지 않고 거기서 멈췄다. 두 사람 모두 차분한 이성과 현실 감각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위험했던 한 고비를 넘기면서 박완의 마음 속에는 작은 용기가 생겨난 듯도 싶었다. 한동진을 통해 새삼스레 깨달은 자신의 진심, 서연하 외에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절감하며, 이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알기에, 아무리 힘들어도 서연하를 다시 만나야겠다는 결심이 아주 조심스레 싹트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박완과 장난희의 한판 승부가 시작된 것은 필연적 순서라고 볼 수 있다.
엄마가 한동진의 회사로 찾아가 난동을 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박완은 오래 전의 일을 생각한다. 박완이 여섯 살 되던 해, 죽음을 결심한 장난희는 두 개의 요구르트 병에 극약을 타서 한 개는 어린 딸에게 건네고 한 개는 자기가 마셨다. 자기가 죽을 때는 어린 자식을 함께 데려가야 한다고 잘못된 생각을 하는 부모가 예나 지금이나 참 많은가보다. 박완은 본능적 두려움으로 머뭇거렸지만, 결국은 엄마가 시키는 대로 요구르트를 마셨다. 그리고 잠시 후 완이의 외삼촌으로 짐작되는 젊은 청년은 울컥울컥 피를 토하는 완이를 들쳐업고 절규하며 병원으로 달려갔다.
박완은 그 모든 일을 생생히 기억하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엄마에게 왜 그랬느냐고 묻기는 커녕, 내색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장난희는 믿었을 것이다. 너무 어렸을 때의 일이니 까맣게 잊었을 거라고, 어렴풋이 기억하더라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모를 거라고, 하지만 이제 그 침묵은 깨질 때가 왔다. 회사 직원들 앞에서 한동진의 얼굴에 음료수를 끼얹고 구타한 엄마의 행위는 잘못된 것이었다. 아무리 부모라도 성인이 된 자식의 사생활에 지나친 간섭은 옳지 않은 행위였고, 더욱이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괜한 물의를 빚은 셈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따라서 박완에게는 그런 상황이 재발하지 않도록 할 의무가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아니, 이제 더는 그럴 수 없다. 엄마에게 정확히 말해줄 때다. 더 이상 내 인생에 끼어들지 말라고, 엄마와 한바탕 내 인생을 걸고 붙을 때가 왔다. 더는 피하지 않겠다!" 생전 처음으로 엄마와 맞붙기를 결심한 박완의 선택은 두 모녀의 인생을 크게 바꿔놓을 것이다. 엄마를 너무 사랑한 완이에게는 항상 자기 뜻보다 엄마 뜻이 먼저였다. 엄마기 시키면 원치 않는 일도 열심히 했고, 엄마가 안 된다고 하면 간절히 원하는 것조차도 포기했다. 심지어 "절대 장애인과 결혼하면 안 된다"는 엄마의 말 때문에, 자기 목숨같은 서연하와 헤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제 더는 그럴 수 없다.
홧김에 대들어 보는 게 아니라 인생을 걸고 맞붙는 것이기 때문에, 이번 대결에서 박완은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필연적으로 엄마라는 큰 산을 넘어야 할 때가 왔다. 지금까지는 엄마라는 이유로, 사랑한다는 이유로 무조건 순종해 왔지만, 사실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다. 엄마 또한 지극히 불완전하고 결점 투성이의 인간이라, 딸에게 부당한 일을 시키거나 옳지 않은 것을 강요한 적도 많았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엄마의 지나친 간섭과 집착은 딸의 인생을 옭아매고 서서히 망가뜨렸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독이 든 요구르트를 마실 때는 너무 어려서 반항할 수 없었지만, 이제 박완은 엄마와 인생을 걸고 싸워서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 한다.
물론 "장애인과 결혼하면 안 된다"고 못박은 이유는 딸의 인생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사고로 장애인이 되어버린 남동생 때문에 구순에 가까운 친정 어머니가 아직까지 고생하는 것을 보며, 내 딸만은 장애인 가족으로서의 고통을 겪지 않고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짧은 생각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는 것보다는 그의 장애마저 품고 가는 것이 백 배 천 배 더 행복할 수 있음을 장난희는 알지 못했다. 어쩌면 장난희를 그렇게 만든 사람은, 평생 다른 여자에게만 눈 돌리고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던 완이 아버지였을 것이다. 배신과 외로움의 상처만 안겨주고 떠나간 남편 덕분에, 장난희는 사랑을 주고받는 그 행복 자체를 몰랐던 것이다.
인생을 걸고 반항을 결심한 박완은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이므로, 결국 장난희는 패배를 선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고집을 꺾고 나면, 비로소 장난희에게도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것이다. 오직 딸에게만 집착해 온 지난 세월이 얼마나 답답한 새장 속 인생이었는가를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문정아(나문희) 여사의 이혼 선언에도 매우 큰 의미가 있다. 꼰대 중의 꼰대 김석균(신구) 할배가 먼저 변화되지 않는다면 이혼은 불가피할 것이다. 몇 년을 살든 몇 개월을 살든, 자유롭기로 결심한 문정아 여사가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리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디마프' 속에서 그려지는 노인들의 모습은 존경스러운 만큼이나 불편하고 답답하기도 하다. 생노병사의 깊은 번뇌가 마치 별 것 아니라는 듯, 가장 친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조차 의연한 그들의 모습은 거대한 산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오랜 세월 철옹성처럼 굳혀져 온 고집들이 지독한 꼰대 냄새를 풍길 때면,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을 만큼 진저리가 쳐지기도 한다. (미국으로 떠나면서도 아버지 김석균과 만나기를 거부하고 전화까지 단절시켰던 순영의 선택이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이제라도 새장을 깨뜨리고 나온다면, 늙음과 젊음이 손잡고 함께 걷는 앞날은 가장 아름다운 꽃길일 수 있지 않을까? 박완의 각성으로 이미 꽃길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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