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총리와 나' 윤아의 섬세한 표정과 눈물 연기에 감탄하다 본문

드라마를 보다 /기타 드라마

'총리와 나' 윤아의 섬세한 표정과 눈물 연기에 감탄하다

빛무리~ 2013.12.10 08:35

 

의외로 산뜻한 출발이었다. 뚜껑을 열기 전에는 제목도 유치하고 설정도 어색하고 남녀 주인공의 케미도 최악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예상보다는 훌륭한 편이었다. 유치한 부분들이 있기는 했지만 못 봐줄 만큼 과하지는 않았고, 국무총리 내정자와 삼류 찌라시 기자가 계속 부딪히며 만나게 되는 과정이 좀 억지스럽긴 했지만 드라마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정도였다. 다만 이범수와 윤아의 케미는 예상했던 대로 삼촌과 조카 느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아직은 남녀 주인공이 서로에게 마음을 열기 전이니 차후의 내용 전개에 따라 조금씩 나아져 갈 거라고 생각된다.

 

 

이 작품의 정체성은 "엄마의 빈자리가 있었던 총리 가족에게 새엄마가 생기는 과정을 담은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 라고 검색 결과는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 '새엄마' 역할을 윤아가 맡았다는 건데, 처음에는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드라마 제작진은 무슨 생각으로 그 배역에 윤아를 캐스팅했으며, 윤아의 소속사인 SM에서는 또 무슨 생각으로 그와 같은 제안을 받아들인 걸까? 40대 중반 홀아비 정치인의 후처로 들어가서 줄줄이 딸린 아이들의 새엄마가 되다니, 아직도 풋풋한 소녀의 이미지가 물씬 풍기는 윤아에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이범수 입장에서도 웬만큼은 연륜과 분위기가 걸맞는 여배우를 만나야 연기하기 편할 터, 이건 양쪽 모두에게 이로울 것 없는 선택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첫 방송을 보고 나니, 꼭 그렇지만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그 이유는 예상보다 훨씬 성숙한 윤아의 연기력 때문이었다. 마치 식빵 속에 건포도처럼 이 드라마는 코믹한 설정 속에 눈물과 아픔을 콕콕 심어 놓았는데, 1회에서는 웃음과 눈물을 오가며 연기해야 하는 캐릭터가 오직 여주인공 윤아뿐이었다. 남주인공 이범수를 비롯한 정치계 쪽 인물들은 웃음기 하나 없이 무겁게 똥폼만 잡고 있으며, 윤아의 직장인 '스캔들뉴스' 쪽 인물들은 반대로 모두 오버쟁이 코믹 캐릭터들이다. 그 와중에 윤아는 홀로 천방지축 캔디처럼 싸돌아 다니며 우스꽝스런 장면들을 이끌어내지만, 동시에 가슴 한켠을 채우고 있는 슬픔도 함께 표현해야 했는데 그 연기가 썩 괜찮았다.

 

연예전문 스캔들뉴스 파파라치 기자 남다정(윤아)은 아이돌 스타의 열애 현장을 몰래 잡으려다가 생각지도 않은 정치인 권율(이범수)과의 악연을 시작하게 된다. 남다정이 자기를 찍는다고 오해한 권율이 그녀의 카메라를 빼앗아 사진을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두 사람에게 결코 유쾌할 수 없는 첫 만남이었다. 그런데 얄궂게도 다음 날 아침 남다정에게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연소 국무총리로 전격 내정된 권율의 사생활을 취재하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만다. 국회의원 시절부터 십여 년간이나 권율의 최측근에서 그를 보좌해 온 서혜주(채정안)와 정확히 어떤 사이인지를 캐내라는 것이었다. 편집장(최덕문)의 추상같은 명령에 남다정은 생전 처음으로 정치부 기자들 틈에 끼어 권율에게 접근해 보려 하지만 쉽지 않다.

 

 

민감한 정치 사안을 묻는 기자들 틈에서 느닷없이 "총리님, 혹시 재혼 계획은 있으신가요?"라고 외쳐 묻는 남다정의 새된 목소리가 권율의 신경을 건드렸다. 아내가 교통사고로 떠나간 후 한창 나이에 재혼도 하지 않고 홀로 세 아이를 키운지 어언 7년, 아직도 쓰라림이 남은 걸까?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가면 그만일텐데 굳이 남다정의 코 앞으로 다가가 쓸데 없는 질문을 한다는 식으로 면박을 주고 간다. 남다정이 불굴의 기자 정신으로 계속 따라붙자 급기야 손수 그녀를 경찰서에 끌고 가 스토커라며 넘기기도 한다. 물론 남녀 주인공이 자꾸 얽히는 에피소드가 필요해서겠지만, 총리 내정자 나으리가 참으로 한가해 보이신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사건은 다음에 터졌다. 고려일보의 베테랑 정치부 기자 변우철(민성욱)은 취재를 위해서라면 수단의 도덕성을 가리지 않는 야비한 인물인데, 권율의 일곱 살 난 막내아들 권만세(이도현)가 혼자서 집 밖으로 나왔다가 그에게 딱 걸리고 말았던 것이다. 변우철은 빵을 사 준답시고 만세를 살살 꾀어서 데리고 가는데, 머지않아 어린애가 사라졌음을 알게 된 가정부 아줌마(전원주)가 울고 불고 난리를 치면서 권율의 집안은 발칵 뒤집히고 만다. 때마침 권율의 집 근처에서 쓰레기통이라도 뒤지면 기사 거리를 찾을 수 있을까 하고 배회하던 남다정이 변우철과 만세가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한다. 만세는 잔뜩 빵만 얻어먹을 뿐 아빠에 관해서 묻는 변우철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버티는 중이었다.

 

남다정이 변우철의 비도덕적 행위를 꾸짖어 쫓고 만세를 집에 데려다 주려고 하는데, 막내가 납치된 것 같다는 소식에 공무 집행마저 중지하고 온 동네를 찾아다니던 권율과 마주친다. 권율은 상황을 오해하고 남다정을 마구 몰아붙이는데,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말라고 무섭게 엄포를 놓느라 얼굴을 바싹 갖다대고 위협하는 모습이 멀리서 보면 키스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장면이 사진으로 찍혀서 다음 날 주요 일간지마다 총리 내정자의 스캔들로 일제히 대서특필된다. 권율의 처남이자 라이벌인 기획재정부 장관 박준기(류진)의 음모였다.

 

 

자칫하면 권율의 정치 생명이 끝장날 수도 있는 위기에서 보좌관 서혜주는, 남다정이라는 여기자가 박준기 장관의 사주를 받아 꾸민 일이라고 뒤집어 씌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권율은 대쪽같은 양심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도 모르게 남다정에게 끌리는 마음 때문인지 단칼에 거절한다. 이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는 사실도 아닌 열애를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이제 두 사람은 전국민을 상대로 연인 코스프레를 하며 결혼 빙자 사기극을 벌일 예정이다. 그 와중에 순백의 진짜 사랑도 피어나고 시기 질투의 노란 꽃도 피어나겠지. 특별히 재미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냥 저냥 유쾌한 기분으로 볼만은 할 것 같다.

 

조연들의 캐릭터는 모두 지극히 뻔하다. 권율의 곁에서 십수년간이나 해바라기하다가 남다정의 등장으로 닭 쫓던 개 신세가 된 서혜주, 권율을 향한 복수심(?)으로 그에게 접근하여 수행비서 자리까지 꿰어찼는데 어처구니 없게도 그의 아내를 사랑하게 되는 강인호(윤시윤), 권율의 단짝 친구였고 처남매부 지간이었으나 서혜주를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원수가 된 라이벌 박준기... 이 사람들이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는 안 봐도 훤하다 싶을 만큼 뻔한 캐릭터들이다. 주인공들이라고 대단히 특별한 건 아니다. 이범수가 연기하는 까도남 정치인 권율의 모습은 왠지 좀 식상한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그래도 이 드라마를 보고 싶어지는 이유는 윤아가 연기하는 남다정의 신선한 매력 때문이다. 물론 아직도 소녀티를 벗지 못한 윤아의 얼굴은 극 중 캐릭터와 썩 잘 어울리지 않는다. 가장 어린 일곱 살 막내가 '아줌마'라고 부르는데도 손발이 오그라든다. 당연히 '누나'라고 불러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훌쩍 성장한 윤아의 연기력은 외모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어릴 때 엄마를 잃고 홀아버지 슬하에서 외롭게 자란 남다정은 현재 치매에 걸린 아버지(이한위)를 요양원에 모셔두고 있다. 치매는 회복을 바랄 수 없는 병이니, 하루 하루 더 나빠지지 않기만을 기도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얼마나 오랫동안 병수발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으니, 혼자 이를 악물고 돈을 벌어야 한다.

 

그녀라고 처음부터 삼류 찌라시 기자기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품격 높은 소설을 쓰고 싶었지만 현실이 여의치 않았던 것뿐이다. 남의 사생활이나 캐고 다니며 글 써서 돈 버는 것, 그녀도 치사하다고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일은 고달픈데 자부심은 없으니 더욱 힘들지만, 요양원으로 찾아가면 따뜻하게 손 잡고 반겨주는 아빠가 있어서 남다정은 밝게 웃는다. 간신히 버티며 살아가는데, 권율이라는 인간이 남의 사정은 알지도 못한 채 마구 비웃는다. 싸구려라고? 저질이라고?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냐고? 사정없이 벽에 밀어붙이고 다시는 눈앞에 얼쩡거리지 말라며 서슬 퍼런 소리를 퍼붓는데, 원망도 아닌 설움이 북받쳐 오른다.

 

 

윤아는 바로 그 순간 남다정의 심경 변화를 섬세한 표정과 눈물 연기로 완벽히 형상화시켰다. 처음엔 눈물 그렁한 채 입을 살짝 벌리고 있더니만, 다음 장면에서 고였던 눈물이 흘러내리자 약한 모습 보이지 않겠다는 듯 입술을 앙다문 표정이다. 아무리 밝고 강한 척해봐야 의지할 곳 없는 스물 몇 살의 처녀아이가, 그 가냘픈 어깨에 병든 아빠를 짊어지고, 세상의 온갖 오해와 억울함을 다 참아내며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훗날 그녀가 권율의 진짜 아내가 되기로 결심한다면, 그것은 남자에 대한 사랑보다는 엄마 없는 아이들에 대한 연민 때문일 것이다. 이 따뜻한 아가씨가 좋은 엄마로 성장해 가는 모습을 나는 역시 따뜻한 눈으로 사랑스럽게 지켜봐 줄 수 있을 것 같다.

 


8 Comments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