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편지 (5)
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벌써 9월이네요. 내가 도망치듯 한국을 떠나온지도 어느 덧 4개월에 접어드는데, 머나먼 이 곳에서도 어김없이 새로운 계절은 시작되는군요,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열띤 이마를 식히니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지난 일들이 떠오릅니다. 이제 크리스마스가 되면 내가 당신을 가슴에 품은지도 꼭 3년인데, 그 때쯤에는 말간 얼굴로 다시 돌아가 아무 고통 없이 당신을 마주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돌이켜 보니 그것은 갑작스레 찾아온 열병이었습니다. 내 나이 스물 둘... 아직은 세상이 두렵고 알 수 없는 미래가 두려워 방황하던 그 때, 당신의 작은 친절은 삽시간에 내 마음을 무장해제시켰지요. 유난히 춥던 그 해 겨울은 그 열병 덕분에 따뜻했습니다. 당신으로부터 응답받지는 못했어도, 사랑했기 때문에 나는 행복했습니다. ..
나도 이런 사랑을 원했던 건 아니야. 어려서부터 나는 참 외로웠지. 아무도 엉터리 박수무당의 딸을 사랑해 주지 않았어. 사람들은 아빠와 나를 인간 이하의 존재처럼 취급하며 무시했고, 동네 아이들은 내가 다가가면 귀신이라도 옮겨 붙는 줄 알고 기겁을 하며 도망다녔지. 하지만 꼭 한 명, 김선우만은 나를 피하지 않았어. 항상 남자아이들끼리 어울려 뛰어 노느라고 바빴지만, 그래도 가끔씩은 혼자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그림을 그리는 내 곁에 다가와서 한참이나 그림을 들여다보며 나에게 말을 걸었어. 일부러 선심쓰듯 말을 걸어주는 게 아니라, 내 그림을 정말 관심있게 바라보며 궁금한 것들을 묻곤 했었지. 선우는 한 번도 얼굴에 가면을 쓰지 않는, 진짜 친구였어. 그런데 이장일, 너 때문에 나는 그런 친구를 외면하고..
요 며칠간 느닷없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1O84'에 푹 빠져서, 놀랍게도 TV와 컴퓨터를 거의 꺼 놓은 채로 지냈습니다. 알○○ 적립금을 이용해서 1,2,3권 세트를 한꺼번에 구입해 놓은 것이 벌써 지난 여름인데, 그 두께를 보니 도통 엄두가 나질 않는 겁니다. 그리고 초반에는 그다지 끌리는 부분을 발견하지 못해서 몇 페이지 읽다가 먼지 쌓이도록 내버려두었던 것인데, 요즘 고질병인 비염 치료를 위해 꽤 먼 곳에 있는 병원을 오락가락하다보니 자연스레 차 안에서 책을 읽을 시간이 많아졌거든요. 그러다가 제1권의 중간부터 정신없이 빠져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십여년쯤 전에 '하루키 중독자'를 자칭하고 다닌 사람 중 한 명이 저였더군요. '태엽 감는 새' 이후로는 뭔가 예전같지 않다는 느낌도 들었고,..
어이, 노비양반, 망설일 것 없어. 뒤돌아보지 말고 뛰어 가. 이 모든 일은 다 내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미안하다는 쓸데없는 생각 따윈 하지도 말고, 자네는 그냥 잘 살면 되는 거야. 노비양반, 처음엔 나도 몰랐어. 내가 왜 그렇게 언년이를 찾아다녔는지를 말야. 하지만 그애 얼굴을 다시 보는 순간 알겠더라구. 눈에 안 보이니까 더 걱정되고, 하루하루 걱정이 쌓여 가면서 내가 미친놈이 되었던 거야. 하지만 노비양반,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돼. 단지 걱정이 되어서 그런 거였어. 그것 뿐이야. 그애 오라비도 죽어가면서 나에게 당부하더라구. 우리 언년이 평안히 살게 해달라고 말이야. 이제 내가 자네한테 하는 말, 오라비의 당부라 생각하고 잘 들어. 난 차마 언년이한테 말할 수가 없었어. 너의 유일한 핏줄인 오..
비담, 내 아가... 이 어미를 원망하느냐? 그래, 원망하여라. 그 힘을 딛고 일어서거라. 그것이 네 어미의 운명이었고, 이제는 너의 운명이니라. 네 어미는 여인으로, 진골 성분으로, 게다가 대원신통(왕실에 색공을 바치던 여인들의 혈통)의 후예로 태어났다. 출생과 동시에 갖가지 잔인한 운명의 족쇄가 내 발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어릴 적에는 외할머니에게서 색공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기에, 그저 삶이란 그런 것이겠거니 여겼다. 다른 삶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내게는 반란이었다. 그러나 사다함랑을 만나면서 나는 처음으로 다른 삶을 꿈꾸었다. 차라리 몰랐어야 할 꿈이었다. 찬란한 봄날과도 같았던 그 짧은 행복은 머지않아 산산히 부서져내렸고, 네 어미의 삶은 바뀌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운명에 항거하기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