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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인' 정병도의 웃기는 편지, 윤지훈의 황당한 변절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싸인

'싸인' 정병도의 웃기는 편지, 윤지훈의 황당한 변절

빛무리~ 2011. 2. 11.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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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간 느닷없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1O84'에 푹 빠져서, 놀랍게도 TV와 컴퓨터를 거의 꺼 놓은 채로 지냈습니다. 알○○ 적립금을 이용해서 1,2,3권 세트를 한꺼번에 구입해 놓은 것이 벌써 지난 여름인데, 그 두께를 보니 도통 엄두가 나질 않는 겁니다. 그리고 초반에는 그다지 끌리는 부분을 발견하지 못해서 몇 페이지 읽다가 먼지 쌓이도록 내버려두었던 것인데, 요즘 고질병인 비염 치료를 위해 꽤 먼 곳에 있는 병원을 오락가락하다보니 자연스레 차 안에서 책을 읽을 시간이 많아졌거든요. 그러다가 제1권의 중간부터 정신없이 빠져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십여년쯤 전에 '하루키 중독자'를 자칭하고 다닌 사람 중 한 명이 저였더군요. '태엽 감는 새' 이후로는 뭔가 예전같지 않다는 느낌도 들었고, 수필을 읽은 후에 좀 실망스럽기도 해서 차츰 그에 대한 관심이 멀어졌지만. '1Q84'는 정말 오랜만에 예전의 그 마법과도 같은 홀릭 현상으로 다시 저를 이끌었습니다. 제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하루키 초기 작품들의 그림자가 선명하게 스쳐 지나가며, 그 모든 것들이 통합되어 있는 느낌입니다. 3권까지 다 읽고 나면 리뷰를 한 번 써 볼 생각인데, 과연 이 엄청난 작품을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군요. 하지만 '진짜' 좋은 예술작품을 접한다는 것은 언제나 감미롭고 만족스러운 일입니다.


드라마 '싸인' 리뷰를 시작하기에 앞서 다른 소리를 좀 늘어놓았군요. 요 며칠 사이에 블로그 관리에 소홀했던 이유 중 하나를 말씀린 거라고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솔직히 요즘 드라마 중에는 제 마음에 꼭 드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얻는 즐거움도 예전 같지를 않습니다. 제 눈이 높아져서 이토록 불만스러운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러다 보니 포스팅 소재도 찾기 어렵고, 글을 쓴 후에도 스스로 흡족한 경우가 드뭅니다. 게다가 일종의 '무기력' 증세까지 겹쳐서 여러가지로 쉽지 않네요..^^

'싸인'은 그나마 요즘 드라마 중에서 나름 괜찮은 편이라고 느끼던 작품인데, 12회에서는 또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단순한 옥의티라든가 연출상의 실수 정도라면 오히려 너그럽게 봐주고 지나가겠는데, 주제의식이 근간부터 흔들리니 도저히 황당함을 금할 수 없더군요. 특히 정병도(송재호) 원장의 유서는 어찌나 요령부득이고 유치한지 그 낭독을 듣는 내내 손발이 오그라들었고, 그 말도 안 되는 편지를 받고 펑펑 울다가 말도 안 되는 결정을 내리는 윤지훈(박신양)의 모습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쥐어박고 싶을 지경이었습니다.


현재 한영그룹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5건의 의문사 사건은 현재의 대표이사 정차영(김정태)의 살인 행위임이 명백히 입증되었습니다. 더불어 20년 전에 일어났던 5명의 의문사 사건 역시 정차영의 아버지인 전임 회장의 범죄임이 분명히 밝혀졌고요. 그 20년 전 사건의 피해자 중에는 윤지훈의 아버지 윤영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윤지훈은 충분히 정의의 편에 설 수 있었고, 아버지의 억울함도 풀 수 있는 기회를 잡았습니다. 죽은 정병도 원장의 명예도, 국과수의 신뢰조차도 진실보다 중요하지는 않다고, 그는 이명한(전광렬)의 앞에서 자기 입으로 똑똑히 선언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윤지훈은 뼈를 깎아내는 아픔이 있더라도 끝까지 소신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이없는 변절(?)은 윤지훈의 캐릭터를 망가뜨렸을 뿐 아니라, 작품의 주제마저 흔들어 놓았습니다. 드라마의 초반부터 국과수의 법의관들은 이명한과 그 일당을 제외하고는 모두 나름 정의로운 인물들로 그려져 있었지요. 죽은 자의 마지막 말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그들이 억울함을 안고 저 세상으로 가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사명감을 지녔던 것입니다. 그 중에도 윤지훈은 자기 아버지의 석연찮았던 죽음으로 인해 가슴에 한이 맺힌 인물입니다. 그 죽음이 자살이 아니었음을, 아버지가 자기와 가족을 버리고 일부러 떠난 것이 아님을 증명해 주었다는 이유로, 윤지훈은 정병도 원장을 존경하며 은인이자 멘토로 여기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알고보니 정병도는 죽은 윤영진을 비롯해 무려 5명의 사인을 조작하는 비리를 저질렀습니다. 정병도는 윤영진의 억울함을 풀어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죽음을 억울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던 겁니다. 그 이유는 국과수를 살리기 위해서였다고 포장되었지만,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결국은 돈 때문이란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비리를 통해 큰 액수의 예산을 확보하고 국과수를 운영해 나가면 그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5명의 죽음을 억울하게 만들어서, 그 피를 기반으로 다른 죽음들을 억울하지 않게 해 준다는 것입니까?

호기로운 청년 법의관이던 이명한이 악역으로 변신하게 된 계기도 '돈'으로 대변되는 힘과 권력의 추구였을 뿐 별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동료 법의관이 허무하게 과로사한 사건 이후, 힘이 없으면 그 어떤 소신도 펼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명한은 힘을 얻어서 돌아오겠다며 미국으로 떠났지요. 돌아온 후의 이명한은 지금껏 보다시피, 힘은 얻었으나 더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껍데기일 뿐입니다. 이명한이 떠난 후, 가뜩이나 부족한 예산과 인원으로 궁지에 몰려 있던 국과수는 무너질 위기에 처하는데, 그 때 바로 한영기업의 연쇄살인 사건이 터졌습니다. 정병도는 '국과수를 포기할 수가 없어서' 한영기업 회장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돈을 받아서 국과수를 유지시키고 자기의 명예를 지켰던 것입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정병도가 이기심과 명예욕으로 똘똘뭉친 악역이었다면 이해가 되겠는데, 정병도는 그런 캐릭터가 아니었잖습니까? 검찰 시민위원회에 증인으로 출석하려던 윤지훈은, 정병도가 죽기 전에 유서처럼 자기에게 남긴 편지 한 장을 받아듭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무슨 노래 가사처럼 "너의 말이 그냥 나는 웃긴다~" 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더군요. 순정만화 속에서 불치병에 걸려 죽어가는 사춘기 소녀가 남자친구에게 남긴 편지처럼 감상 투성이였을 뿐, 도무지 국과수 노원장의 편지 같지도 않았고 설득력도 전혀 없었습니다.

"네가 이 편지를 볼 때쯤이면 난 아마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게다.(지독히 전형적인 멘트로 시작 -_-) 20년 전 내가 너를 처음 만난 날은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날이었고, 또 가장 악몽같은 날이었다. 그 날은 내가 처음으로 부검 결과를 조작한 날이었어. 치졸한 변명이지만 나는 국과수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너와 함께 보낸 20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닭...살...;;) 내 인생의 마지막을 함께 해줘서 고맙다. 

그리고 이런 못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던 나를 이해해주기 바란다. 나는 내 명예를 천금처럼 여기며 살아왔다. 그리고 단 한 번의 실수로 내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게 놔둘 수는 없었어. 내 비밀을 묻을 수 있는, 그리고 너에게 속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이해해다오. 미안하다. 그리고 한없이 사랑한다."


요약하면, 내가 이렇게 죽었으니 너는 내 비밀을 지키고 명예를 유지시켜 달라는 압박입니다. 상황을 보니까 정병도에게는 달리 가족도 없었던 모양이고, 20년 전부터 수제자 윤지훈을 아들처럼 여겨왔던 것 같기는 합니다. 하지만 정병도가 진심으로 지훈이를 사랑했다면, 결코 저럴 수는 없습니다. 그 아버지의 죽음을 암흑 속에 파묻어 버린 채 어떻게 그 아들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며, 이제 와서는 자기의 죽음을 무기삼아 제자를 압박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진실을 알고 상처받을 지훈이의 마음을 배려하지는 못할 망정, 어떻게 소신을 버리고 거짓을 증언하여 자기의 명예를 지켜달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한 명도 아니고 다섯 명의 죽음을 의도적으로 조작했으면서 '실수'라고 주장하는 것도 우습고, 더구나 '자살'이 너에게 속죄하는 방법이라고 하는 말도 우습고, 내 비밀을 묻을 수 있는 방법이 이것뿐이었다는 협박(?)도 우습고, 너를 처음 만난 날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날이었다는 둥, 너와 함께 보낸 20년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다는 둥, 한없이 사랑한다는 둥 하는 닭살 멘트들은 그 중에서도 가장 웃겼습니다. 알고 보니 정병도는 죽는 순간에도 거짓의 껍데기를 더욱 견고히 휘두를 만큼, 가장 파렴치하고 가증스런 인물이었군요.


전체적으로 너무 유치한 편지 때문에 잠시 멍해져 있는 사이, 주인공 윤지훈이 12회 엔딩에서 제대로 뒤통수를 쳤습니다. 그는 스승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검찰 시민위원회에서 잘못된 증언을 하고 만 것입니다. 그것은 20년 전에 죽어간 자기 아버지에 대한 배신이었고, 함께 일해 온 고다경(김아중)을 비롯한 동료들에 대한 배신이었고, 소신을 지켜 온 윤지훈 자신에 대한 배신이었습니다. 그 모든 배신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결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은 현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연쇄살인을 덮으려 했다는 점입니다.

이 세상의 권력을 지닌 살인마 정차영은, 잘못을 뉘우치기는 커녕 그 손을 멈출 생각조차 없는 싸이코패스입니다. 한영그룹의 비리를 알고 있는 산악회 멤버 중 이미 5명은 그에게 살해당했지만, 아직도 한 명이 남아 있습니다. 이철원이라는 그 직원이 살아있으면 정차영은 마음편히 지낼 수 없을 것이니 추가 살인의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들통나서 검찰에 체포되었는데도 이토록 쉽게 빠져나간다면, 앞으로 정차영은 더욱 대담하게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를 것입니다. 이미 죽은 사람들의 억울함에, 살아남은 사람들의 위험까지 더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정의로운 주인공 윤지훈은 죽은 스승의 허울좋은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수십년간 쌓아 온 국과수의 신뢰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말도 안 되는 명분하에 이 끔찍한 범죄를 덮으려 하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의 거짓 명예를 지키면 무엇할 것이며, 국과수의 신뢰는 일단 무너지더라도 이제부터 다시 쌓으면 됩니다. 국과수는 어차피 필요한 기관이니,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아 새로 시작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윤지훈이라는 캐릭터에도 맞습니다. 그런데 어쩌자고 명백히 안티몬 중독사인 한태주의 죽음을 자연사라고 위증한 걸까요? 그렇게 해서 무엇을 지킬 수 있으며,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물론 윤지훈의 말대로 안티몬 중독사에 대한 확정적 전례와 조사 자료가 없기 때문에, 현재 확보된 증거만으로 정차영을 구속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여 그렇게 증언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시적이라도 정차영이라는 악마를 놓아주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확정적 심증이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 구속시키는 것이 옳았습니다.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타살이 분명한 한태주의 죽음을 자연사라고 증언한 윤지훈의 태도는 옳지 않았습니다. 설령 다음 주에 반전이 있다 해도 말입니다.


비록 일시적이라 해도, 주인공의 뿌리깊은 신념이 흔들리면 작품의 주제가 큰 타격을 입습니다. 무엇보다 늙은 정병도 원장의 그 '오글거리는 편지'는 다시 들어봐도 진저리가 쳐질 만큼 유치해서 당황을 금할 수 없군요. 일종의 '코믹했던 장면'으로나 기억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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