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미실 (64)
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춘추(春秋)야, 내 아들 춘추야, 머나먼 길에 고단한 몸으로 돌아온 너를 한 번이라도 따뜻하게 안아 줄 수만 있었다면 구천(九泉)에서도 이토록 한스럽지는 않았으련만, 이 못난 어미는 너에게 한 조각 힘도 위로도 주지 못한 채 이처럼 차가운 땅 속에 누워 있구나. 가엾은 내 아들 춘추야, 부디 굳건하게 너를 지켜야 한다. 네 어미는 언제나 겉으로는 강한 척하려 애썼으나 속은 그렇지를 못했어. 나는 너무 약했고 매일 두려움과 죄책감에 시달리며 떨고 있었다. 세 번째 남동생을 또 잃으신 어머니 마야황후의 애끓는 울음소리를 들으며 황후전 밖에 서 있었을 때, 눈앞에 독사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어렸었단다. 미실은 몸을 낮추어 나를 부드럽게 끌어안고는 귀에 속삭였지. "너 때문이다..." 춘..
원래는 오늘 '천명공주의 편지'를 다듬어 올릴 생각이었으나, 어제 예고편을 보니 오늘 방송분에서 춘추 공자가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것 같더군요. 아들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나서 어머니의 편지를 다듬는 편이 낫겠다 싶어 내일로 미루었습니다. 하여 오늘은 어제 39회 방송을 보며 가슴 깊이 느꼈던 서러움에 대해 가볍게 풀어 볼까 합니다. 어제의 주인공은 단연 덕만공주였습니다. 물론 미실이 차지하는 비중도 적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무엇보다 덕만공주가 마지막 순간에 보여준 충격적인 결단으로써 그녀의 존재감은 기존의 배 이상으로 불어났다는 것이 저의 판단입니다. 손에 피를 한 방울도 묻히지 않고 왕이 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제 그 하얗기만 하던 손에 스스로 피를 묻혔으니, 그녀는 스스로 왕이 ..
오늘 밤이면 '선덕여왕' 39회를 시청할 수가 있겠군요. 지난번에 '선덕여왕, 완전 소중한 남성 캐릭터 열전' 을 포스팅한지가 꽤 오래 되었는데, 오늘은 또 한 번 '내맘대로 순위'를 매기며 여성 캐릭터들을 정리해 볼까 합니다.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 취향에 따라 매겨진 것이니 순위에는 너무 개의치 마시기 바랍니다...^^ 1. 미실 - 절대 카리스마, "저 미실입니다..." '선덕여왕' 최고의 여성 캐릭터를 고현정이 연기하고 있는 미실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저 외에도 무척 많으실 것 같습니다. 아마 거의 대부분이 아닐까 싶네요. 제목은 선덕여왕이지만 사실 훗날의 선덕여왕이 되는 덕만공주의 캐릭터는 아직도 완벽히 살아나지를 못하고 있지요. 초반부터 탄탄하게 쌓아 올려진 미실의 아성을 위협하려면 솔직히 아직..
내 딸 덕만공주와 사막에서 헤어지고 난 후, 몇 년간이나 칠숙랑(柒宿郞) 당신과 함께 지내면서 나는 한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군요. 당신이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 힘이 무엇인지를 말이예요. 당신의 강인한 생명력이 그 모래더미 속에서 결국 나를 구해냈으니, 나 또한 그 힘의 신세를 졌다고 볼 수 있지 않겠어요? 나는 한동안 덕만이가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살아갈 힘을 잃어버렸었지요. 아시나요? 사람은 말이지요. 자기가 꼭 지키고 싶은 것 하나만 있어도 그걸 붙잡고 살아갈 수 있거든요. 내게는 덕만이가 그런 존재였어요. 나는 어려서부터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어요. 시녀로 입궁해서도 심부름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언제나 넘어지고 뒤집어 엎으며 사고를 쳤지요. 백정(伯淨)왕자님을 처..
어머니, 소자 춘추(春秋)이옵니다.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너무 늦게 돌아와 마지막 싸늘한 손 한 번도 잡아보지 못한 춘추이옵니다. 겨우 말을 배울 어린 나이에 어머니 품을 떠나 이역만리 타국에서 그리워만 하다가 때로는 원망도 하였습니다. 저를 떠나 보내시던 그 애틋한 모습을 어찌 한시라도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열 밤, 스무 밤보다도 더 오래 떨어져 있어야 한다며 울먹이시는 어머니 앞에서, 철없는 저는 놀러가는 아이처럼 마냥 들떠 있었더랬지요. 제 기억에 남아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비록 저와의 헤어짐을 슬퍼하며 울고 계셨지만, 얼마나 젊고 고우셨는지 저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이모님을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아니, 원망합니다. 이모님이 아니었더라면 어머니는 여전히 고..
사실 지난번에 "문노가 제자 비담에게 주는 편지"를 작성했으니, 오늘은 "비담이 스승 문노께 드리는 편지"를 작성하여, 아버지같은 스승을 마지막으로 떠나 보내는 비담의 절절한 심경을 담아볼까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막판에 염종을 따라가는 비담의 약간 뒤집어진 눈빛을 보니 도대체 이 녀석이 다음에 어떤 행동을 취할지 짐작할 수가 없어서, 비담 캐릭터에 감정이입을 하려다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답니다. 비담은 내력이 파란만장하고 상처가 많은 아이라는 점만은 확실하지만, 아직도 선악의 경계에서 격렬하게 흔들리는 녀석이라 오직 다이내믹할 뿐 종잡을 수가 없어요. 캐릭터와의 감정 일치에 실패한 관계로, '선덕여왕' 37회 리뷰는 편지 형식이 아니라 평범한 일반 리뷰로 진행됩니다. 편지 시리즈를 기대하셨던 분들께는 ..
나, 비담은 굉장히 낙천적인 사람이야. 다들 알지? 하지만 이번에 밝혀진 또 다른 비밀은 나로서도 감당하기가 쉽지는 않았어. 스승님이신 문노공이 일찌기 나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면서도 지금까지 숨겨 오셨던 그 대업이 바로 '삼한일통' 이라는 것 그 자체는 별로 충격이 아니었어. 그런데 왜 그 대업을 나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걸까? 대체 내가 누구이길래? 지금껏 궁금해하지도 않았던 부모이지만, 이제 나는 내가 과연 누구인지를 알아야만 했어. 역시 스승님이 숨겨두셨던 사주단자와 황실 서고의 기록을 통해서 나는 내 정체를 알 수 있었지. 나는 진지왕과 미실궁주의 아들, 왕자 형종(炯宗)이었던 거야. 내 신분을 알게 되자 이상하게도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덕만공주였어. 나는 이제껏 내가 스스로 원해서 무언가를 ..
비담(毗曇)아, 버림받은 핏덩이였던 너를 품에 안아 데려올 때 나 문노(文弩)의 마음은 매우 착잡하였다. 나의 어머니는 가야국의 문화공주(文華公主)이시니 나는 가야 왕실의 외손으로서 원래 신라에 기반이 없었으나, 네 어머니 미실궁주의 보살핌으로 8세 풍월주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나는 사다함이 살아있을 때 그와의 의리가 깊었으며, 세종공과도 막역한 사이로 지내고 있었다. 게다가 미실궁주의 사촌인 윤궁과 혼인함으로써 인척관계가 되어 있었기에 나는 당시 완전한 미실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네 아버지인 진지왕을 폐위하고 지금의 진평왕을 옹립하는 거사에도 가담했던 것이다. 그러던 내가, 미실에게서 돌아서게 된 이유를 아느냐? 그것은 바로 네 어미인 미실궁주가 대의(大義)를 외면했기 때문이니라. 지증..
더 늦기 전에 이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나 설원(薛原)이 그대 미실(美室)에게 편지를 씁니다. 물론 그대는 알고 계시겠지요. 하지만 이제 점점 약해져가는 그대를 보니 내 마음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내로 태어나 그대와 같은 여인을 만날 수 있었으니 나는 이 생에 아무런 여한이 없습니다. 예전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입니다. 그대의 곁에서라면 나는 한 번도 죽음을 두려워한 적이 없습니다. 처음 만나던 순간부터 그대는 나의 삶이었고, 꿈이었고, 모든 것이었습니다. 내가 좀 더 잘난 사내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내가 그 허울좋은 성골로 태어났거나, 보다 출중한 능력을 타고났더라면, 그래서 당신의 첫번째 꿈을 이루어 줄 수만 있었더라면... 당신은 그 황후라는..
너희들이 나 미생랑(美生郞)을 아느냐? 나는 10세 풍월주로서 미진부공의 아들이며 미실궁주의 아우이니라. 생전에 진흥대제께서 나를 얼마나 총애하셨는지 아느냐? 나를 자주 궁으로 부르시어 태자님들과 어울리어 춤추며 놀게 하셨느니라. 그러다가 수많은 공주들이 나의 빼어난 용모와 화술에 혹하여 먼저들 손을 뻗어오니 내 어찌 거부할 수 있을소냐? 그 일을 아신 진흥대제께서 잠시 노하셨으나 곧 슬쩍 넘어가 주셨느니라. 나를 향한 대제의 총애가 얼마나 지극했는지를 알법하지 않으냐? 물론 누님의 입김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야 없지만 말이다. 누님께 천신황녀의 자리를 선물한 자는 애초에 사다함이라 하겠으나,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처리했던 나 미생의 활약이 없었더라면 어찌 가능하기나 했을소냐! 비록 월천대사처럼 천문학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