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추노' 살려고 도망치는 그들, 혁명의 허무한 종결 본문
어차피 그들의 혁명이 실패하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허무할 거라는 예상은 솔직히 하지 못했습니다. 송태하의 수족같은 부하들이 모두 황철웅의 손에 추풍낙엽처럼 어이없이 쓰러져갈 때에도 설마 이것이 끝은 아니겠지 했었습니다. 송태하와 더불어 혁명군의 수장격이었던 조선비가 변절했을 때에도, 그 변절의 결과로 숨어있던 동지들이 모조리 잡혀들어갔을 때에도, 심지어 끝까지 남아서 활약하던 한섬이가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을 때에도 설마 했었습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횃불인 송태하의 존재가 남아있는 한, 아직은 끝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드라마 후반으로 갈수록 초반의 이미지와는 달리 더 이상 송태하가 완벽한 인간상이 아님을 충분히 알게 되었으나, 저는 여전히 마음속으로 그를 믿고 있었습니다. 이미 모든 날개가 꺾여버린 상황에서 송태하 개인이 아무리 용빼는 재주를 지녔다 한들, 혼자 힘으로는 무슨 시도조차 해볼 수 없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너무 강렬하고 매력적이었던 송태하의 첫인상 때문었을까요? 머릿속 판단과는 상관없이 저는 살아남은 송태하의 능력을 마음으로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너무나 초라하고 허무했습니다. 송태하가 생각한 최후의 희망은 오직 봉림대군의 관용 뿐이었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한양에 왔던 것도 세자인 봉림대군을 만나 선처를 부탁하기 위함이었지요. 그러나 왕실의 일원인 세자가 그저 인간적인 의리와 애정만으로 원손에게 자비를 베풀어 줄 거라는 무모한 믿음은 대체 어디에서 나왔던 것일까요? 오히려 장남 승계 원칙의 사회에서 차남이라는 약점을 지닌 봉림대군으로서는, 장자의 혈통이라는 정통성을 지닌 원손의 존재가 제일 위협적이고 꺼림칙하게 느껴질텐데 말입니다.
봉림대군에게 거절당함으로써 송태하의 마지막 희망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너희들을 살려줄 힘도, 죽일 용기도 없으니, 차라리 모두 조선을 떠나거라." 그래도 무자비한 아버지 인조에 비해서는 훨씬 선량하고 인간적이었던 봉림대군이, 자기의 무력함을 절감하는 듯 서글픈 눈빛으로 송태하를 향해 남긴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지난 주에 송태하와 이대길은 봉림대군과의 길거리 면담이 끝나자마자, 매복해 있던 황철웅 일당과 격돌했지요. 어떻게든 살아서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 급선무였던 데다가, 바로 그 시각에 노비당의 선혜청 습격 사건까지 일어났습니다. 휙휙 날아다니는 눈부신 액션에, 현란한 칼싸움과 주먹질에, 한쪽에서는 생포된 동료를 향해 총을 쏘아야 했던 업복이의 눈물까지, 보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단 위기를 모면한 이후에 송태하가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해보지도 못했네요.
아무리 봉림대군이 조선을 떠나라고 명령했으나,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그렇게 곧바로 조선을 떠나 청나라로 가겠다고 할 줄은 몰랐습니다. 주막에 둘이 몸을 숨기고 있을 때 "청나라에 갈 거냐?" 하는 대길의 질문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야지" 하고 송태하가 대답하는 순간, 무엇으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습니다.
청나라 사신의 배를 얻어타고 그들의 나라로 간다는 것은 그저 일신의 안위를 위한 도피일 뿐이지요. 그들이 키워 왔던 꿈은 연기처럼 바람결에 흩어져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된 것입니다. 송태하는 사형장에서 탈출할 때에도 용골대의 신세를 지더니, 이제는 아예 그에게 빌붙어 살아갈 작정인 모양입니다. 게다가 언년이와 원손까지 데리고 갈 터이니, 결과적으로 왕실의 핏줄인 원손을 다시금 청나라에 볼모로 맡기게 된 셈입니다. 비록 무정한 할아버지 인조는 원손을 찾아서 죽일 생각뿐이지만, 살아서 청나라에 붙잡히게 된다는 것은 죽음과는 또 다른, 엄청나게 심각한 문제입니다. 결코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예요.
실망스런 마음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송태하는 그 와중에도 무슨 잘난척 삼매경입니다. 청나라 사신들과 무슨 방법으로 연락을 취할 거냐고 대길이 묻자 "그대가 병법을 아는가? 전쟁을 해본 적이 없겠지.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한계선 너머의 일들이 비일비재로 일어난다. 모든 선이 끊어졌을 때, 연락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야" 저잣거리에 암호가 숨겨진 뜬소문을 퍼뜨려 상대방의 귀에 들어가게 한다는 방법은 저로서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던 것이라 별로 기발하지도 않더구만, 기껏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주는 대길이 앞에서 폼이나 잡고 있으니, 갑자기 송태하 장군은 제 눈에 밉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냥 대충 눌러 살아. 뭐 쓸데없이 청나라야, 청나라는?" 대길이의 저 물음이 바로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어떻게든 이곳에 눌러 있어야 또 다른 희망의 불씨라도 키워볼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랬더니 송태하의 대답하는 말이 가관입니다. "살려고 도망가지만 숨어 살지는 않는다."
점잖은 송태하가 이따금씩 저렇게 말같지도 않은 말장난을 합니다. 그래서 언년이조차 한때는 어이없어 하며 이렇게 묻기도 했었지요. "나리는 누구십니까? 노비이되 노비가 아니고, 쫓기되 쫓기는 것이 아니라니 무슨 말인지요?" 그때의 언년이처럼 지금은 대길이가 묻습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송태하라는 인물은 곧죽어도 폼생폼사입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보니, 저런 말장난이 오히려 창피한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도 않나봅니다. 조선에 남아 있으면 어딜가나 도망자의 신세일 뿐이지만, 용골대와 함께 청나라로 망명하면 차라리 귀빈대접을 받으며 폼나게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요. 원손의 존재 또한 그가 혼자 보호해야 할 때는 버거운 짐이지만, 용골대라는 강력한 배경을 등에 업으면, 오히려 소현세자를 버리고 자기를 버린 조선 왕실을 위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패가 될 수도 있는 일이지요.
이제껏 보여준 송태하의 올곧은 심성으로 보아 설마 그런 마음까지 품었을까 싶기는 하지만, 돌연 청나라행을 결심한 뜻이 저로서는 이렇게 부정적으로 밖에는 해석되지 않는군요. "살려고 도망가지만 숨어 살지는 않는다" 는 말은 도망가는 처지에 너무 자존심이 상하다 보니 그저 단순히 해본 말일까요? 아니면 용골대의 비호를 받으며 당당히 자기를 드러내고 조선 왕실과 대적하겠다는 뜻일까요?
한편 노비당 '그분'(박기웅)의 정체는 제가 불안한 마음으로 예측해 왔던 그대로였습니다. 좌의정 이경식의 수하일 거라는 예감이 점점 더 확실하게 들었지만 그래도 아니길 바랬는데 여지없이 무너지는군요. 그래도 그 젊은이는 꽤나 매력적인 캐릭터였는데 막판에 싸이코로 돌변하니 적잖이 당황스러웠습니다. 이경식이 노비당을 이용하려던 최종 목적은 바로 선혜청 습격이었군요. 그 다음 목표는 진행하지도 않고 사정없이 몰살시켜 버리니, 짓밟히는 풀꽃처럼 스러져간 그들의 목숨에 애도를 표할 뿐입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추노'에서 진행되어 온 두 갈래의 혁명은 모두 지도자의 배신, 또는 변절로 끝이 나게 되는 걸까요? 노비당의 '그분'은 원래 가짜였고, 조선비는 일찌감치 변절했고, 이제는 송태하마저 적국의 사신과 한배를 타고 이 땅을 외면한 채 떠나려 하니 말입니다.
'추노'의 결말이 비극일 것이라고 예상은 했으나, 허무함만을 남기는 비극은 아니기를 바랬습니다. 어느 한 구석에는 마지막 불씨가 남아 조용히 희망으로 타오르는, 그런 결말이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왠지 점점 허무 쪽으로 기울어가는 듯하여 불안해지는군요. 어떻게든 모진 운명에 저항해 보려 발버둥치는 업복이와 초복이의 사랑 또한, 그 앞에는 처절한 슬픔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습니다. 과연 희망의 불씨는 살아남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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