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추노' 그들은 화해를 말하는가? 반란을 말하는가? 본문
떠날 사람들은 떠나고, 만나야 할 사람들은 만나고... 오랫동안 준비해 오던 일은 드디어 포문을 열며 실행되고... 이렇게 '추노' 역시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 궁극적으로 중점을 두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비뚤어진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인지, 아니면 그럼에도 서로를 미워할 수 없는 그들의 더없이 인간적인 화해와 사랑인지,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추노'는 두 가지를 다 그려내고 있으며, 어느 쪽에 더 비중이 있는지도 시청자에 따라 의견이 다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최소한 극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에 따라 결말이 주는 여운은 많이 달라질 듯 싶습니다.
1. 외유내강한 짝귀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
포스팅의 주제와 직접적 연관은 없음에도, 짝귀의 매력에 푹 빠져버린 저는 제일 먼저 그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네요. 어느 이웃님께서 "죽은 천지호는 외강내유한 인물이었다면, 짝귀는 외유내강한 인물로 보인다"고 써주신 리뷰를 보았는데,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동안 주로 외적인 면에서 코믹하고 허술하며 따스한 모습을 보여주던 짝귀가, 일단 산채에 침입자가 발생하자 더없는 카리스마와 최고의 무술 실력으로 적을 제압하는 위풍당당함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물론 들이닥친 패거리가 황철웅과 그 일당이 아니었던 것은 다행입니다. 만약 송태하와 이대길이 없는 상태에서 황철웅이 뛰어들었다면 짝귀로서도 감당하기가 쉽지는 않았겠지요. 그러나 침입해 온 용골대의 수하 역시 범상치 않은 기백을 풍기는데, 짝귀는 슬슬 농담이나 해대면서 단 몇 수만에 그를 말끔히 제압해 버렸습니다. 하지만 역시 마음이 약해서인지, 마지막 순간에 죽이지는 못하더군요. "죽여주는 게 소원이라면... 안 들어주지~ *^^*" 하고 낄낄 웃는 모습조차 너무나 멋지더랍니다.
언년의 손에서 원손을 낚아채어 쥐도새도 모르게 도망가려던 그들 앞에 느닷없이 나타나 철탑같이 버티고 서 있는 짝귀가 어찌나 믿음직스럽던지요! 오늘도 그의 보호 속에 약한 여자와 아이들이 두려움 없이 편한 잠을 이룰 수 있는 산채의 평화가 지속되리라 믿습니다. 적어도 다음주까지는요.
2. 그들은 반란을 말하는가?
노비당의 선혜청 습격은 일단 성공이었던 것 같습니다. 양반 관리들의 사회에 엄청난 충격과 파문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예상 외 소득으로 송태하와 이대길을 위기에서 구하는 역할까지 그들이 톡톡이 해냈으니까요. 비록 일어나지 않기를 바랬던 비극... 살아서 잡히는 자가 발생하여 업복이의 손으로 직접 처단하게 되는 최악의 비극이 한 번 발생하긴 했지만, 노비당의 젊은 당주는 그쯤이야 충분히 예상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속시원했던 것은, 사전에 당주의 손으로 깨끗하게 처리된 사기꾼(윤기원)의 최후였습니다.
초반에는 거의 완벽남의 캐릭터였으나 갈수록 무력하고 답답한 남자로 변해가는 송태하를 보면, 만감이 교차합니다. 소현세자의 유서를 받아들고 눈물을 흘리다가 거침없이 탈출을 감행하던 송태하... 그를 쫓는 관군들은 물론이요 주인공인 추노꾼 대길조차도 그의 무술 실력에는 상대가 되지 못해, 온 사방이 적으로 깔렸음에도 마치 공터를 누비듯 원손을 구하기 위해 쾌속질주하던 송태하... 그런 와중에도 겁탈당할 위기에 처한 여인을 그냥 보고 지나치지 못하는 의협심까지... 그때까지만 해도 송태하는 더 바랄 것 없는 최고의 남자였습니다. 그 후, 굳이 소복 차림의 언년이를 데리고 다니기 시작하면서 그의 캐릭터에 쩍쩍 금이 가기 시작했지요.
그토록 믿었던 친구와 동료에게 연달아 배신당하고, 충직했던 부하들이 모두 눈앞에 주검으로 쓰러진 모습을 보았으면서도, 아직 송태하는 사람에 대한 맹목적 믿음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을 의심부터 하고 보는 대길보다, 어쩌면 무조건 믿고 보는 송태하가 제 속은 편하고 행복할지 모르지요. 그러나 보는 사람은 답답해서 속이 터질 지경입니다. 또 배신당할 것이 훤히 보이는데, 곧죽어도 호랑이 입속으로 걸어들어가서 확인을 해봐야겠다 고집을 부리니까요. 결과적으로 현재의 세자인 봉림대군을 향한 송태하의 믿음은 다시금 뼈아픈 배신으로 돌아왔으며, 그와 대길은 한양 한복판에서 황철웅 일당에게 포위됨으로써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물론 일부러 때를 맞춘 것처럼 하필 그때 일어난 노비당의 선혜청 습격 사건으로 간신히 위기를 벗어나게 되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벗어나 원칙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송태하와 같이 올곧은 인물의 믿음에 언제나 배신으로 보답하는 이 사회가 비뚤어진 것입니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송태하가 수차례나 목숨을 살려 주었던 황철웅... 그리고 오랫동안 함께 거사를 도모해 왔던 동료 조선비... 그리고 위험에 빠진 조카를 구해주지 않겠다고 단언하는 봉림대군까지... 이 사람들로 하여금 송태하의 믿음을 저버리게 한 것은, 썩은 권력구조를 기반으로 한 상류층 사회의 압박이었습니다.
이 썩은 사회를 뒤집어 엎기 위한 노비당의 반란은 계속될 것 같습니다. 예고편에서 보니 젊은 당주의 정체는 아마도 노비가 아니라 지극히 높은 신분을 지닌 인물인 듯한데, 여전히 그 정체는 아리송하군요. 그가 무언가를 내보이니 오포교가 바짝 엎드리며 몰라 뵈었다고 송구스러워하는 장면이 언뜻 보였거든요. 뭐 그의 신분이 어떻든 간에, 지금까지 드러난 대로 그가 계획하는 혁명이 정말 부패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라면, 이 드라마의 주제는 '반란' 쪽으로 좀 더 기울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지는 모르겠군요. 업복이도 점점 더 깊은 회의에 빠지는 듯 싶고 말입니다.
3. 그들은 화해를 말하는가?
이상하게도 당연히 서로를 적대시해야 할 것 같은 인물들이 모두 친해져가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의 메시지가 '저항'이나 '반란'보다 '화해' 쪽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고 제가 판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무엇보다 네 명의 주인공들이 거의 극단적인 화해의 행보를 보여주고 있거든요.
언년이와 설화... 어찌된 셈인지 이 둘은 만나자마자 친자매처럼 가까워져 버렸는데, 만약 조금만 생각을 달리 했다면 얼마든지 서로 가자미눈을 뜨고 흘겨보며 미워할 수도 있는 사이였습니다. 비록 언년이가 지금은 송태하의 아내가 되어 있지만, 대길을 향한 연정이 마음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볼 수도 없는 상황이니까요. 언년이의 입장에서는 그토록 오랜만에 죽은 줄 알았던 첫사랑의 연인을 다시 만났는데, 그의 곁에서 알짱대는 설화의 존재가 매우 거슬렸을 수도 있습니다.
설화의 입장에서야 더 말할 것도 없지요. 그녀의 마음속에는 오직 대길 오라버니뿐인데, 벌써 다른 남자에게 시집까지 가버린 언년이를 대길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자기를 눈앞에 두고도 항상 언년이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눈물 흘리는 대길을 보면, 설화의 마음속에는 자칫 언년을 향한 분노가 타오를 수도 있을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들은 지극히 여성적인, 그보다도 지극히 모성적인 사랑으로 대길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털끝만치의 이기심도 들어가 있지 않은 그녀들의 순수한 애정은, 대길이라는 존재로 인해 서로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가엾이 여기고 위해주게 만들었네요. 언년이는 대길 도련님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현재 그의 곁에 있는 설화를 동생처럼 아끼고 있으며, 설화는 어떻게든 자기가 대길 오라버니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으로 그가 사랑하는 언년이의 모든 것을 본받으려 애쓰고 있습니다. 용골대의 부하들이 언년이와 원손을 습격했을 때, 그 장면을 제일 먼저 목격하고 짝귀를 불러와서 위기를 모면하게 했던 것도 기특한 설화의 활약이었지요.
여자들이야 원래 친화력이 강한 존재들이니 그렇다 치고, 이 뻣뻣한 남자들이 가까워지는 과정은 참으로 기이하면서도 흥미롭습니다. 한 여자를 사랑하는 두 남자라니, 어떻게 이들이 가까워질 거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이 남자들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큰 마음과 놀라운 배포를 지닌 사내들이었습니다.
언년이의 첫사랑, 죽었다던 옛 정인인 이대길의 등장은 송태하에게 있어 청천벽력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반가의 규수인 줄만 알았던 언년이의 정체가 노비였다니, 그의 입장에서 만약 이기적으로 판단했다면 아무리 혼례를 올렸다 하나 그녀를 저버릴 수도 있는 문제였지요.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라 해도 언년이는 송태하에게 아주 커다란 거짓말을 두 가지나 한 셈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송태하는 오히려 자기의 좁은 생각과 닫혀있던 세계관을 뉘우치며, 스스로 변화할 테니 자기를 응원하며 기다려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이렇게 진솔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송태하는 떠나려던 언년이를 붙잡을 수 있었고, 최강 연적인 대길의 마음까지 돌릴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송태하는 못 다 이룬 일들이 남아 있어 산채를 떠나며, 다른 누구도 아닌 대길에게 언년이와 원손을 지켜달라 청했습니다. 언년이에 대한 믿음도 있었겠지만, 이미 그의 마음속에 욕심보다 우선하는 사랑이 자리잡고 있음을 충분히 드러내는 장면이었지요. 대길에게도 그 마음이 전달되었습니다. 원래는 송태하를 아주 한심하고 꽉 막힌 양반의 전형이라고만 생각했으나, 이제 언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변화되어 예전의 그가 아니라는 사실을, 대길이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언년이를 향한 대길이의 사랑이야 굳이 말할 필요도 없지요. 그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여자를 향한 끝없는 희생과 사랑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비록 가질 수 없는 사랑이 되어 버렸으나, 그녀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만이 그가 살아있는 이유입니다. 언년이의 남편 송태하가 한심한 양반 나부랭이에서 벗어나, 썩 괜찮은 사내로 재탄생하면서 대길은 차라리 그와 동행하며, 그를 보호하고 그의 일을 돕기로 결심합니다. 모두 언년이를 위해서임은 물론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 사내들, 참으로 기묘한 인간들입니다. 사랑하는 한 여자, 언년이 때문에 서로를 죽이려고 싸워도 시원치 않을 판에, 오히려 언년이 때문에 서로를 돕고, 믿고, 의지하고 있으니까요. 대길이가 송태하와 떠났다는 말을 최장군에게서 전해들은 왕손이의 반응을 보고 저는 웃었습니다. "둘이 어딜 같이 가? 원수끼리!" 그게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한 반응이었거든요. 그러나 모두가 당연히 원수로 여기는 그들은 이미 인간의 본성인 이기심을 뛰어넘는 커다란 사랑으로 화해를 일구어냈습니다.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던 이 남자들의 화해가, 이 드라마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최고의 가치가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4. 미워할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어디로 갈 것인가?
심지어 악의 축이라 할 수 있는 좌의정 이경식 또한, 장애인인 딸을 대하는 아비로서의 애끓는 부정을 목격한 바에야 미워할 수만도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평생 송태하에 대한 2인자 컴플렉스에 시달렸을 뿐 아니라, 원치도 않았던 좌의정의 사위가 되어 그의 손아귀에 조종당하게 되면서 어두운 현실의 높은 벽을 느끼고 좌절하며 갈수록 괴물이 되어가는 황철웅 역시 그저 미워할 수만은 없는 가엾은 인물입니다.
변절자가 되어 수많은 동료들을 배신하고 죽음으로 몰아간 조선비 역시, 가장 어리석고 못난 인물이긴 하지만 자기 나름대로는 좋은 세상 만들겠다고, 잘해 보려다가 인간 본성의 나약함을 이기지 못하고 타락해버렸으니 그 또한 생각하면 딱합니다.
어린 조카를 외면한 봉림대군 역시 그렇습니다. 아버지 인조의 서슬 퍼런 압박하에, 아무리 세자의 자리에 올랐으나 여전히 불안할 뿐이고, 권력을 누리기는 커녕 언제 목숨이 달아날지 모르는 상황인데, 스스로 나서서 조카를 죽이려 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인지 모릅니다. 도움을 청하러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온 송태하에게 "너희들을 살릴 힘도, 죽일 용기도 없으니, 차라리 모두 조선을 떠나거라" 하고 외면하던 무력한 그의 모습 또한, 미워하기에는 너무나 서글플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오로지 미워할 수 있는 사람 하나도 남겨주지 않는 '추노'... 그래서 그들이 나아가야 할 궁극적 방향은 '화해'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손 잡을 수 없을 것 같던 사람들이 손을 잡고, 끌어안을 수 없을 것 같던 사람들이 끌어안으며... 그렇게 화해하는 것만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임을 가리키고 있지 않나 싶네요.
물론 "악인은 모두 개과천선하고, 양반 상놈 없는 세상이 되어, 그렇게 모두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하는 해피엔딩을 예상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건 말도 안되는 얘기지요. 제가 보기에도 '추노'는 새드엔딩일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지금까지도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고, 앞으로도 죽음의 향연은 멈추지 않을 것 같거든요. 하지만 그 피비린내 속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은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살아가겠지요. 그러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라도 화해의 여운을 제시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비극이라 해도, 절망이 아닌 희망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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