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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연극을 보다

‘레디메이드 인생’ 공연 중 배우들의 흡연에 관한 생각

빛무리~ 2017.09.08 22:51

내 블로그의 오랜 독자들은 모두 아시겠지만, 나는 어려서부터 고질적인 알레르기성 비염으로 고생해 왔다. 전신마취 수술을 비롯하여 안 써 본 약과 치료 방법이 없었으나 결국은 4~5년 전부터 후각을 잃었다. 비염이 악화되며 천식이 발병했고, 환절기가 되면 종종 콧속 깊은 곳부터 심한 통증을 동반하는 인후염이 발생하여 오랫동안 고생을 해야 한다. 현재는 그저 코의 통증과 막힘이 지나치지만 않다면, 어쨌든 고통 없이 숨만 쉴 수 있다면 감사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최근 집을 정리하고 이사하면서 피곤했던 데다가 환절기가 겹치니 또 다시 인후염과 천식이 재발했다. 속이 뒤집힐 듯한 기침에 시달리고 짙은 가래를 수없이 뱉어내며 며칠간 독한 약을 먹었다. 이제 겨우 좀 진정이 된 듯한데 아직은 완쾌되지 않은 상태에서 연극을 보러 갔다. 사실 별로 내키진 않았지만 남편이 꼭 보고 싶다기에 따라갔던 것이다. 그런데 공연장에서 나는 이제껏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표를 끊고 입장할 때 “공연 중 2~3차례의 흡연 장면이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라는 안내를 받기는 했다. 솔직히 달갑지는 않았으나, 기껏 공연장까지 갔는데 그 이유 때문에 안 보겠다며 돌아설 수는 없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 피우는 것일텐데 무슨 큰 문제가 있으랴 싶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나의 예상을 훨씬 빗나간 것이었다.

공연장은 지하에 있었는데 환기 시설이 잘 갖추어지지 않은 듯했다. 공연 중 배우들이 담배를 피우자, 잠시 후 공연장의 어두운 허공에는 가로 세로 2미터 가량의 거대한 구름이나 안개처럼 보이는 담배연기 뭉치가 떠다니기 시작했다. 그 연기 뭉치는 굉장히 짙고 견고했으며, 쉽게 흩어지지도 않았다. 하필이면 공연장에 일찍 도착해서 앞쪽에 자리잡은 탓에, 나는 속수무책으로 그 담배연기 뭉치가 둥둥 떠다니다가 기류를 타고 흘러서 내게로 덮쳐오는 것을 고스란히 덮어쓸 수밖에 없었다.

후각을 잃은 탓에 냄새는 맡을 수 없었지만, 단지 그 시각적인 효과만으로도 나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거의 밀폐된 공간에서 짙은 담배연기 구름을 뒤집어쓰다니, 아직 낫지 않은 기침과 인후염이 시시각각으로 악화되는 느낌이었다.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공연장에서 그럴 수도 없었다. 나는 흡사 화생방 훈련을 견디는 기분으로 연극 관람은 뒷전인 채 그 시간을 참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연극 자체도 무척 재미가 없었지만 그건 개인적인 취향 탓도 있겠고, 이 포스팅에서 집중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작품성에 관한 문제가 아니니 패스하기로 한다. 단지 나는 왜 굳이 연극 공연 중에 배우들이 실제로 담배를 피워야 했는지에 커다란 의문을 표하고 싶다. 리얼리티를 살리고자 했다고 답할 것인가? 하지만 어차피 연극 무대에서 100% 리얼리티를 표현할 수는 없다. 더욱이 뒷자리의 관객들에게는 담배를 실제로 피우는지 가짜로 피우는지가 똑똑히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이 남의 물동이를 잡아채어 물을 마시는 장면도 있었는데, 그 물동이는 비어 있었다. 실제로 물을 담아 왔다면 바닥에 흘려지거나 다른 문제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 연극 무대에서는 그런 식의 뻔히 보이는 설정이 종종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담배를 피우는 장면 역시 불을 붙이지 않은 상태에서 그냥 피우는 시늉만 했어도 되었던 게 아닐까?

이제껏 살면서 수없이 많은 연극과 뮤지컬을 관람했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서 몹시 당혹스러웠다. 관람객들 중에 나처럼 호흡기 질환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전혀 염두에 없었던 모양이다. 배우들의 흡연 장면은 미리 예고한 대로 2~3회에 걸쳐 지속되었고, 맨 처음부터 둥둥 떠다니던 담배연기 구름은 더욱 짙어졌다. 왜 공연은 그토록 길게 느껴지는지, 스트레스를 받은 탓일까 약을 먹으면서 좀 나아졌던 콧속의 통증이 다시 심해지는 느낌이었다.

요즘은 TV에서도 흡연 장면을 규제하고 있는 시대인데, 차라리 브라운관을 통해서 보는 거라면 실제로 연기를 흡입할 가능성이 없으니 그게 훨씬 낫겠다. 이건 꼼짝도 못하고 갇혀 있는 상태에서 실제로 연기를 맡아야 하는 상황이니 정말 고역이었다. 우리는 공연장에 도착하기 전까지 배우들의 실제 흡연에 대하여 전혀 사전 정보를 접하지 못했다. 내가 보기에는 이런 설정 자체가 큰 문제이지만, 그래서 납득할 수 없지만, 무슨 이유에서든 꼭 이런 설정을 넣어야만 했다면 관객들에게 충분한 사전 고지를 했어야 할 것 같다. 그 연극을 선택함에 있어서 꼭 미리 알아야만 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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